# 41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4)
하지만 악불비는 죽어도 할 기세였는데, 일단 재촉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로서도 더는 네가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이번에 결심을 하지 못하면 너는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해야 한다!”
확실하게 못을 박고 있었다.
어쩌다 무예라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일까.
시대상으로 그리되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정확히 그녀가 자란 어린 시절은 광풍과 노도의 시대였다.
홍건군과 원과의 전쟁이 치열했던 때에 태어나 원이 밀려나고 명이 일어섰으며, 개국 초기의 엄청난 정쟁政爭과 학살虐殺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랐으니까.
여자의 몸이라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무예를 수련하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요는 그렇게 수련하기 시작한 무예가 특이하게 취향에 맞아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 탈이지만.
무예를 좋아하게 되다 보니 당연한 것처럼 영웅들의 무용담도 좋아하게 되었다.
암흑이라 해야 할지 여명黎明이라 해야 할지, 개국開國의 혼란 속에 그렇고 그렇다 여겨지는 인물들이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힘겨루기를 하던 시기. 유난히 빛나 보이던 별이 있었다.
군위제일검.
약관에 출사하여 강호 유수의 강자들을 물리치고 무과에 급제, 혼란의 시기에 각처에서 준동하는 범죄자들을 추적, 사사로운 감정 없이 법에 따라 처벌하고 무수한 강호의 사인들과 격돌했으며 천하의 고수라 할 기인 이사들과 부딪쳐 한 번도 패한 바가 없는 대단한 남자!
격변의 시대에 흔들리던 무림은 그의 천하였다. 마침내는 금의위의 장군으로까지 부상浮上하여 홍무제에 맞섰던 무수한 정적政敵들, 그들을 따르던 고수들과 싸우게 되었지만 또한 한 번도 패배가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손 속에 인정을 남겼던 그런 남자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했으나 직후 사태가 커져 또 한 번의 민란民亂이 일어나기 직전, 천만뜻밖에도 금군들이 백성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자 이를 개탄하며 쌓아 올렸던 입지와 모든 것을 버리고 어느 날 홀연히 무림을 떠난 굵은 인물. 덕을 기려 마침내 중원의 무인들이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예까지 준 바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줄곧 가슴이 설레었고, 반드시 그런 대쪽 같은 무인과 혼인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고 그런 무예로 어설피 협객입네 서투른 칼부림을 하며 부질없는 입신과 명예나 추구하는 인물들만 수두룩했을 뿐.
또래의 남자들은 더욱 아니었다. 어째서 다들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예라면 자신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았고, 하나같이 혈기만 넘치고 있을 뿐 제대로 인물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문인이건 무인이건 지닌 문무는 거의가 출세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명성을 초개같이 여기고 가진 것을 안으로 갈무리하며 살아가는 학鶴 같은 인물이 없지는 않겠지만 드러나지 않으므로 그런 사람들은 또한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세월 속에 나이가 들었고 어느새 스물여덟이 되었다.
후회한 바는 없었지만.
거처로 돌아온 악벽강은 못내 우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부친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하고……!
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는 혼인, 어려서부터 줄곧 그래 왔듯 허약해 보이는 사람과 살기 싫은 것을 어찌하는가.
최소한 가연을 맺고 부군으로 섬기려면 무엇 하나라도 존중하고 사랑할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쨌건 이대로는 안 되었다.
그가 옳았던 것이다.
다급해서이긴 했지만 금릉으로 출발하면서, 자신은 그에게 사귀는 사람인 양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 그는 그러지 않았고 도착하자 곧 사실을 밝혔다.
정면으로 현실과 부딪친 것이다. 볼 때부터 곧은 성품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런 성품을 가진 그에게 당치 않은 부탁을 했던 것이 잘못일 수 있었다.
필시 이런 후과後果를 알았을 것이다. 거짓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정면으로 부딪쳤고, 놀랍게도 원했던 바까지 얻어 내면서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본연에서 본연으로 남았다.
반면 자신은 계속 어려움에 당면해 있고 부끄러움까지 느끼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문제만 더 커진 꼴이 되어 버렸다.
바른 일일까. 이쯤에서 끝을 내야만 했다. 솔직하게 부친에게 혼인을 하기 싫어서 그랬노라 실토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면 계속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고 죄책감도 커질 것이며, 고사하고 기대를 가졌다가 마침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부친은 낙담까지 하게 될 테니까.
동경銅鏡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마음은 여전히 처음 무예를 수련하던 때와 같았지만 비치는 모습은 그때의 소녀가 아니었다.
“아무에게나 가야지. 주제에 무슨.”
씁쓸히 고소 지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위수문이라는 오품관.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일까.
장신에게 다시 연락을 해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대협.”
“옛! 일호 막추룡!”
돌아온 지 사흘. 모든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악벽강은 그대로 악충보의 내당주였으며 추룡은 견습 무사였다.
한 달에 걸쳐 함께 금릉까지 오가며 더러는 농담으로, 더러는 진지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은 만큼 느슨한 태도가 될 듯한데도 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꼿꼿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서 부동자세로 섰다.
참 괜찮은 청년이라는 느낌이 들고 역시 마음에 좋다.
풋,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괜한 일로 오가며 고생 많았다. 내일이 휴일이지?”
“옛, 그렇습니다!”
악벽강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해 줬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내일 오시경에 황산성으로 나와. 서문 안쪽에 향원香園이라는 주루가 있으니. 이야기했던 소저를 소개해 주겠다.”
“엣?”
추룡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정말 소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시간 약속까지 했다고요?”
“약속했으니 지켜야지. 정말 아름답고 좋은 소저니까 실수하지 말고. 차림새도 금릉으로 갈 때 입었던 옷이 좋겠어. 아무래도 멋져 보이는 게 좋을 테니까.”
“하……!”
추룡의 얼굴에 비로소 특유의 싱거운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구태여 그러실 필요 없으신데.”
그러나 악벽강은 결심을 굳힌 듯 거듭 미소 지었다.
“만나 보면 마음에 들 거다. 또래고 키도 나만 하지. 외모는 난 비교도 되지 않는다. 지혜롭고 얌전하기도 하다.”
“햐……!”
추룡은 완전히 얼굴을 붉힌 채 웃었다.
말대로라면 진짜 완전히 선녀仙女라는 것이다. 악벽강만 한 외모가 쉽지 않은데 그보다 더하다면 정말 경국지색이라는 뜻이 아닌가?
“이야기했지만 막 대협은 웃지 않을 때가 위엄이 있고 훨씬 멋지니까 이상한 농담을 하거나 싱거운 태도 보이지 말고, 확실히 하도록.”
“옛! 감사합니다!”
부동자세로 대답하며 추룡은 더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뭐, 절색의 처녀를 소개해 준다니 좋을 것이고(?) 좋으니 웃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휴일.
“하-!”
두두두두두!
오전 일찍이 둔촌에서 적낭자를 찾아 탄 추룡은 신 나게 달렸다.
절색의 처녀를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전소도 혼인을 한다 하니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옆에는 임백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란히 말을 달려 따라붙고 있었다.
“막 형, 진짜 같이 가도 돼?”
“되고말고일세! 그렇게 아름다운 소저는 반드시 잡아야지. 어려울 때는 지원이 필요해!”
시원하게 적낭자를 타고 치달리는 모습은 변함없이 사뭇 멋졌고, 도착한 추룡은 곧 꽃과 과일까지 한 아름 샀다.
한데 웬일인가! 잡으러 가긴 갔는데 엉뚱하게도 그가 간 곳은 황산성이 아닌 굉촌의 소홍의 집이었다.
배짱 좋게 ‘쾅쾅!’ 힘줘 문을 두드렸다.
“홍이! 집에 있냐!”
“앗! 아저씨! 웬일이야?”
다행히 연을 날리던 귀여운 아가씨 소홍은 집에 있었고, 두 사람을 보자 바로 알아봤다.
싱글벙글, 추룡은 일단 과일을 소홍의 품에 안겼다.
“응! 날짜가 좀 지나서 미안하지만 인사하려고 왔다! 지난번 일어났던 몽마 사건 말인데, 너도 알지? 사실은 너로 인해서 녀석을 잡게 되었다! 네가 오이 향수 이야기를 해 줘서 찾아내게 된 거지.”
“앗! 정말?”
소홍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싱글벙글, 추룡은 계속 웃었다.
“정말이고말고! 진작 왔어야 하는데 일이 좀 생겨서 늦은 거야. 사실은 나보다 여기 임백호 아저씨가 더 와야 한다고 했어! 언니는?”
정말 엉뚱하지만 황산성의 일은 황! 임백호를 지원 나온 것이었다.
만인의 오빠 임백호는 거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수준.
왠지 운도 아주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임백호를 바라본 후 소홍이 바로 고개를 저은 것이었다.
“없어. 볼일이 생겨서 외출했어. 난 차도 끓일 줄 모르는데 어쩌지?”
임백호는 또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추룡은 싱글벙글, 변함없이 웃음 지으며 소홍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다. 그냥 들러 본 것이니까. 언니 오면 다녀갔다고 전해 줘. 다음에 또 들를 테니!”
깜찍한 소홍의 눈초리가 묘해졌다.
“수상한 것 같은데……? 감사하러 왔다 하면서 왜 자꾸 언니를 들먹이지? 이런 아저씨들 무척 많은데, 감사는 핑계고 혹시 언니 좋아하는 거 아냐?”
대단한 눈치!
그러나 뭐, 추룡은 용감무쌍했다.
“응! 사실 그래! 그런데 내가 아니라 여기 임백호 아저씨야! 난 홍이가 더 좋다! 최고로 귀엽거든!”
소홍의 눈이 활짝 크게 뜨였다.
“앗! 진짜?”
“그럼 진짜지! 다음에 또 올게! 홍이랑 같이 말도 타고 놀아야지!”
“나 시간 많아! 일단 들어와, 아저씨! 나도 아저씨가 좋은데! 언니도 곧 올 거야!”
“어? 그래도 돼?”
“돼! 지금은 집에 나 혼자밖에 없어. 아빠는 오늘 당직이셔. 언니 오래지 않아 올 테니까 오면 말 태워 줘! 빨간 말 진짜 예쁘다!”
“어, 적낭자라 하는데, 홍이처럼 머리가 좋지.”
들어오거나 말거나 임백호는 본 척도 안 하고 소홍은 웃으며 마구 추룡의 손을 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고수다!’
만인의 오빠 임백호는 비로소 더 위에 천만인의 오빠가 있음을 깨달았다.
신시 초.
“홍아.”
“앗! 언니 왔다!”
능설운은 무려 한 시진이 넘어서야 나타났다. 멀리 다녀오는 듯 마차까지 타고 왔는데, 화사한 연청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었다.
변함없이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반짝이는 눈하며 오뚝 솟은 코, 홍조 도는 볼 등이 가냘파 보이는 큰 키와 더불어 더할 데 없이 아름다웠고.
임백호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는데, 상관없이 추룡은 시작부터 끝까지 소홍과 어울려 엄청나게 잘 놀았다.
절대 일부러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웃고 떠들고 마당에 그림도 그리고 적낭자의 잔등에 앉혀도 주고, 열심히 놀고 있었던 것이다.
악벽강과 어떤 절색은 아마도 신 나게 바람을 맞고 있었을 것이다.
“무사님들께서는……?”
들어오자 능설운은 뜬금없이 들어와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적잖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일단 복장이 악충보의 것이므로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아, 오셨군요, 능 소저! 혹시 저희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잖아! 전에 연을 내려 준 아저씨들이야! 우리 때문에 몽마도 잡게 되었대. 여기 추룡 아저씨는 감사하러 왔고, 임백호 아저씨는 언니가 좋아서 왔대.”
추룡의 팔에 매달린 채 웃으며 말하는 소홍의 지원이 또한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뵈었던……!”
“옛! 임백호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로소 임백호는 말문이 열린 것 같았다. 어색하긴 했지만 부동자세를 취한 채 능설운에게 힘차게 자신을 소개했고, 능설운의 뺨이 붉어지는 사이 추룡은 싱글벙글, 소홍을 적낭자에 태웠다.
“그럼 언니도 오셨고, 익숙해졌을 테니 달려 보자!”
“이야!”
“하!”
두두두두두두!
“꺄올!”
그러고는 바람같이 함께 올라 시원하게 웃으며 푸른 굉촌의 벌판을 질주했다. 소홍은 내리 웃었고, 추룡은 적낭자를 달려 명경지수 같은 남호南湖와 월소月沼, 정명을 만났던 청림을 지나 연화봉의 아래까지 갔으며, 다시 돌아와서는 굉촌의 상점가로 갔다. 소홍에게 노리개를 사 주고 음식도 사 먹는 등 한 시진을 또 그렇게 즐겁게 놀았다.
소홍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하루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홍은 너무 좋아하며 추룡을 따랐고, 묻기도 했다.
“솔직히 룡 아저씨도 언니 좋아하지? 그래서 이렇게 나에게 잘해 주는 거지? 괜찮으니까 이야기해 봐.”
그러나 뭐, 싱글벙글, 추룡은 그쪽에 대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혀! 이야기했듯 언니를 좋아하는 것은 임백호 아저씨야. 진짜 좋은 아저씨지. 어색해서 오늘은 그러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보다 훨씬 더 소홍에게 잘해 줄 거다! 그러니까 소홍도 언니에게 잘 좀 말해 주고 오면 잘 대해 줘. 난 정말 소홍이 더 좋다!”
“난 이렇게 어린데 왜?”
“어, 아저씨는 형제가 없거든. 외아들로 혼자였는데, 늘 착하고 예쁜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 딱 소홍이야. 시간 날 때마다 놀러 올 테니까 괜찮지?”
“추룡 오빠!”
소홍은 그대로 좋아했다. 사실 그는 외아들이었다. 형제가 많은 집은 다투는 일까지 생길지 몰라도 혼자인 경우는 누구라도 형제가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 어려울 때 도와주는 멋진 형이나 예쁜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란다.
임백호 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즐거웠고, 한 시진이 더 지나서야 소홍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룡이 오빠! 정말 또 와 줄 거지?”
소홍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어, 자주는 아니라도 올게! 아빠가 악충보에 계시다니 홍이도 오면 나를 찾아. 내삼향 삼단에 있다고 하면 될 거야!”
“차 끓이는 법, 배워 둘게!”
소홍은 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손을 흔들었고, 비로소 추룡은 적낭자를 치달려 다시 둔촌으로 향했다.
악충보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저물녘.
악벽강은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채 표정이 엉망이 되어 악충보로 돌아오는 숲길 한쪽에 서 있었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추룡이 감히 자신을 바람맞힌 것이었다.
소개시키기로 약속한 처녀와 함께 무려 한 시진 가까이 황산성의 향원루에서 기다렸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추룡은 소홍과 신 나게 놀고 있었던 시간이다.
한데 뭐라고 해야 할지……! 소개하기로 한 처녀와 함께 추룡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심정은 참 미묘했다.
태어나서 그런 터무니없는 기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약속을 했으니 어서 추룡이 나타나야 할 것인데,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의 연속.
안 나타나는 것도 초조하고 나타날까 봐도 초조하고, 거의 좌불안석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어쨌건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채 지금은 두 시진째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고쳐 생각했지만 원망스러운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울고 싶었다. 매우 성격이 강한 그녀였지만 가슴이 아팠다.
폭염의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상태였지만 해는 상당히 길었다.
유시酉時 말경.
해가 황산의 절봉을 넘어갈 즈음 싱글벙글, 이윽고 저만치에서 싱겁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는 한 녀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