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괴상한 신입들 (4)
골라잡아도 될 듯한 분위기.
“임 형은 여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것 같네. 오가는 소저들이 다 바라보는 것 같은데?”
임백호는 눈과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더욱 척척 힘줘 걸었다.
“응! 내가 원래 황석에 있을 때부터 좀 그랬지. 임백호 하면 그냥 다 오빠인 거야!”
사양을 모르는 성격.
“하하하!”
친구들과 있으면 추룡은 늘 웃게 되었다. 원래도 잘 웃는 성격이긴 했지만 다들 유쾌한 성격에 개성들이 꽤 별났다. 언제나 소금 역할을 하는 전소가 있는가 하면 통나무 같은 문대위, 중복 말투의 곽영, 한 성질 하는 장청, 자상한 성격의 송민, 폼생폼사하는 임백호에 이르기까지. 자신 역시 어리바리 싱거운 웃음으로 한몫하고 있기도 했다.
중심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자 촌로들이 전혀 뜻밖이라 할 부탁을 해 오기도 했다.
“보주님께 청하여 올해도 멧돼지들을 좀 몰아 주실 수 없으실는지? 무리가 꽤 늘어서 농작물 피해가 심한 편이올시다.”
“매해 하는 일인가요?”
“매해는 아니지만 드문드문 해 주곤 하오이다. 덩달아 멧돼지 고기도 얻어먹곤 하는데, 지난해 담근 홍주紅酒가 잘 여물었소이다.”
오가는 유람객들을 상대로 한 상업도 주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고 있었지만 굉촌의 주 수입은 역시 농사였는데, 멧돼지들로 인한 피해가 심하다는 것.
“건의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노인들의 뜻은 잘 익은 술과 어울리는 고기에 있는 듯한 눈치가 보였지만 선선히 추룡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뜻밖의 일인데 향용 방파에서 이런 일까지 하나 보군? 이쯤 되면 진짜 관사보다 나은 것 같은데?”
임백호는 이마를 갸웃했다.
“악충보가 특이한 걸세. 분명히 전부는 아냐. 우릴 대하는 주민들의 모습도 그렇고, 명성 그대로 정말 잘하고 있는 것 같아. 향용이라 해도 사람들이 피하는 곳이 훨씬 많네. 녹림적으로부터 지켜 준다는 것은 좋지만 자랑삼아 꽤 위세를 부리곤 하거든?”
분명히 그런 곳들이 훨씬 더 많았다.
“악 장군님의 명예가 걸린 곳인데, 아무렴 어련하겠나. 우연히 입문하게 되었지만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나도 많이 배우고 있어. 특히 막 형이 있어서 든든하단 말이지.”
“하하, 임 형은 혼자서라도 천군만마와 싸울 성격인데 이럴 땐 또 양보를 하는군?”
“아냐. 악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여간이 아니겠다 싶었지만 막 형은 정말 든든한 점이 있어. 덕분에 무예에 대해서도 다시 눈을 뜨고 있고. 칠우검을 완전히 습득하고 나면 재도전함세.”
“하하…… 그때는 내가 패할 것 같군.”
싱글벙글, 이래도 저래도 웃으며 두 사람은 벼와 수수가 물결치는 마을의 논밭 언저리를 돌아 산기슭 쪽으로 이동해 갔다.
한데 이때였다.
“앗! 안 돼!”
막 저만치 바다같이 출렁이는 죽림이 펼쳐진 산기슭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을의 옆에 있는 한 언덕 쪽에서 별안간 누군가의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
“가 보세.”
첫 사건이다 싶어 추룡과 임백호는 발끝에 힘을 실어 쉭, 언덕 위로 쏘듯이 올라갔다.
“잉……?”
하지만 뭐, 가 보니 사건은 아니었다.
“아……!”
가 보니 언덕 건너에는 여덟아홉 살 난 꼬마들이 연鳶을 날리고 있었는데, 그중 함께 연을 날리던 홍의를 입은 여덟 살가량의 소녀의 연 하나가 멀찍이 가문비나무의 높은 꼭대기 가지에 걸려 다급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또 뭐라고.”
두 사람은 싱겁게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당황해하던 홍의 소녀가 두 사람을 보자 활짝 얼굴이 펴지더니 바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아저씨, 악충보의 무사들이지?”
“응……?”
돌아서려다 말고 추룡과 임백호는 다시 여자아이를 향했다.
동그랗게 둘로 머리를 말아 올린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예쁜 소녀.
대뜸 허리띠의 숫자를 보더니 말했다.
“쫄병이네? 어쨌건 잘 왔어! 저기 연 좀 찾아 줘!”
어딘지 말하는 게 맹랑하다. 나이답지 않게 척 보더니 허리띠부터 살피는가 하면 당연히 연을 찾아 줘야 한다는 듯 명령조로 말한다.
임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 주고 싶지만 나무가 너무 높아서 말이다. 가지가 가늘어서 올라가기 어렵다. 찾으려면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연 하나로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홍의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아빠한테 이른다? 급한 일 있을 때 뭐든 말하면 들어줄 거라 했는데, 아저씨 혼나고 싶지?”
워낙 기세가 당당하다.
임백호는 눈을 끔벅거리며 소녀를 바라봤다.
“글쎄, 해 주고 싶어도 되는 일이라야 말이지. 그러나저러나 아빠가 누군데?”
홍의 소녀는 임백호를 잔뜩 째려보며 계속 공갈을 쳤다.
“난 소홍小紅이야. 아빠도 악충보에서 일하셔! 향주님인데 계급이 아주 높아. 안 들어주면 좋지 않을걸.”
“햐!”
아빠가 향주!
거부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사실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귀엽기도 하고, 추룡이 빙그레 웃으며 나무를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내가 올라가 봄세.”
그러자 홍의 소녀는 힐끗 추룡을 바라보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저씨가 올라가! 아무래도 이쪽 아저씨가 더 잘할 것 같아.”
임백호를 지명했다.
“왜 나냐?”
“일단 더 날씬해 보이고 이 아저씨는 사람이 좋아 보여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좋은 사람이 다치면 안 될 거잖아.”
“하하!”
거절을 잘못했다가 임백호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어쨌든 귀여웠다.
임백호는 잔뜩 소녀를 째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좋은 사람과 잘해 봐! 막 형, 첫걸음에 애인이 생긴 것 같군? 잘해 보게!”
성큼성큼 나무 쪽으로 다가가 슥슥,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꽤 위태로운 일이었다. 원래 가문비나무라는 것이 무척 높이 자라는 반면 둥치가 굵지 않고 곁가지들이 매우 가는 경향이 있는 나무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곁가지는 더욱 가늘어지며 둥치는 미끈하고.
이로 인해 타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홍의 소녀의 연은 십여 장이 넘을 듯한 나무의 가장 꼭대기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올라갈 때마다 가지가 좌우로 휘청휘청하는 것이 곰이 대나무에 매달린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러나 뭐, 워낙 무예를 수련한 몸이다 보니 그래도 임백호는 잘 올라가 이윽고 오를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가서 연이 걸린 가지를 뚝, 꺾어 냈다.
“저것 봐, 잘하면서 엄살을 부린 거지!”
이런 임백호를 소홍은 잔뜩 째려봤다. 한데 이때 그만 불상사가 일어났다.
우지끈!
“엇!”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위태롭게 휘청대던, 올라간 나뭇가지의 발 디딘 곁가지가 임백호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순간 큰 소리와 함께 찢어지듯 갈라진 것이었다.
“합!”
그러나 뭐, 또한 임백호는 잘 반응하여 바로 휙, 신형을 뒤로 젖히며 번개같이 일 회전, 멋지게 회전 낙법을 전개했다.
쿵!
“아구구……!”
하지만 멋지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그게 좀 잘못되었던 것 같았다. 뒤로 휙 회전하는 순간 다른 가지에 그만 ‘쿵!’ 뒤통수가 걸렸던 것이다.
눈에 불이 튀는 속에 맥없이 ‘펑!’ 바닥에 떨어졌고 바로 곡소리가 나왔다.
“나 요즘 왜 이래! 일진이 안 좋은가 봐!”
“하하하! 부러진 데 없나?”
“이 정도로 부러지기야 하겠냐만.”
그래도 다행히 연은 무사했다.
임백호는 소홍을 잔뜩 째려보며 연을 건네줬다.
“옛다! 이젠 됐냐?”
“고마워, 아저씨!”
소홍은 연을 받아 들며 냉큼 임백호의 팔을 안았다. 땡깡을 부리긴 했지만 역시 귀여운 모습.
종이가 비싸므로 아이들에게 있어 연은 소중하기도 했고, 특별한 놀이 기구가 없는 시대에 한창 즐겁게 날리다가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하면 동동걸음을 칠 정도로 안타까운 물건이기도 했다.
뒤통수가 얼얼했지만 이런 모습에 임백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무가 없는 쪽으로 가서 날려. 바람 부는 방향도 파악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오이 밭에서 뒹굴다가 왔냐? 왜 이리 오이 냄새가 나?”
소홍은 웃었다.
“응, 오이를 향수로 써서 그래. 백단향이나 사향은 비싸거든? 여긴 다들 그래.”
오이 향수.
떠꺼머리 같은 총각들에게야 생소하지만 그런 뭔가가 있었다. 어느 시대나 그렇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인들의 마음은 한결같았고, 상당한 처녀들이 향수를 선호했다.
해서 여러 가지 향을 지녔는데 고급으로는 사향, 백단향 등을 들 수 있지만 호되게 비싼 만큼 가을에는 국화를 말려 향낭에 보관해 지녔고, 오이가 나는 계절에는 오이의 즙을 머릿결, 귀밑 등에 살짝 바르는 등 하여 은은한 향을 간직했다.
“조그만 녀석이 별짓을 다 하는군! 너도 벌써 여자냐?”
“하하…… 그만 가세.”
한데 이때였다.
“홍아.”
“앗, 언니!”
“어……?”
언덕을 내려가려던 두 사람에게 또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막 몸을 돌리던 참에 소홍을 찾아온 듯 저만치 아래서 소매가 긴 물빛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처녀 한 명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실로 아름답다.
부러지게 굉촌을 촌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외곽지에 이렇게 고운 자태를 지닌 처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 척 반가량의 키에 애리애리해 보이는 몸매, 삼단 같은 머릿결, 분같이 흰 피부를 지닌 처녀였다.
이십 세가량.
가까이 도착하자 더욱 빛이 나는 듯해 보이는 고운 모습으로, 그린 듯 버드나무같이 휘어진 눈썹에 별나게 초롱초롱해 보이는 눈동자가 완전히 사람을 끌어당길 정도로 아름답다.
소홍은 냉큼 달려가 매달리듯 그녀의 팔을 안았다.
처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저기 무사님들은?”
“응, 연이 나무에 걸렸었는데 건져 줬어! 그런데 떨어졌어! 하하하……!”
“아.”
처녀는 쑥스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용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에게 묵례를 보였다.
“감사드려요. 홍이가 철이 좀 없어서. 다치지 않으셨는지?”
임백호의 눈길이 그대로 처녀의 모습에 고정되며 몸이 얼어붙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 그다지 나무가 높지 않아서!”
“감사해요.”
처녀는 얼굴을 붉힌 채 거듭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시해 보인 후 소홍을 감싸듯 하며 돌아섰다.
“그만 가자. 너무 오래 놀았어.”
“응!”
돌아서는 사이에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결, 소홍의 몸에서인지 그녀의 몸에서인지 추룡 역시 은은한 오이 향 냄새를 맡았다.
어딘지 사람을 끌면서도 매우 신선한 냄새라고 생각했다.
점차 멀어져 가는 애틋한 자태.
“아, 아……!”
까닭 모르게 임백호의 얼굴에 삐적삐적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몸은 통나무처럼 굳어져 있었고.
추룡 역시 자신도 모르게 소홍과 처녀가 다 사라지기까지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 느낌이 좋은 처녀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
“그만 가세. 기슭과 지형을 살펴야지.”
“아!”
굳어 있던 임백호는 깜짝하는 기색을 보이며 자꾸만 소홍과 그녀가 사라진 곳을 살폈는데, 얼굴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가득하다.
혹시 한눈에 그 처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지.
한데 처녀는 둘째, 소홍을 만난 이날, 아무것도 아닌 나무에 걸린 연鳶을 건져 준 이 연緣은 오래지 않아 친구들에게 실로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흐흐……!’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날 밤이었다.
축전竺田.
설정옥雪情玉.
십육 세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축촌이라 불리는 축전현의 양가의 딸로서 어려도 아리땁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축시丑時.
배가 불러 가는 달月이 구름 사이로 빠르게 움직여 보이는 듯한 이슥한 시간이었다.
‘흡?’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느닷없이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한창 곤하게 자고 있던 터에 홀연 무엇인가가 자신의 은밀한 곳들을 슥슥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앗!”
깜짝 놀라 눈을 뜨는 순간 그녀는 엄청난 경악에 완전히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고 있던 침대, 그녀의 바로 옆에 전혀 상상치도 못하게 하나의 시커먼 인영이 함께 드러누워 자신의 은밀한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있는 게 아닌가.
흡사 야수처럼 소름 끼치게 번쩍이는 시퍼런 두 눈.
낯선 사내였다.
잠자다 말고…… 그야말로 공포로 소름이 쭉 돋을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입고 있던 잠옷은 거의 풀어 헤쳐져 부끄럽기 그지없게 박속같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 누구……?”
굳어졌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옆에 누운 시커먼 사내를 보며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정신없이 입을 열었다.
투툭!
‘헉!’
하지만 그 이상 다른 말을 하거나 소리칠 수 없었다.
순간 누워 있던 사내의 손이 번쩍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목의 중간 부분과 어깨의 파인 부분에 터져 나갈 듯한 고통이 전해지더니 말도 나오지 않고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속에 털썩 다시 자리에 쓰러진 것이었다.
웃는 것인지! 이런 그녀를 사내는 계속 소름 끼치는 눈으로 보며 손을 놀렸다. 가슴으로 아랫배로,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곳으로.
‘아…… 안 돼!’
설정옥은 공포와 수치심에 미쳐 버릴 듯한 심정으로 어떻게든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혀는 굳어져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사지는 축 처진 채 움직여지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듯 이런 그녀를 소름 끼치는 눈으로 보며 끔찍한 웃음을 머금은 채 한참이나 떡 주무르듯 은밀한 몸의 구석구석을 멋대로 주물러 대던 사내는 이윽고 그녀의 사지를 벌려 놓고 휙 몸 위로 올라탔다.
‘제, 제발……!’
당연히 열여섯 살 소녀의 심정은 미칠 것 같을 수밖에 없었다. 절로 펑펑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어떻게든 자다 말고 일어난 이 악몽 같은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악!’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무엇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순간 하복부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고…… 오래잖아 사내의 손은 그녀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격렬히 계속 전해지는 통증과 함께 십육 세 소녀의 의식은 차츰 아득해졌다.
흐르던 달마저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감췄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