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악충무왕보岳忠武王堡 (3)
“햐! 이 정도라면 정말 그럴 만도 하겠는데? 규모가 장난이 아닌데, 인원은?”
“대략 천千이 넘어. 내內 일당一堂에 외外 삼당三堂, 총 사 개 당에 각기 삼 향씩, 십이 개 향이 있고, 이 개 외당은 지주池州와 청국현廳國懸에 분파를 두고 파견되어 있네. 선성宣城까지 힘이 미치는 것이지.”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주州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넓은 영역 같았다.
“사병이 천이 넘으면 관에서 만만하게 허락하지 않을 인원인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악충보는 워낙 전통이 있는 곳이라 당연히 그렇거니 해. 실제 명칭도 악충무왕보岳忠武王堡일세. 함부로 쓸 수 없는 명칭이지만 장군께서 사후에 악왕鄂王으로 왕작이 되셨거든? 비록 세월이 흘렀지만 장군을 흠모하지 않는 사람은 천하에 없고 관에서도 인정하네.”
악충무왕보.
“나라를 지킨 곳이니 과연 그럴 법도……! 그러나저러나 줄 선 사람이 꽤 많군?”
과연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보루의 거문 앞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대부분 젊은 층, 한결같이 도검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송민이 쩝쩝 쓴 입맛을 다셨다.
“용무가 있어 오는 사람도 많지만 줄 선 친구들은 아무래도 입문入門하기 위해 접수하러 온 걸 거야. 이번 채용 인원이 백이십 명인데 경쟁이 치열하겠군. 열흘 전부터 접수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아니.”
“거의 오십 대 일은 되겠지?”
“백 대 일일지도 모르지.”
추룡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끔벅거렸다. 시기를 놓쳐 포기하고 말았지만 이 정도라면 거의 대리사의 군관 시험에 필적할 정도다.
“무림 방파의 경쟁률이 그 정도라니……!”
임백호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원래 좀 그래. 악충보는 워낙 명성이 높으니 특별하겠지만 일반 방파도 이삼십 대 일의 경쟁률이 되니까. 워낙 무를 숭상하는 문화 아닌가.”
문文에 앞서는 무武의 문화.
분명히 그런 점이 있었다. 출사를 하면 정품正品으로 문신文臣들의 등급이 높긴 했지만 중원은 아직도 무의 문화였다.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는 전란의 시대이므로 무장武將들의 힘이 장난이 아닌 것이었다. 큰 공을 세워 왕작이 되는 것도 거의 무장들이었다.
전소의 표정이 크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쨌건 접수들 하자.”
체격 조건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
“잘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친구들은 늘어선 줄의 끝에 가서 섰고, 덩달아 임백호와 추룡도 섰다. 우두커니 따로 서 있기도 그렇고 이야기도 할 겸 그냥 같이 선 것이었다.
반 시진. 접수만 하는데도 시간은 꽤 많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앞서 온 사람이 꽤 많긴 했지만 감안한다 해도 바로바로 접수가 되는 게 아닌 듯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일 차 면접을 겸하고 있어서 그래. 명부名簿를 꾸미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우선 인물을 보거든. 접수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아.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접수를 안 받아 줘.”
“아……!”
추룡은 힐끗 전소를 쳐다봤다. 사실이라면 전소에게 있어서는 접수부터가 큰 난관이었는데, 역시 신체 조건 때문이었다.
줄지어 서 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오 척 반이 되는 키였는데, 전소는 그중 가장 작아 보였다. 정확히 말해서 전소는 다섯 척에 못 미치는 키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르고 앞줄이 줄어들면서 점차 더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 되고 있었고.
한 시진.
“어디서 왔나?”
“예! 공성현孔城懸에서 왔습니다!”
“꽤 멀리서 왔군. 집안의 허락받았나?”
“예! 받았습니다!”
“무예는 좀 수련했고?”
“예! 오 년가량 했습니다!”
“말 탈 줄 아나?”
“잘은 못 타지만 배우기는 했습니다!”
“잘해 보게. 다음!”
마침내 친구들의 차례가 되었다.
“거주지.”
“황산성입니다!”
“가깝군. 집안에서 반대는 안 하시겠지?”
“예!”
“말은 탈 줄…… 응.”
“이름.”
“곽영!”
접수를 받고 있는 것은 청의 장삼을 단정히 입은 세 명의 장한들이었다. 순서대로 오는 청년들을 살피며 질문을 하는 것은 그중 뺨에 구레나룻이 자란 사십 대 중년인이었다. 일 차에 질문하면 옆의 서른 초반의 인물이 장부에 이름을 기재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에 있는 인물이 악왕묘에서 떠 온 탁본을 받음과 함께 접수 번호가 적힌 대나무 패찰을 건네주는 형식이었다.
전소는 친구들 중 제일 뒷자리에 섰고, 다행히 곽영, 송민, 문대위, 장청은 무난히 접수가 되었다.
“다음.”
“예! 황산성에서 온 전소!”
“……!”
하지만 역시 전소는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차례가 되어 접수관 앞으로 가자 구레나룻의 중년인은 그의 키부터 보는 것 같았다.
“눈빛도 아주 좋고 최고인 것 같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넨 약간…… 기준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말은 좋게 해 주고 있는데, 역시 체장 미달이라는 것 같았다.
전소의 가슴은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급격히 눈빛이 흔들렸지만 자세를 바르게 한 채 힘줘 말했다.
“몸의 길이가 전부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중년인은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실제 이런 경우가 그에게도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체격이 모두인 것은 아니었다.
작은 체격이라도 천하에 대명을 떨치는 고수는 많았고, 가능한 악충보를 동경해 달려온 청년들인 만큼 모두 받아 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내 소관으로 되는 게 아니라서 말일세. 알겠지만 이게 실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닐세. 뭐랄까, 참 말하기 난처하긴 한데, 간단히 검진劍陣 같은, 보폭이나 손발을 똑같이 맞춰야 하는 일에 있어서 차이가 나 버리면 그쪽에 허가 뚫리거든. 그래서 우선 체격을 보는 것인데……!”
“남들이 한 걸음 움직일 때 두 걸음 움직이겠습니다!”
전소의 눈자위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포사 시험에서도 미달로 떨어졌으니 솔직히 그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중년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네.”
“잠깐만!”
심호흡을 하며 결국 추룡이 나섰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병가에서 체격은 분명히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백 명의 칼놀림보다 한 사람의 책략이 전세를 뒤집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여기 전소 형은 무사 시험보다 책사 쪽으로 시험을 보게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소 형의 상황 처리 능력은 대단합니다. 무예 역시 실로 만만치가 않습니다.”
중년인은 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또한 말은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무에는 사士가 따라야 하니까. 그러나 지금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사가 아니었다. 정확히 병兵을 뽑는 것이었는데, 추룡의 이야기는 거의 간부 선출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글쎄, 알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추룡은 막 우겨 댔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역시 뜻은 알지만 인재人才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 전소 형이 장차 악충보의 핵심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총관님 이상의 책사가 되어 천군을 이끌어 갈지!”
번쩍이는 눈, 힘 있는 음성.
“흠……!”
중년인은 이런 추룡의 아래위를 쳐다보더니 곧 적낭자를 봤고, 다시 허리춤의 넉 자 반에 이르는 대장검을 봤다.
“자네가 사람을 막 핍박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어디서 왔나?”
“복건성 남평에서 왔습니다.”
“엄청나게 멀리서 왔군?”
중년인은 한 번 더 추룡을 바라보더니 접수부에 말했다.
“성의가 대단하니 두 사람 접수해 줘. 일단 시험이나 해 보지.”
“에……?”
“다음!”
이상한 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추룡은 입문을 하러 온 것이 아닌데, 전소가 곤경에 처해 응원을 하려고 말을 한 것인데 희한하게 중년인이 뭔가를 착각한 듯 그냥 접수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
“이름, 나이.”
“아, 막추룡, 이십일 세.”
하지만 여기에서 추룡이 발을 빼서는 안 되었다. 아무래도 중년인은 추룡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우물쭈물 헛소리를 하고 있다가는 전소가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탁본.”
“아, 그게……!”
더욱이 규칙 중 하나, 항주의 악왕묘에 들러 온 증거로 내놓는 탁본에 대한 것까지 해결되고 있었다.
“여기.”
전소가 여분으로 떠 온 게 있었던 듯 냉큼 내민 것이었다.
“접수 번호, 삼천칠백이 번, 삼천칠백삼 번. 잘해 보게.”
뭔가 일이 좀 엉뚱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더 엉뚱한 일은 다음에 생겼다.
“어디서 왔나?”
“호북 황석!”
“삼천칠백사 번.”
어처구니없게 뒤에 있던 임백호까지 접수를 보고 있었던 것인데, 이 괴상한 친구는 어느 틈에 떠 온 것인지 아예 탁본까지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묻지도 않고 그냥 통과!
“으아!”
“잘됐어! 잘됐어! 축하해, 전소!”
“아하하!”
또 소동이 일어났다.
하마터면 접수에서 떨어질 뻔했던 전소의 접수 축하였다. 입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누군가에게는 진짜 큰일일 수도 있었던 것.
“고마워, 막 형! 덕분에 살았어. 기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말 죽고 싶었는데……!”
웃고 있었지만 전소의 눈에는 눈물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하하! 거기에서 막 형이 나서 줄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이야기가 먹힌 것 같아!”
임백호도 웃었다.
“남의 방파 문전에서 그러기가 실로 쉽지 않은데 말일세! 깜짝 놀랐어. 거의 싸울 기세던데?”
추룡은 싱겁게 웃었다.
“나야 뭐, 어차피 입문하러 온 것도 아니고, 줄 선 사람들 믿고 들이댄 거지. 왠지 잘 말하면 될 것 같았어.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분이 아주 인정이 있어 보이더라고. 사실 전 형이 만만한 인상도 아니고. 그분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지.”
그대로 구레나룻의 중년인이 선심을 쓴 것이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무인일 것인 이상 사람도 볼 줄 알 것이 틀림없고.
“막 형을 탐내는 눈치였어. 나는 덤.”
너무 기쁘다는 듯 꽉 추룡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너무 좋네! 포사 시험에서도 접수조차 못 했었거든? 자네를 만난 게 정말 행운이야!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신세는 오히려 내가 졌잖은가. 전 형이 아니었다면 정말 한심한 신세가 되어 있을 것인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네.”
“하하! 서로 잘된 거지. 그런데 희한하게 막 형까지 접수가 되어 버렸군? 시험까지 치르려고?”
추룡은 다소 난처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뭐, 역시 접수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염두를 굴려 본 후 물었다.
“글쎄? 기왕 이리됐으니 무림 방파의 시험이 어떤 건지 경험 삼아 한번 해 보고 싶기도 한데, 시험을 치르고 입문 안 해도 되지?”
전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안 가면 그만이니까.”
추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한번 해 볼까?”
“해! 해!”
싱글벙글, 친구들은 어떻게든 추룡을 끌어들이려는 눈치를 보였고, 덩달아 임백호도 부추겼다.
“임 형도 할 거지? 탁본까지 떠 왔던데? 어찌 된 건가?”
임백호는 추룡을 한번 본 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별것 아니야. 악왕묘의 비문 탁본은 오는 사람들마다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서 족자를 만드는 것이니. 열 푼에 파는 사람이 있던데? 한 장 샀었는데 막 형이 접수를 하기에 나도 그냥 해 봤지.”
“아! 하하!”
그런 게 있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다 보니 악왕묘 주위에는 이런저런 상인들이 많았는데, 직접 비문을 탁본으로 떠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미리 떠서 파는 사람도 많았다. 서투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백배 잘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은 있는 건가? 접수도 접수지만 시험이 중요하잖나? 사람들이 엄청 온 것 같던데, 내가 삼천칠백사 번일세. 접수 날짜가 더 남았으니 진짜 오십 대 일은 되겠던데?”
말이 쉬운 것이지 오십 명에 한 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전소는 해맑게 웃었다.
“최선을 다해 보는 거지 뭐. 다 해 보고도 안 되면 기분 좋게 포기해야지. 그건 실력도 운도 안 된다는 소리니까.”
시험을 본다는 자체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노력했지, 노력했어, 전소가 안 되면 우리 중에 될 사람 아무도 없지, 암!”
가끔 한마디씩 하는 곽영이 또 한마디를 했는데 이 친구는 평소 말투가 어딘지 좀 괴상하다.
“곽영, 자넨 영감티가 좀 나. 원래 말하는 게 그런가?”
“어,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노력하는 중일세.”
“하하하! 중복 곽영이라고 불러 줘.”
송민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본시험은 닷새 후일세. 황산성으로 갈 텐가? 황산현에서 머무를 텐가? 변변찮아서 초대하기 좀 그렇지만 그래도 황산성으로 같이 가는 게 좋겠지?”
뭔가가 다시 헛갈렸다.
“황산현 따로 있고 황산성 따로 있나?”
“응, 황산성은 지나왔던 곳일세. 남쪽으로 오십 리 아래지. 황산현은 북으로 이십 리 정도야. 사람들이 많이들 헛갈려서 둔계성屯溪城이라고도 부르네.”
연화봉까지 도합 일흔두 개의 봉우리가 능선을 이룬 만큼 황산이 작지 않아 생긴 일 같았다.
“집이 황산성에 있다면 그리로 가야지. 객잔에 머무르겠네.”
“아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객잔 구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변변찮지만 우리 집에서 쉬게. 조부님 한 분뿐인데, 좋은 분이셔.”
“가세!”
두두두두두!
일당은 또 우르르 황산성으로 몰려갔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님!”
“전소냐?”
전소의 집은 황산성의 계촌溪村에 있었다.
둔계라 불리는 황산 남쪽 자락의 골짜기 옆에 있는 촌락으로, 들은 대로 친구들이 다들 그리 넉넉한 집안은 아닌 셈이었다.
가장 나은 친구가 송민, 장청으로, 각기 과수밭을 경영하고 농사를 지었고, 곽영의 부친은 밭일을 하면서 짬짬이 사냥을 했다. 문대위의 집안도 비슷했다.
유독 전소의 형편이 가장 처졌는데, 까닭은 어렸을 때 돌림병이 돌아 양친을 잃었기 때문이라 했다.
조부의 슬하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인데, 전소의 조부님은 버섯 등 약초를 채집했다. 그렇다고 가난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부 되시는 분이 송이밭을 꽉 꿰고 있다는 것이다. 송이 밭 위치는 부자지간에도 안 알려 준다고 했듯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송이 철이 되면 수입이 많고, 남부럽지가 않아 그럭저럭 가계를 잇는 듯했다.
“문안드립니다. 남평의 추룡이라 하옵는데 전 형과 벗이 되었습니다. 어여삐 여겨 주십시오.”
“임백호입니다.”
“허허, 어서들 오시게. 누추한 집에 큰일이구먼?”
전소의 조부는 추룡과 임백호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고, 들어가자 실내에는 전소가 노력한 흔적들이 역력히 보였다.
“햐! 무슨 책이 이렇게 많은가? 백 권도 넘어 보이는데?”
“어, 조부님께서 구해 주셔서. 덕분에 간신히 사서四書는 떼었지.”
“이야……!”
책이 비싼 시대였다. 철전 한 관(백 전)이 은자 한 냥이었는데 탁본 하나가 열 푼이라 했듯 종이 자체가 비싸 여간해서는 글을 연습해도 종이에 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
눈치를 보면 천자千字를 배운 후 독학으로 사서를 끝낸 것 같았는데, 쉬운 일이 아닌 것이었다.
“문관으로 나가는 게 낫지 않나?”
“무슨. 날고뛰는 사람이 수두룩한 세상에.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뒷줄이 없으면 식년시까지 합격해도 아관조차 되기 어렵잖아. 난 딱 포사가 좋은데, 유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