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좌우봉원(左右逢原) (1)
“마 장문인이 고독에? 그렇다면!”
이소천이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경공이 풀릴 뻔했다.
위욱경의 부탁, 아우에게서 들은 정보. 일행 천리한다는 든든한 다리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느라 아직 화산의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자세히 듣지 못한 상태.
종남의 청령선고도 있고, 개방이 적시에 지원했으니 그리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여겼다.
화산의 장문인이 바로 당대에서 검으로 손꼽히는 화산검협 마린이니까.
옥녀동에서 독이 화제에 오른 것도 그저 장풍보의 짓이라고만 여겼는데.
설마 마린 자신이 고독에 당했다니.
백초환 한 알을 건넨 해원기가 이소천의 팔꿈치를 가볍게 건드렸다.
“일단 복용부터. 쪽지에서 말한 자들이 정말 운대봉의 배후라면 독기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흠칫했던 이소천의 신형이 다시 중심을 잡는다.
기이한 느낌.
놀란 심정 탓에 흔들리려던 내부가 가라앉아서.
이소천이 백초환을 입에 넣으면서 다시 해원기를 쳐다봐야 했다.
이렇게 함께 달리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 사부와는 분위기가 다르지만, 과연 그 사부에 그 제자랄까.
채 한 식경도 되기 전에 화산을 내려오는 엄청난 속도에도 이소천의 바로 곁에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 흐트러지려던 이소천의 신형을 도와준 손길.
그건 청허심법을 충분히 알아야만 가능한 행동이다.
경공이란 단지 다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 상승의 경공은 내공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내부가 흔들리고, 내공이 소모되면 자연히 경공은 속도가 떨어지기 마련.
그걸 가벼운 손놀림 하나로 복원시키려면 이소천의 내공을 이해해야만 한다.
청허심법은 해원기의 사부가 전수했으나,
‘그분과 달리 해 공자는 청허심법도 익혔나?’
얼핏 그런 생각까지 드는데,
해원기도 궁금한 게 있었는지.
“이 국주의 경공은 독특하군요. 정기(精氣)를 적극적으로 수렴(收斂)하는.”
슬쩍 건네는 말에 이소천이 백초환을 꿀꺽 삼켰다.
“읏, 그걸 알아봤습니까. 청허심법 안에서 찾아낸 현일신행(玄一神行)이라는 겁니다. 속도는 비천무영에 비할 수 없으나, 지구력이라면 지지 않지요. 과거에 맹주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 비천무영.
강호에서 가장 빠르다는 비천무영에 빗대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 한 마디 덧붙이려다 입을 닫았다.
맹주. 과거의 난세를 겪었던 이들이 부르는 호칭이고. 사부가 천부의 무재(武才)라고 항상 말했던 탁 소숙이다.
상승(上乘)의 심법이나 진결은 그 자체로 무수한 묘용을 품는다. 그런 심오한 이치에 통달한 탁 소숙이니 청허심법에서 경공 요결을 찾아낼 방도를 일러주었을 터.
그 탁 소숙에게 모든 걸 맡기기만 했었다.
사부도, 탁 소숙도, 그리고 그 두 분의 지인 모두 해원기를 이해해주었지만.
가슴 속에 자책이 인다.
응석받이를 벗지 못했구나.
여산은 장안의 동남쪽. 화산에서는 서남 방향이 된다.
지리를 잘 모르기에 이소천의 뒤를 따르는 해원기가 멀리 시선을 보냈다.
때는 한낮. 구름 한 점 없이 뜨겁게 내리쬐는 볕을 거부하듯 검푸른 산형이 마치 커다란 말 한 필이 옆으로 누운 듯.
높이도 높이지만 그 장대한 형태가 바로 여산의 특징. 엄청난 면적이라 단순히 여산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는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소천도 차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운대봉에서 장난을 쳤던 놈들이라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통했을 겁니다. 그럼 일단 화청궁(華淸宮) 쪽이.”
밀각으로 의심되는 셋은 운대봉에서 장안으로. 월영객은 장안에서 화산으로 향했으니 그 접점을 추정하면서.
조그마한 기척이라도 찾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해원기도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구불구불한 지세에 집중했다.
화청궁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만들었다는 행궁. 당시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욕탕이 몇 개나 있었다지만, 세월에 따라 이제는 쇠락한 터만 남은 곳이다.
그래도 흥성했던 시절의 자태를 여전히 간직해서.
여산의 남쪽 전체를 아우르던 성벽의 흔적과 크고 작은 문루(門樓)들이 무수히 보인다.
해원기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일단 저 앞의 다리로. 이쯤에서 오형에게 표기를 남겨두지요.”
“망선교(望仙橋)입니다.”
이소천이 지명을 대면서 몸을 세웠다. 눈에 띌만한 곳을 찾아 표기를 남기기 위해.
오소민이 아직 따라붙지 못한 건 아마도 장안분타와 궁가십걸의 배치 때문일 것이다. 여산이라면 장안분타가 큰 도움이 되지만, 주도면밀한 오소민이 화산의 수비를 돌보지 않았을 리 없다.
여산이 가까워질수록 더 초조해진 이소천이 서두르는데.
펑.
망선교 바로 뒤, 미약한 폭음과 함께 큼직한 문루의 지붕에서 흙먼지가 날렸다.
“이 국주!”
해원기의 급한 외침.
이소천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해원기가 벼락이 치듯 망선교를 향해 날아간다.
쐐액.
귀를 찢는 매서운 파공성.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무서운 속도에 이소천이 움찔했다가 자신도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표기를 남길 새도 없다.
훤히 보여도 수백 장이나 되는 거리. 중간에는 크게 휘어진 길을 따라 나무와 바위가 늘어섰건만.
퍼퍼퍽.
한 자루 검을 날린 것처럼 나무와 바위가 마구 쪼개져 나간다.
순간적으로 신화검형을 펼친 해원기가 직선으로 망선교를 향하며 동시안을 부릅떴다.
일행천리표 이소천이 익힌 청허심법은 사부가 미리 구결을 알았지만,
월영객 전천도는 도리어 사부가 그 연공을 목격했던 경우.
속가(俗家)의 지극한 비전 중 하나를 목격한 건 우연이었고, 사부는 단지 이치의 한 조각으로 원형을 엿보는 방법을 가르칠 때 예로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해원기에게는 모든 것이 익혀야 할 숙제들이었기에 한동안 몰두했던 적이 있고.
이소천의 경공을 알아본 것처럼 큼직한 문루의 지붕에 솟구친 기운도 알아보았다.
흙먼지를 날린 건 맑은 바람.
그건 제월신공(霽月神功)에 기초한 광풍수(光風手)가 틀림없다.
찾던 인물.
해원기의 신형이 눈 깜빡할 새에 망선교를 넘어 문루로 치솟고,
“이건 무슨 소리…….”
귓가에 전해지는 음성을 듣자마자 오른손이 옆으로 뻗었다.
운대봉에서 공극의 조감이라고 떠들었던 그 목소리. 여전히 정확한 위치가 모호하지만, 신화검형의 거센 기세를 몰아서인지 대강 문루의 오른쪽 담장이라고 느낄 수 있어서.
담장을 뒤엎을 듯이 대우신장을 쳐냈다.
그러나.
피릭.
공간을 통째로 밀어내는 대우신장이 맥없이 좌우로 갈라지며 담장 위에 홀연히 하나의 인영이 드러난다.
풍성한 회의 장포. 꽤 큰 체구에 머리에는 전립, 얼굴에는 면사를 드리워 부리부리한 두 눈만 보이는 인물.
언제부터 담장 위에 있었는가. 기척조차 없이 출현했으나, 그 외양을 확인하자 해원기가 공중에서 허리를 틀었다.
희지원과 아교가 우연히 마주쳤다는 세 명의 유람객. 그중의 하나임을 직감했고,
대우신장을 가볍게 흘리고 형체와 기척까지 감춘 능력.
검왕수가 곧장 유리검을 구현했다.
회의인은 깜짝 놀란 눈치.
모습을 감추고 느긋하게 구경하던 참에 괴이한 소음이 별안간 닥치더니 거센 공격이 이어지지 않나.
그래도 벼락같이 덮쳐드는 해원기를 향하는 눈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손 하나가 느긋하게 앞을 가린다.
고수는 오감에 앞서 기운을 느끼는 법. 대우신장을 흘릴 수준이라면 해원기의 맨손에서 검기를 읽지 못할 리 없거늘.
번들거리는 장갑을 낀 손 하나면 족하다는 건가.
해원기가 살짝 눈매를 좁히며 신화검형의 여세를 섬전에 담았다.
단번에 장갑을 지나 면사를 꿰뚫는 엄청난 쾌검. 하지만 투명한 유리검이 보이는 것처럼 회의인의 손바닥이 스르르 검극을 막으면서 희한하게 꿈틀거렸다.
팟.
유리검이 회의인을 관통하면서 담장에 내려서는 해원기.
그러나 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해원기가 몸을 뒤집어야 했다.
유리검이 회의인을 꿰뚫은 건 착시(錯視). 섬전의 검극에 장갑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회의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문루의 지붕 아래. 해원기가 내려선 담장에서 십 장이나 떨어진 그곳에서 크게 몸을 추스르는 회의인.
어느새, 어떻게 이동했는지.
해원기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 꿈틀거리는 동작을 주시했다.
“완연사력(蜿蜒卸力). 진짜 영사태화로군.”
대우신장이 맥없이 흩어지고, 신화검형의 기세가 담긴 유리검의 섬전조차 빈 허공을 찌른 이유.
회의인이 전신을 뱀처럼 꿈틀거려 모든 힘을 풀어낸 후, 바닥을 미끄러져 이동했기 때문이다.
영사태화를 대성(大成)한 경지. 신법으로 흉내만 내던 위 소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회의인 역시 지붕 밑에 선 채, 눈동자가 해원기를 확인하고 흔들리더니.
“네가 어떻게 여기로……? 그래, 확실히 눈여겨 볼만 하구나.”
귀에 거슬리는 음성. 작게 말할 때는 몰랐는데 목소리를 키우자 마치 풀피리를 부는 것처럼 높게 뒤집힌다.
풍성한 회의로 감싼 큰 체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스슥.
말이 끝나자 지붕 위로 한 명, 왼쪽으로 뻗은 담장 위에 또 한 명의 회의인이 차례로 나타났다.
본래 지붕과 양쪽으로 이어진 담장에 각각 서 있었던 모양. 형체와 기척을 지웠다가 환술을 부린 것처럼 홀연히 모습을 보이는 것도 똑같다.
지붕 위에 걸터앉은 작은 키의 회의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까운 공극조감을 깬 놈이잖아. 화산 구경을 끝낸 지가 언젠데, 왜 또 여기까지 왔을꼬?”
의아함이 잔뜩 담긴 혼잣말에,
왼쪽 담장 위에 선 회의인이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건 일행천리표라는 놈이다. 역시 우리를 귀찮게 했던 건 월영객이란 놈, 환혹미리진(幻惑迷離陣)이 풀렸어.”
책을 읽듯 딱딱한 말투.
전립에 면사. 용모를 가린 건 마찬가지지만 회의인 셋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해원기를 알아보고, 일월표객이라고 짐작했으면서도.
셋 다 여유 있는 모습.
해원기가 좁혔던 눈매를 풀어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소천이 막 망선교를 넘어 지면에 내려섰고, 문루 안쪽에는 홀쭉한 청년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물러선다.
짧은 산발 아래 보이는 흰 얼굴에 검은 수염 자국, 이소천과 같은 황의경장 차림에 표창이 가득 꼽힌 허리띠를 두른 청년이 월영객 전천도일 것이다.
영사태화를 대성한 큰 체구의 회의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쉽사리 잡히지 않더라니. 뭐, 잘 된 것 아냐? 구경만 하고 장안에 가서 괜히 늑대 사냥 나가는 것보다야 이놈들이 낫잖아. 그러지 않아도 일월표객이란 놈들은 대내에 선이 닿았다고 의심이 가던 판이었고…….”
해원기를 앞에 두고도 뒤를 돌아보며 말을 끌고,
왼쪽 담장의 회의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낫다. 저놈은 해원기라는 이름. 화숙인(花淑人)이 오방신수(五方神獸)를 다 잃고 도망친 원인이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붕의 회의인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화숙인? 밖에 나가선 조화부인이라고 했다며? 쌤통이지 뭐. 크크크.”
큰 체구의 회의인도 눈가에 주름을 잡고, 왼쪽 담장의 회의인도 으쓱 어깨를 올리니.
방약무인.
해원기도, 일월표객도 아예 무시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