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장 종장(終章) (7)
젊은 황제의 유치한 말장난에 어울릴 마음은 애당초 없었기에 자리를 뜰 기회만 보고 있었다.
마침 귀를 울린 서문창의 전음.
[공주마마께서 무사히 환궁하셨소. 동쪽으로 잠시 길을 비워두었고, 귀 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요.]
‘당신’이라는 호칭이 ‘귀 공’으로 바뀐 건 상덕공주 덕분일까.
어떻든 ‘정하불상침’의 묵계를 지키고자 하는 해원기로선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흔적을 남겨두었다는 건 멀리 가지 않았다는 뜻.
그리고.
‘조화부인과 제갈 소저가 그렇게 금방 회복했을 리 없다. 굳이 황궁을 택한 건.’
독종지인인 백포 복면인을 이용한 둔법.
발동한 주체는 진짜 백화였을 테고, 함정을 판 건 시간을 끌려는 의도.
조속히 뒤를 따라야 한다.
표풍결(飄風訣)을 탄 해원기의 신형이 부운(浮雲)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황제도 말했듯이 상덕공주가 무사히 돌아온 모양인데. 그렇다면 녹림노조 방송서가 단목정의 뒤를 따라 길을 되돌렸단 건가.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혹시?’
여동생 묵소유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원기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따라간 동강의 기척이 전혀 없으니까.
서문창의 말대로 동쪽으로 가는 동안 높은 담장이든 화려한 전각이든 전혀 인적이 없었고,
황궁의 외성에 다다랐을 때,
뜻밖의 인물이 반긴다.
동강은 아니었지만, 동강 같은 차림새. 기다란 깃털을 엮어 만든 그 신기한 옷은 화표학익이라는 보물이다.
화표학익을 걸친 황정리가 해원기를 발견하자마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다.
“소주를 뵙니다.”
춘분이 지나고 헤어져서 눈발이 날리는 한겨울에 다시 만났다.
해원기가 깜짝 놀라 급히 그 앞에 내려섰다.
“아니, 황 대협이 어찌.”
황망히 황정리를 붙잡아 일으키며 말을 잇지 못하자,
“녹림장관 팔대탐자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녹림이 바로 흥륭과 연락했었고, 흥륭은 또 관부와 가깝지요. 제가 상덕공주를 먼저 환궁시켰고, 방 낭랑의 청으로 칠절(七絶)이 전부 황궁 주위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이지요.”
해원기의 의문을 단박에 풀어주는 간결한 대답.
과연, 상덕공주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흥륭을 통했기 때문이었다.
녹림장관이 각지에 거점을 둔 흥륭에 사정을 알리고, 흥륭은 동창에 들키지 않을 길을 찾았을 터. 그리고는 비천무영의 경공이 더해졌으니.
가까이 마주한 황정리의 엷은 미소를 보자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도 풀어진다.
마지막에 오랜만이란 말은 춘분 때 헤어진 걸 가리킨 게 아니다.
과거에 사부를 음지에서 도왔던 황룡칠절. 황도음부진결을 익혀 은신과 술법에 능숙한 흥륭의 일곱 형제가 다시 현신했다는 감개.
여의낭랑 방온화의 청이라고 했으나,
무림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
고마우면서 또 한편으로 미안스럽지만, 사례할 여유도 없다.
“동창에서는 화숙인이라 불렸던 조화부인, 강호에선 봉대저라 했다는 신기제갈의 후예. 이 두 여자는 중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고. 그밖에 음형사라는 기이한 술법을 쓰는 자들. 또 누가 있을지 모르나, 원흉은 백화라는 미모의 여인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방향은 무령산 쪽인데…….”
해원기의 빠른 설명을 듣던 황정리가 대뜸 머리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이미 형제들이 단목 당주와도 접촉했을 때입니다. 잠시만 여기에.”
촤악.
기민한 대답과 함께 활짝 펴지는 화표학익. 황정리의 몸이 그대로 둥실 떠오르더니 삽시간에 까마득히 날아올랐다.
땅을 박차지도 않았고, 딱히 공력을 내뿜은 흔적도 없이.
비천무영이란 외호에 어울리는 놀라운 솜씨. 황궁 전체와 주변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높이까지 올라가서는,
[소주, 동화문(東華門) 밖 호성하(護城河)를 건너면 은풍창(恩豊廠)이라는 환관들의 녹미(祿米)를 보관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량의 운문진이 발동한 흔적이. 마침 가주와 염상단의 고수들이 부근에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짧은 시간에 칠절의 연락으로 상황을 파악했는지.
전음에는 경사 지리를 잘 모를 해원기를 위한 배려도 담겼다.
해원기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황 대협은 단목 형님을 먼저. 다른 분들도 일단 단목 형님 지시에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황정리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쉬이익.
한 줄기 검기로 화한 해원기가 무서운 속도로 야공을 가로질렀다.
일단 방향을 알고 지리를 들은 이상 동시안의 주시(注視)를 피할 것은 없다.
신화검형이 단숨에 호성하를 건넜고 칠팔 십 호(戶)의 똑같은 집들이 몰린 곳을 발견했다.
소위 은풍창이란 창고들.
‘대량의 은문진.’
파팍.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라는 바람에 은풍창 가운데에서 황진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그 안에서 퍼져가는 계역을 훑는 비췻빛의 안광.
둔법과 달리 은문진은 진도(陣圖)를 남긴다. 진도를 찾아내면 숨겨진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황정리가 대량이란 단어를 썼으니 한두 개가 아닐 터.
굳이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창고의 문에 새겨진 도형들. 이 창고들이 다 은문진이다.
해원기가 서슴지 않고 가까운 창고 문을 박차고 들어섰고, 가득 쌓인 미곡 사이로 그 신형이 안개처럼 흐려졌다.
둔법의 닫힌 둔점을 억지로 열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는 달리,
혼란스러운 공간의 일그러짐 대신에 주변의 경관이 급류를 탄 것처럼 빠르게 흐르더니,
몇 걸음도 되지 않아서 시야가 안정된다.
잠시 그쳤던 눈이 그새 다시 내리기 시작했는지.
불을 밝힌 몇 개의 작은 석등을 배경으로 아늑한 지형이 드러나고,
해원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한 번 왔었던 장소.
왼쪽으로 비스듬한 언덕, 덤불 사이로 보이는 무너진 담장. 그리고 무너진 정자와 축대가 바짝 마른 연못을 어지러이 뒤덮었다.
‘통왕의 중지’라는 곳으로 다시 나왔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축대를 중심으로 많은 인원이 세 겹으로 늘어선 광경.
맨 앞에는 밀각육학사에서 수보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과 현신장이라는 자들을 비롯해 갖가지 복색의 인물들이 서른 명가량.
황학사가 먼저 해원기를 알아보고 신음을 토했다.
“으음, 이곳을 찾을 자는 절세검왕뿐이라고 하시더니. 태상의 예상대로. 그렇지만 지나치게 빠르구나.”
해원기가 우선 차분하게 늘어선 자들의 면면을 훑었다.
아는 얼굴, 모르는 얼굴. 그래도 황학사 있는 첫째 줄은 대강 그 실력을 짐작할 만한 자들이었으나,
그 뒤의 둘째 줄과 축대 위를 메운 셋째 줄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무너진 정자의 축대 아래는 거대한 기둥이 숲처럼 늘어선 지하 공간이었다.
이 많은 인원은 마치 그 지하 공간을 지키는 듯한 형태.
“또 태상인가, 이번에는 누굴 가리키는 호칭일지. 조화부인도, 제갈 소저도 보이지 않는구나. 백화는 그 아래에 있느냐?”
축대 아래의 지하 공간까지 들리도록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황학사가 오만상을 쓰며 좌우에 눈짓을 보낸다.
“저 불경한 소리를 더 들을 필요는 없잖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른 명이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학사와 몇몇은 밀각의 고수들. 신주영웅회 사가신공과 황궁에 전해지는 비전을 익혔고,
공동의 요술사, 아미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도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모습이며,
병기를 빼든 반룡령의 십삼령주 중 몇 명과 나머지 환관 차림의 열댓 명도 상당한 기세를 내비친다.
그러나 이 서른 명은 필경 본래부터 함께 했던 한 무리가 아니어서,
대앵.
요술사의 낙혼금종이 울리자 순간적으로 움직임에 차이가 생겨났다.
해원기가 그저 아는 얼굴을 확인하려고 훑어보았겠는가.
오른손은 오악검법의 산신검진, 왼손은 절세오검의 비천경혼, 등 뒤에서 솟구친 고검은 흑백연주검의 오혼단문.
정오검, 마오검, 평오검이 동시에 신령검역을 채운다.
공간이 순간적으로 팔풍(八風)에 뒤덮이고 섬전(閃電)이 모든 걸 꿰뚫었다.
힘은 폭풍만뢰요, 속도는 질풍치뢰. 천형검의 도리에 따라 이서형이 써레로 검역을 갈라버린다.
꽝!
굉천뢰(轟天雷)가 터진 것 같이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
“컥.”
“으악.”
쿠르르르르르.
지면에 고꾸라지고, 석벽에 처박히고, 마른 연못에 떨어지고. 서른이나 되는 고수들이 힘을 쓰기도 전에 무너졌지만, 그 비명과 신음조차 이어지는 우레에 삼켜졌다.
참으로 가공할 무위(武威).
그러나 해원기는 멈추지 않았다.
바닥을 휩쓰는 자욱한 황진을 밟으며 나아가는 발걸음, 양손이 번갈아 원을 그리면서 공간을 누볐던 무지막지한 번갯불이 하나로 모여든다.
태양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야 할 군림검이,
단 하나의 새파란 뇌전(雷電)으로 화했고.
축대를 에워싼 두 번째 줄을 향했다.
두 번째 줄은 스물네 명.
축대의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가 껑충 뛰어오르는데, 전신에는 육신사의 민망한 연갑과 비슷한 딱 달라붙는 가죽을 씌웠고. 뻣뻣한 자세는 마치 나무판자 같았다.
해원기의 가공할 무위를 목격하고, 뇌전으로 화한 군림검을 보았을 텐데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해원기에게 몸을 날리니.
파파파파팟.
화포(火砲)를 쏜 듯 엄청난 육탄(肉彈).
해원기도 곧장 양손을 갈마들었다.
검왕오형의 발검제형과 재단경위는 이미 천손검법의 홍몽무변과 양의상전에 깃들었고,
신령검역을 주재하는 풍뢰일여(風雷一如)의 군림검에는 신창삼절예까지 담겨서.오행어검(五行御劍)이 전륜검강(轉輪劍罡)을 이룬다.
어검이면서 검강이요, 어검도 아니고 검강도 아닌,
이른바 신이검(神而劍).
퍼펑, 퍼퍼퍼펑.
나무판자 같은 자들이 풍선처럼 터져나가는데.
그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을 풀썩풀썩 뿜는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채.
그건 바로 독기.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지독한 독기지만.
풍뢰일여의 신이검은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차례대로 쏟아지는 육탄을 전부 꿰뚫고, 풍선처럼 터지면 뿜어내는 독기를 두 조각으로 자르며, 둘로 나뉜 독기를 따로 가두어서 잿가루 한 점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니.
새까만 가죽을 씌운 이 스물넷이 오독존에 버금가는 독종지인이든, 혹은 인성을 상실한 독강시든.
해원기의 십 장 거리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미 오독진살을 이겨냈는데 홍황독전의 비결이 더해졌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축대 위에서 침중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어검과 검강을 음양으로 삼을 줄이야. 이게 천마를 이겼다는 무상검(無相劍)인가. 정녕 무섭구나, 절세검왕은. 허어!”
귀에 설지 않은 목소리.
해원기가 고검의 검신을 신왕공의 청정제탁(淸正除濁)으로 다시 한번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축대 위에 선 자들은 모두 열.
금포를 걸친 넉넉한 풍채로 탄성을 토한 자는 놀랍게도 상보태감 조공공이었다.
천외천 주루에서 한 번, 동창의 창붕당에서 또 한 번. 이번이 세 번째로 보지만, 이번의 조공공은 앞의 둘과는 달리 있는 듯 없는 듯 기묘한 느낌.
화려한 옷차림의 나머지 아홉도 마찬가지고,
개중에는 한 번씩 마주쳤던 얼굴이 섞여 있었다.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음형십이사는 이십사아문에 숨어 있었단 거로군. 백화가 이렇게 사람 농락하길 좋아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스스스스.
말을 하는 중에도 발밑에 어린 황진이 뭉클뭉클 더욱 짙어져,
진짜 구름을 디딘 듯이 해원기의 몸이 조금씩 떠오르고.
축대를 향하는 해원기의 눈에 어마어마한 신광이 맺혀간다.
“이 중에 십호는 누구냐?”
솨아아아아아.
얼음같이 차갑고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축대를 쪼갤 듯이 불어닥쳤다.
해원기로 하여금 무림에 발을 디디게 한 원인.
황장촌의 화전민들을 독살한 자를 드디어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