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6화 (406/410)

제101장 종장(終章) (6)

“어딜!”

오독진살의 기운이 사라진 걸 가장 먼저 알아챈 단목정. 장내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가 백포 복면인의 목 없는 시체가 엎어지자마자,

어림없다는 소릴 외치며 팔을 크게 내저었다.

화라락.

바닥에 경계선으로 풀어놓았던 붕대가 단번에 엎어진 시체 위를 휘감고,

“종정삼화(鍾鼎三和)!”

이어지는 호령에 현도관 문을 박차고 오소민 들이 뛰어나왔다.

해원기의 뒤에는 오소민, 좌우에는 악송령과 정록. 해원기를 중심으로 솥발 같은 형태를 이루는 순간에,

팟.

붕대가 저절로 불타오르며 엎어진 시체까지 태우기 시작한다.

단목정이 벌떡 일어나며 다시 해원기를 불렀다.

“독종지인(毒宗之人)을 둔점(遁點)으로 삼는 건 처음 봤군. 원기야.”

파파팍.

시체를 재로 만드는 맹렬한 불길. 그런데도 연기 한 줄기 일어나지 않고 잿더미 속에 동그란 우물 하나가 입을 벌리니.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홀연히 사라진 둔법의 흔적이요, 그게 닫히기 전에 단목정이 기어이 붙잡아놓은 것이다.

붕대의 불길과 종정삼화로 마지막 남은 독기를 깨끗이 처리하면서.

아직 공중에서 대화초시를 수습하던 해원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백화라고 생각했던 백포 복면인은 육신지궁에서 마주쳤던 오독존과 마찬가지로 독종지인. 전에 통왕의 중지에서는 파경편조라는 술수로 도주한 것처럼 이번에는 아예 자신의 육체를 둔법의 문으로 삼았다는 건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리고 둔점 주위를 훑어보는 눈.

오독진살 때문에 모조리 가루가 된 뜰이라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무지가 되었으나.

희한하게도 몇 개의 머리 장식과 하얀 고깔만은 멀쩡하게 나뒹군다.

홍작과 녹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그것뿐.

백포 복면인도 어차피 백화에게 조종당한 괴뢰겠지만, 그래도 이럴 수가 있는가. 한때 함께 교도인을 모셨던 사이면서 조화부인이나 제갈봉 만큼의 이용가치도 없다고.

나오려던 탄식을 억지로 삼키며 양손을 역상정위로 바뀌었다.

그 심정을 안다는 듯 등 뒤에서 고검의 불고초가 가볍게 진동하고,

“먼저 가거라, 바로 뒤를 따르마.”

단목정의 침중한 음성을 들으며 해원기가 곧장 둔점인 바닥의 우물 형태로 뛰어들었다.

경수사일까, 무령산의 현도관일까, 동창의 창붕당일까, 아니면 통왕의 중지라는 그 지하실일까.

어디로 나갈지 모르는 채.

오대마도는 지부에서 유래한 마종본맥(魔宗本脈)의 무학.

설사 그 이치만을 빌려 썼다고 해도 결국은 마(魔)에 물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조화부인을 심마령으로 분신처럼 부렸던 홍작이 그랬다.

사황령은 신화에 나오는 사흉(四凶)이 뭉쳐 이루어진 요사지력(妖邪之力).

그 힘의 일단이라도 접하면 아무리 신주 정통의 무공을 극경까지 익혀도 필경 피상(皮相)에 머물 뿐이다.

심심상인을 써서 제갈봉을 꼭두각시로 삼았던 녹명이 그렇다.

하나는 마가 되었고, 또 하나는 사가 되어서.

세상을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욕망에 빠져 날뛰었으나.

그 둘 또한 한낱 백화의 도구에 불과했다.

어리석고 가련하다.

어쩌다 그리되었을꼬.

쓸모없이 버려져 마침내 온전한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둘.

둔점에 뛰어들기 전, 눈에 비쳤던 홍작의 머리 장식과 녹명의 고깔이 잊히지 않고, 애잔한 감상이 마음 한편에 스며들지만.

해원기가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렸다.

동정과 감상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홍작과 녹명이 각각 괴뢰를 만든 이유는 자신들을 위해서다. 그간의 사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꼬였든 간에 끝까지 노렸던 건 바로 현도관의 지하. 이미 사라진 자부십이경이거늘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또 무엇에 쓰려고 했을까?’

현도관 지하의 비고에 적잖은 보물이 있지만,

황궁비고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그깟 보물에 집착했겠는가.

홍작과 녹명이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했던 건 분명히 자부십이경. 해원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지하 비고에 들어갈 방도를 찾았었다.

녹명은 제갈봉을 이용해 해원기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자부이진경을 발동해가면서.

또 홍작은 해원기가 지닌 열쇠를 얻기 위해 오소민이라는 인질을 풀어주면서까지.

대내의 사정이 급변해 상보태감이 서문창을 대동해서 동창의 권력을 빼앗는 것도 상관치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국면을 백화가 조성했다는 혐의가 있으나,

과거에 세상을 어지럽혔던 사마의 힘과 온갖 신공, 그리고 육악지력까지 얻은 그녀들이 어째서 자부십이경을 목표로 삼았을까.

‘설마?’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홍작과 녹명이 설마 사마에 빠지는 자신들을 구할 방도로 자부십이경을 찾았을까.

자부십이경이 이미 사라진 걸 몰랐던 말인가.

지금까지 온갖 모략과 괴사를 일삼았던 동창의 배후인 그녀들이.

어처구니없지만,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교도인이 사가삼미에게 앞으로의 삶을 선택하게 했을 때, 끝까지 교도인을 모시고 사라지겠다고 한 사람은 백화.

그 백화가 바로 홍작과 녹명을 농락한 진짜 원흉인 바에야.

‘노야는…….’

어찌 되었을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일렁이던 둔법의 공간이 흩어지면서 해원기의 눈앞에 생소한 광경이 드러난다.

좁은 골목. 기껏해야 한두 사람이 겨우 오갈 넓이면서 앞뒤를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십여 걸음 앞에 왼쪽으로 작은 쪽문이 하나 보이는데,

해원기가 동시안으로 좀 더 눈에 힘을 주어야 했다.

경사에 올라와서 다른 곳에선 보기 어려운 좁은 골목을 몇 번 겪었다. 당장 현도관으로 들어가는 골목도 주변의 저택에 끼어서 쉬 찾을 수 없는 곳.

그러나 이 좁은 골목은 전혀 다르다.

아득히 솟은 담장은 전부 붉은색. 보기만 해도 쇠처럼 단단함을 알 수 있었고, 위에는 지붕처럼 기와를 얹었으며, 군데군데 금빛 요철이 장식처럼 올려졌다.

바닥도 특이해서 검은 돌을 반듯하게 잘라 자로 잰 듯 정교하게 깔아놓아서 잠시 내린 눈과 어울려 방금 닦은 것처럼 반들거린다.

현도관 주위도 왕공귀족의 저택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요, 높이 솟은 담장은 오소민을 구하러 왔을 때 본 적이 있다.

‘황궁.’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둔법으로 도주한 곳은 결국 동창이었나.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해원기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드물어진 눈송이, 그러나 천색은 어둡기 그지없어서 시각조차 헤아리기 어렵다.

대강 인시(寅時)쯤 되었을까. 한겨울은 밤이 길어서 해가 뜨려면 한두 시진은 더 지나야 할 터.

단목정 등이 뒤를 따른다고 했지만, 동창 전체와 싸우는 건 곤란하다.

되도록 빨리 백화를 찾아야 한다.

동시안의 비췻빛 안광이 반드르르한 바닥을 유심히 살피고, 해원기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작은 쪽문으로 향했다.

쪽문은 회랑으로 통하는 입구. 골목보다 훨씬 넓은 회랑이 길게 이어지고 방금 지나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회랑이 직각으로 몇 번이나 꺾이고, 계단이 나오다가 넓은 기단, 그리고 또 계단. 빠르게 이동하는 해원기의 눈에 시커먼 항아리 몇 개가 스쳐 갔다. 경수사에서 본 것처럼 화재에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수항(水缸)이겠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창붕당이 아니다.’

뛰어오른 기단만 해도 벌써 세 개. 창붕당보다 몇 배가 큰 건축이란 걸 깨닫는데.

그 순간.

“웬 놈이냐!”

청천벽력 같은 호통과 함께 사방에서 함성이 한꺼번에 터졌다.

와아, 와아아아.

막 돌을 깎아 만든 난간을 넘어 높다란 기단 위에 서던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지나온 회랑뿐 아니라 거쳐온 기단 밑에서, 멀리 보이는 담장과 백여 장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광장에서 무수한 인영이 우르르 몰려들고,

파파파파파파파.

곳곳에서 켜지는 등롱이 물경 수백 개.

시야가 밝아지면서 몰려드는 자들이 또렷하게 보이자 해원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횃불을 밝히며 몰려드는 자들은 전부가 눈에 익은 비어복 차림에 칼을 빼 들었고, 그 뒤로 갑주에 깃발과 창을 세운 무리까지.

대충 보아도 천이 넘는 숫자인데 좁은 골목에서 회랑을 통해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신왕공을 돋우고 동시안을 운용했거늘 천 명이 전부 해원기의 이목을 피할 가공할 고수란 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삽시간에 까맣게 모여들어 해원기를 에워싸고, 기단의 맞은편에서 다섯 명이 빠르게 올라서더니,

가운데에 관복을 갖추어 입은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이 야심한 시각에 감히 범궐(犯闕)을! 더구나 황극전까지 혼자서 숨어들다니.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로다. 뭣들 하느냐? 당장 잡아 꿇리지 못할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우렁찬 호통.

“명을 받습니다!”

좌우의 넷이 마찬가지로 크게 답하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 힘차게 나선다. 비어복의 어깨에 붉은 덧옷을 걸친 네 명은 전부 눈에서 형형한 정광을 뿜고 예리한 기세를 갈무리한 움직임이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해원기가 단박에 상황을 깨닫고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천 명은 바로 황궁을 지키는 금의위와 친위금군(親衛禁軍). 황궁을 침범한 자를 가만둘 리 없으며, 게다가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흔적을 쫓아 해원기가 이른 곳은 바로 황제가 정사를 살피는 황극전인 모양이다.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에 혼자 숨어든 정체불명의 인물. 등에는 검까지 버젓이 메고 있으니 자객이라고 볼 수밖에.

‘이 또한 함정이었더냐.’

해원기가 바로 뒤를 쫓을 걸 알고서 일부러 황극전으로 이끌었다.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해원기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기서 드잡이질 따위를 했다간 억울한 누명을 꼼짝없이 뒤집어쓸 것이며, 지금 그렇게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다.

싸움을 피하고 벗어나는 게 상책.

시선이 위로 향한다.

‘황극전 지붕은 비었군. 지붕으로 올라 방향을 잡고 담장 위까지 간 다음에.’

경공의 재주를 한껏 발휘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떠날 수 있을 터. 그쯤 생각하는데,

돌연 황극전의 뒤, 북쪽에서 웅후한 목소리가 빠르게 전해졌다.

“동지(同知) 대인, 멈추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 해원기만 그런 게 아닌지 다가오려던 네 명이 멈칫, 관복의 노인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북쪽을 본다.

“대영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려는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황극전 뒤쪽이 소란스러워지고,

“모두 병기를 거두고 물러나라! 황상께서 납시었다!”

급하게 이어지는 서문창의 외침에 천 명의 인원이 어쩔 줄을 모른다.

곳곳에 켜졌던 수백 개의 등롱이 다 꺼지고, 횃불을 든 금의위와 친위금군도 멀찍이 떨어져 황극전 주위를 지키는 진형으로 바뀌자.

상대적으로 어둠에 잠긴 황극전 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어정쩡해진 해원기. 여전히 돌난간에 서서 지켜보는데.

황극전 안에서 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강호에서는 꽤 알아주는 검객이라지? 궁중에 변고가 있을 기미를 미리 알리고 이렇게 달려오다니 참으로 가상하구나. 마땅히 상을 내릴지라, 들어와 이름을 고하거라.”

해원기의 시선이 은은하게 밝아진 황극전을 향했다.

아까와 달리 모든 기척을 다 감지할 수 있어서 황극전 뒤쪽으로 서문창이 황실친위와 함께 몇 사람을 모시고 들어섰다는 걸 훤히 알아보았다.

그중에 노란 용포(龍袍)를 입은 젊은이. 서문창의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홀로 용상에 앉았으니 바로 당대의 황제.

서문창이 뭐라고 했는지 이따위 소리를 한다.

해원기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두 손을 가볍게 모았다.

“상 받을 일을 하지 않았으니, 고할 이름도 없습니다.”

포권은 강호의 예. 황극전에 들어가 엎드려 인사를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허, 이게 무슨 소리. 짐이 이미 상덕공주를 구한 게 그대의 공임을 들었거늘. 굳이 사양할 필요 없다. 지금도 혼자서 황극전에 이른 것이, 흐음, 호가(護駕)하려던 것이 아니더냐?”

대뜸 황제가 말을 받는다.

호가는 임금의 어가(御駕)를 지킨다는 표현. 상덕공주의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지만, 여기서 호가는 은근히 떠보는 어감이 담겼다.

해원기는 그저 평소와 같은 말투.

“감사한 말씀이시지만, 초민이 범궐한 건 호가가 아니라 호민(護民)을 위함입니다. 아직 일을 마치지 못했으니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임금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황극전 안에서 폭발하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외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나, 아니면 당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그러든 말든 해원기가 손을 내리며 미련 없이 돌아서는데.

웃음을 뚝 그친 황제의 음성이 뒤를 따랐다.

“외호가 검왕이라고? 황실에 세운 큰 공과 짐을 대하고도 거침없는 호기, 비록 널리 공표할 수는 없어도 짐은 기어이 상을 내려야겠기에. 어흠, 우선 호국왕(護國王)으로 봉하노라. 그래, 호국검왕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봉지(封地)가 없다고 섭섭해 말고, 앞으론 왕호를 쓸 수 있도록 특별히…… 에, 떠났어? 이렇게 막돼먹은 자가 있나. 쳇.”

이미 해원기는 떠난 후.

서문창이 조심스레 그 사실을 알려주자 혼자서 흥을 내던 황제가 금방 투덜대기 시작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를 흔들어가며.

아무리 황제라도 해원기에게는 단지 철없는 애송이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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