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5화 (405/410)

제101장 종장(終章) (5)

단목정의 마음 씀씀이를 모를 리 없는 해원기가 눈짓으로도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

잔뜩 일그러진 미간,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불꽃이 튈 듯 무서운 눈빛이 백화로 여겨지는 백포 복면인을 노려본다.

인앙독.

천지인으로 이름 붙인 삼재금독의 마지막 하나.

가전(家傳)의 독경을 들고 가출한 사천당가의 막내 당규, 그리고 그 뒤를 쫓던 다섯째 당령과의 만남.

간단하나마 삼재금독이란 걸 얻어들었었다.

황장촌에서 무고하게 독살당한 화전민들이 어떤 독에 당했는지 알고자 했기에 굳이 독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자.

그때 당령은 세상에서 사라진 망령칩독을 떠올렸었고, 그 망령칩독이 인앙독에 속한다고 했었다.

지금 단목정이 추리해낸 결론.

심마령과 절대심인고를 능가하는 인앙독이라니.

당대 약왕당주가 허튼소리를 할 리 있나.

천외천 주루에서 만난 상보태감 조공공이 진짜인지는 몰라도 그의 입에서 십이음형사 중의 십호가 관련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게다가,

육신지궁이라는 곳에서 마주쳤던 독의 광인. 과거의 오독존으로 여겨지는 그 광인이 오독진살을 연성했다고 설쳤던 기억.

오독진살의 인앙독은 심령(心靈)을 침식한다는 건가.

그걸 위해서 황장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건가.

치이이이잉.

고검이 절로 소름 끼치는 울음을 토하고,

위이이이이.

계역(界域)이 파도처럼 퍼져나가면서,

“백화, 네 바탕은 독(毒)이었더냐?”

땅속에서 울리듯 무거운 목소리.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서던 단목정과 현도관 안에서 얼굴만 내밀던 오소민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다.

그러나 백화는 팔각형으로 접은 복면을 갸웃거리며 딴생각에 골몰하는 듯.

“그렇군. 소공자가 육신지궁을 뒤집어놓았으니까, 약왕당주라면 충분히 오독진살을 짐작할 수 있었겠네. 그래서 처음부터 벽독벽사에 힘을 기울였단 말이지. 에, 그건 그렇다 쳐도, 소공자는 역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전신에 붙인 수많은 흰 천을 한꺼번에 휘날린다.

“어떤 독도 듣지 않는군요. 특별히 제탁지검을 꺼낸 적도 없었는데. 사실 이 망혼존령(亡魂存靈)은 딱히 독으로 인지할 수도 없거든요. 흐음, 끝까지 밀어 붙여봐야 하나.”

파라라락.

깃발처럼 어지럽게 휘날리는 백포.

집중해서 백화를 노려보던 해원기가 비로소 그 백포에서 알아채기 어려운 희미한 기운이 꽃가루처럼 퍼지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망혼존령이란 이름 또한 생소하지만, 글자 그대로 혼을 없애고 영만 남긴다는 뜻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심마령과 절대심인고를 능가하는 독일 터.

그리고 백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디잉, 철컥.

조화부인의 일일쟁희가 징처럼 울리고, 제갈봉의 월월절문이 기묘하게 얽히면서.

해원기로부터 퍼져가는 계역의 파도가 암초를 만난 것처럼 주춤거린다.

저 이름조차 특이한 두 가지 법보는 계역조차 막아낼 수 있는가.

이치를 따지기 전에 백화의 교성이 깔깔거리고,

“그거 알아요? 오독진살의 본래 목적이 멸천마(滅天魔)라는 거. 그럼 멸천손(滅天孫)도 가능할지 궁금하네. 호호호호.”

고오오오.

돌연 현도관의 뜰에 괴이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사방에 널브러진 홍작과 녹명의 수하들. 목숨을 잃은 시신이든, 정신을 잃고 혼절한 상태든 가리지 않고 마른 흙덩이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움푹 꺼진 땅바닥과 무너진 대문과 담장까지.

사방이 모조리 파괴되는 가공할 광경.

해원기와 단목정이 지키는 현도관 건물을 제외하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괴이한 소용돌이에 가루가 되어간다.

단목정이 황망히 제자리에 주저앉아 손에 쥔 붕대를 힘주어 떨쳤다,

“사독혼화(邪毒混和)!”

약독동원의 음령결을 강화해서 버티는데,

그 시선만은 해원기의 등을 떠나지 못했다.

고죽의 신왕공이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공효를 지녔고, 제탁지검이 어떠한 독기도 배제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백화의 깔깔대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천마를 멸하기 위해 구상했다는 오독진살. 아무도 완성하지 못했으니 그 능력을 예측할 수 없으나, 진짜 천마를 멸할 수 있다면 천손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담은 단목정의 눈이 커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역을 무시하고 다가드는 괴이한 소용돌이에 지면이 부서져 내리건만, 해원기는 도리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입속으로 웅얼대는 음성은 너무나 작아 바로 뒤의 단목정도 듣지 못했고.

“우연무저(虞淵無底), 귀무귀허(歸無歸虛)… 양의포란(兩儀抱卵), 육분구성(六分九成)…….”

만일 들었다면 당혹스러워 약독동원의 음령결까지 흔들렸을 해괴한 소리.

그건 바로 육신지궁에서 오독존이 마지막에 미친 듯이 읊어대던 구결이었다.

언제나 먼저 상대를 살피고서야 반격에 나선다고 오소민이 흉보던 해원기의 나쁜 버릇. 그러나 박대정심을 목표로 세운 해원기는 상대가 어떤 이치를 구현하는지 놓친 적이 없다.

백화가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든 두 가지 법보로 일으킨 이 가공할 현상이 오독진살이라면, 이전에 오독존이 읊었던 구결에 그 단서가 있다.

스윽.

고검에서 빛이 사라지고, 검기조차 가라앉으며,

대신에 은은한 선향(禪香)이 감돌자.

쩡!

돌연 공간에서 쇠를 쪼개는 음향이 터졌다.

그러나 괴이한 소용돌이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더욱 빠르게 다가들어서,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적멸검의 무량대적. 육신지궁에서는 오독존에게 큰 충격을 주었거늘, 일일쟁희가 흔들리자 적멸검이 중간에서 튕겨 나왔다.

“호호, 결계나 영역도 소용없는데 무슨.”

뻔한 대응이라는 백화의 비웃음이 따라붙지만.

선향이 감도는 적멸검 옆에 또 한 자루의 고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캉!

또 한 번의 맑은 쇳소리. 본연검이 검위강(劍爲罡)을 이루자마자 월월절문이 공간을 비틀어 미끄러뜨린다.

백화의 비웃음처럼 어떤 검상도 미리 안다는 듯이.

그런데도 해원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두 손 또한 검을 쉬지 않는다.

따앙.

일일쟁희가 엇갈리며 걷어내는 자재검이 현현했고,

채챙.

유리검과 추상검이 번갈아 월월절문을 후려치더니,

신왕검이 천살검과 사신검을 이끌자 군림검과 천형검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활짝 펴진 해원기의 두 손.

사부에게 전해 받은 열 개의 검상이 열 손가락에 전부 구현되었다.

이른바 십지검상(十指劍相).

말을 길어도 실제로는 눈 깜빡할 새. 해원기가 나아가던 두 발을 힘차게 모으며 활짝 편 두 손을 거침없이 돌렸다.

휘리리리리링.

괴이한 소용돌이를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음향이 흐르면서 일일쟁희와 월월절문이 아니라 공간 전체가 거대한 검세에 뒤덮인다.

십지검상으로 시전하는 천손검법의 양의상전. 괴이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파괴의 잔재들이 제 갈 길을 찾았다는 듯 두 개의 흐름으로 바뀌었다.

해원기가 검상을 바꿀 때마다 조롱을 더할 셈이었던 백화지만,

십지검상이 순식간에 현현하면서 거대한 검세를 이루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계든 영역이든 무시하는 오독진살의 멸절천지(滅絶天地)를 거꾸로 뒤덮는 검세라니.

십대검상(十大劍相)이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그걸 손가락마다 구현할 줄이야. 그리고 이 십대검상을 전부 구현하기 위해서는 천손검법의 장생십경이 필효한 게 아니었나.

더구나 기대했던 제탁지검은 아예 꺼내지도 않고서 양의상전의 흐름을 이룬다?

좋지 않은 예감이 뒷머리를 당기자 양손이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어깨를 각각 움켜쥐었다.

“비시무리(非時無理).”

두 여자의 귀에만 들리는 속삭임.

조화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일일쟁희를 서로 부딪치고,

차앙, 차앙.

귀청을 울리는 굉음을 견디기 어려운 듯 제갈봉이 눈을 질끈 감으며 월월절문을 새장 모양으로 엮는다.

퍼엉!

막 양의상전의 흐름을 따르려던 괴이한 소용돌이가 그대로 폭발하며 희뿌연 연기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와락 느껴지는 엄청난 열기.

눈 내리는 한겨울이 아니라 폭염이 내리쬐는 사막에라도 온 것 마냥. 현도관 사방의 저택 담벼락이 줄줄 녹아내리고, 높다란 나무들이 삽시간에 재가 되어 흩어지며.

양의상전을 거부하는 엄청난 압력과 함께 시야를 가린 희뿌연 연기 속에 시뻘건 형체가 해원기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십지검상을 거두어 위치를 바꾸려던 해원기가 인상을 썼다. 모았던 두 발이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으니.

검왕오형의 재단경위가 급하게 앞에 장막을 치는데.

쿵.

뭐에 걸린 듯 바로 앞에서 고꾸라지는 시뻘건 형체. 그리고 해원기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느낌.

눈앞이 캄캄해지고, 속이 울렁거리며, 사지백해가 노곤해진다.

그러나 그 느낌과 동시에 머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버썩 정신을 차리고, 아랫배에서 바람과 우레가 마구 울어대더니.

수정지력으로 상상지를 깨우고, 풍뢰지결로 대지체를 뒤흔든 운혜덕택이 십지검상을 가슴에 품었다.

몸이 튼튼해야 지혜를 닦고, 지혜가 있어야 몸을 바르게 쓸 줄 아는 법.

지혜는 왜 닦고 몸은 어디에 써야 하나.

있는 듯 없는 듯 한가로이 머물다가 때가 되면 단비를 내리리라. 덕이란 함께 잘 지내려는 사람의 소이이니.

베풀어라. 그게 바로 왕(王)이니라.

철컥.

고검이 저 혼자 검집으로 돌아가면서 해원기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와자자작.

지면을 타고 해원기의 발을 묶었던 얼음이 박살 나 날아가고,

공간을 메웠던 지독한 열기가 거센 바람에 산산이 흩어졌다.

“어?”

오독진살을 막으려고 음령결에 전력을 기울이던 단목정이 갑자기 상쾌해진 기분에 입을 딱 벌렸고,

“으응?”

여차하면 하화로 항룡진기를 전부 내치려고 준비하던 오소민도 눈을 휘둥그레 떠야 했다.

해원기가 디딘 곳은 분명히 난장판이 된 앞뜰이었는데, 어디서 물거품이 끓어오르며 거대한 해일이 일어서는지.

그리고 희뿌연 연기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중에 갑자기 푸른 하늘이 아득히 펼쳐지다니. 눈송이가 흩날리던 밤이었잖나.

환상. 틀림없는 환상이지만, 눈을 속이는 삿된 술법 따위가 아니었다.

해일에 떠받들려 푸른 하늘로 뛰어오른 해원기가 마치 동강으로 화한 듯이 구름을 휘몰아 나아가고 있으니까.

정신을 좀먹고, 오장육부를 뒤집으며, 전신을 침습하던 오독진살을 모조리 베어버린 십지검상이 나래를 편 양손으로 모여든다.

제탁지검은 필경 검상이 아니었다. 탁한 것을 베어버리는 검은 모두 제탁의 검일지니.

이제 사람을 해하는 탁한 것을 제거할 때다.

번쩍.

천손검법의 인점기중(人占其中)이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으로 나아가는 신왕검은 번개.

우르르르.

천손검법의 세사망망(世事茫茫)이 검왕오형의 유야무야를 머금은 천형검은 우레.

그리고 두 자루 검상이 빛과 어둠으로 함께 어우러진다.

콰쾅!

“쿠엑.”

산산조각이 난 일일쟁희를 내던지며 조화부인이 피를 뿜고,

“으아아악.”

가루가 된 월월절문을 뒤집어쓴 제갈봉이 비명을 내지르며 거꾸러졌다.

심지어 두 여자를 앞에 세운 백화의 전신도 갈기갈기 찢겨나가,

전신에 두른 수많은 백포가 그친 눈송이 대신 흩날리고, 머리에 쓴 팔각형 복면이 대팻밥처럼 깎여나가는데.

“쯧.”

복면 속에서 문득 새어 나오는 혀 차는 소리.

막 얼굴을 드러내려던 머리통이 수박 깨듯 터져버렸다.

퍽.

찢겨나간 백포 조각과 분수처럼 솟구친 핏물이 순간적으로 뒤섞이다가.

파팟.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진 위로 백화의 목 없는 시체가 엎어진다.

공중에 둥실 뜬 해원기가 가만히 두 손을 모으다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닿을 듯 말 듯 모은 두 손.

사부와 탁 소숙이 이론만 정립했던 고천무쌍진의 제삼초 대화초시(大化初始)를 마침내 성취했지만.

그 기쁨보다 백화의 혀 차는 소리와 엎어진 시체가 마음에 걸렸다.

팔각형의 복면 속, 막 드러나던 얼굴은 절대로 백화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