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장 종장(終章) (4)
이전에 조화부인이 사륙변려의 무채상변이니 뭐니 떠들면서 현도관을 공격하다가 물러났을 때, 제갈봉이 해원기의 칠성둔형보를 틈타 숨어든 적이 있었다.
그때의 개구멍(?)을 이번엔 오소민과 정록이 써먹었달까.
심지어 장난스럽게 이름을 붙였던 연둔과(連遁鍋)도 놓치지 않았다. 해원기의 삼매마려에 연결되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단목정.
결계를 파해하는 핵심으로 삼았고, 그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자부이진경을 발동하는 기점(起點)은 바로 현도관의 안쪽. 그러나 정확히 어디의 무엇인지는 특정하기 어렵고.
이미 발동해서 현도관 주위를 전부 뒤덮은 광대한 결계를 간단히 걷어낼 보장도 없다.
필요한 건 시간.
그래서 악송령과 함께 곤경에 빠져 꼼짝 못 하는 역할을,
해원기에게는 조금이라도 말을 끌도록 부탁하여,
마침내 안팎에서 자부이진경을 말끔히 해제해내었고.
기어이 결계 내부에 은신했던 자들까지 현신시켰다.
해원기는 바로 이때를 기다렸었다.
홍작과 조화부인, 녹명과 제갈봉. 좌우에 둘씩 모인 여자들뿐 아니라 사방에서 흐릿한 형태를 드러내는 열둘까지.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해원기의 눈이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신령검역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검이 신령하기 때문이다.
“질(叱)!”
단호한 꾸짖음과 함께,
면면부절의 수정지기를 바탕으로 바람과 구름이 일었으니, 신령검이 풍운(風雲)으로 목표를 휩쓸었다.
촤앙!
그런데 청량한 검명과 뒤섞이는 외침.
“혼암미식(昏闇未拭)!”
“모호초청(模糊招淸)!”
현도관을 제외한 사방이 졸지에 컴컴해지며 흐릿한 형태들이 도로 흩어지고,
파팡.
만세를 부르며 나가떨어지는 홍작과 녹명. 피를 뿜으면서도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손에 쥐었던 편엽도와 연검은 아예 원반과 선기옥형에 들러붙어서, 몸이 굳었던 조화부인과 제갈봉은 어느새 옆으로 위치가 밀려난 채.
영역을 지배하는 신령검이 홍작과 녹명을 제외하곤 전부 빗나간 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놀라운 일이지만, 해원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타(咤)!”
또 한 번의 꾸짖는 기합.
컴컴해지던 사방이 깜짝 놀란 듯 훤해지고 뇌우(雷雨)가 거침없이 치달린다.
콰앙!
“끅.”
“으윽.”
저택의 벽에서, 골목의 담장에서, 높다란 나무 꼭대기에서.
죽은 벌레 떨어지듯이 해괴한 덩어리 열두 개가 바닥으로 우수수 추락했다.
신령검역에 이어진 천형검계. 처음부터 해원기는 풍운뇌우를 이끌었고, 그건 또한 고천무쌍진의 두 번째인 쌍왕분노(雙王忿怒)의 구결이었다.
우르르르.
고검이 뒤늦은 우레를 끌고 내려앉자,
현도관의 열린 문을 향해 단목정과 악송령이 서둘러 움직이는 모습.
해원기는 고검을 쥐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서 있는 자는 조화부인과 제갈봉 둘. 기병을 두 종류씩 안아 든 채로 굳어진 두 여자에게 끝까지 경계의 시선을 떼지 않는다.
단목정과 함께 꽤 공을 들였으나,
현재의 결과를 완전한 성공으로 보기엔 이르다.
추락한 열두 명은 전부 시커먼 포대 자루를 뒤집어써서 서로 구별이 되지 않고,
신령검역의 청량한 검명과 뒤섞였던 외침도 낯설지 않기에.
천외천 주루에서 습격당했을 때와 사라진 오소민을 찾으려 중첩된 은문진을 통과했을 때.
음형십이사의 둘과 마주쳤었다.
하나는 눈코입조차 보이지 않는 시커먼 포대 자루, 또 하나는 깃발처럼 흩날리는 백포 복면. 그 특이한 복색만큼 괴상한 능력을 지녀서.
시야를 차단하곤 분신을 여덟 개 만들어 내거나, 신체를 분산해 공간을 채우거나.
‘혼암미식’과 ‘파경편조’라고 했었다.
지금 쓰러뜨린 열둘은 혼암미식의 똑같은 포대 자루. 파경편조의 백포 복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밀랍 인형처럼 굳어버린 조화부인과 제갈봉도 단지 심령의 주체인 홍작과 녹명이 거꾸러졌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단목정도 마찬가지인 듯. 악송령을 앞세워 현도관으로 달려가는 그 짧은 거리를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소매에서 주르르 흘러나와 땅바닥에 기다란 선을 이루는 낡은 붕대. 현도관에서 얼굴을 내민 오소민 앞에 이르고 나서야 비로소 긴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높였다.
“후, 이 정도면 어떤 독기도 반 시진은 범하지 못한다.”
오소민이 아니라 해원기에게 들려주는 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뜻을 표하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먼저 나왔다.
“이게 사독불입(邪毒不入)의 약왕결(藥王訣)이었다고? 음령부유(陰靈蜉蝣)의 잡술 따위로 어찌. 흐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퍼퍼퍼퍼퍽.
사방에 추락한 포대 자루들이 저절로 부서져 한 줌의 연기로 화해버리니.
남은 건 셋.
그리고.
현도관 뒤쪽에 담장 대신 늘어세운 나무 위에서 떨어진 시커먼 포대 자루가 일순간 새하얀 백포 복면인으로 변한다.
팔각형의 복면, 깃발처럼 날리는 복장.
통왕의 중지라는 곳에 나타났던 바로 그 복면인이다.
백포 복면인이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좌우를 차례로 살피곤 탄식을 토했다.
골목과 담벼락. 연기로 화해버린 다른 포대 자루와 달리 그대로 형태를 남긴 둘에게선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해서.
“허어, 일호와 이호를 이렇게 잃을 줄은 몰랐네. 쯧쯧.”
안타깝게 혀를 차는 백포 복면인의 목소리.
바로 공중에 울렸던 백화의 음성이다.
여유작작한 언행은 또 하나의 신호였나.
백포 복면인이 혀를 차자마자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별안간 두 손을 내뻗고,
편엽도와 연검이 화살처럼 해원기에게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귀청을 울리는 파공성을 동반한 편엽도의 무수한 칼날, 아무 소리도 없이 공중을 가르는 연검.
범상치 않은 기세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해원기에겐 아무 소용도 없다.
고검이 언뜻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자,
쩡.
쇳소리 한 번에 편엽도와 연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런데.
현도관 앞에 선 단목정이 깜짝 놀란 표정.
“이형환위(移形換位)? 천리호정(千里戶庭)?”
둘 다 경공의 고절한 경지를 지칭하는 표현. 하나는 눈 깜빡할 새에 움직이고, 또 하나는 먼 거리를 지척처럼 다루는 경지다. 그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건,
해원기가 불쑥 면전에 이르고, 백포 복면인이 조화부인과 제갈봉을 양쪽에 거느린 채 뜰 저편에 나타났기 때문.
단목정만이 아니라 누구도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돌렸다.
뇌전금강을 펼친 후에 단목정이 나타나자 자신을 현도관 앞에서 뜰 가운데로 옮겼던 그 수법.
이건 경공이 아니다.
“대단하군. 미리 진도를 베풀거나 술법을 발동한 흔적이 없거늘.”
난장판이 된 현도관이다. 진도를 베풀었어도 진즉 다 망가졌을 것이요, 이렇게 특별한 술법을 마음대로 펼치는 술사(術士)란 있을 수 없다.
그러려면.
“법보(法寶)의 도움을 받으면 되죠. 그나저나 그 편엽도와 연검도 황궁비고에서 꺼내온 귀한 것들인데. 십이사의 둘에다가 신병이기 두 자루까지, 약왕당주를 끼워준 대가로는 손해가 너무 큰데요. 쩝.”
간단히 말을 받는 백포 복면인.
황궁비고에서 꺼내온 편엽도와 연검을 희생하면서도 조화부인과 제갈봉은 구해냈다.
아쉬운 건 십이사의 둘과 신병이기 두 자루라며 입맛을 다시니.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홍작과 녹명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바로 앞에 선 해원기의 어깨에 가만히 손이 올라왔다.
단목정이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법보가 있다면 정해진 공간 안에서는 술법을 바로 발동할 수 있으니까. 에, 그래도 이런 건 처음 보는지라. 뭐라는 술법인지 이 무지한 단목 모의 견식을 넓혀줄 수 있겠소?”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했다.
해원기를 위해 일부러 나선 단목정에게 백포 복면인이 가벼운 코웃음을 보냈다.
“흐응, 무지하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군. 기껏 적성문(摘星門)의 잔꾀나 이어받은 주제에, 약왕당의 주인이라면서 허접스러운 사술을 익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여기는 너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대뜸 무시하는 말투지만,
단목정은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긴다.
“단목 모의 사승(師承)을 아시는구먼. 재주 없는 몸이 집안과 사문을 함께 이어받는 게 어디 쉽겠소? 기회가 닿으면 뭐든지 주워 담기 바빠서. 과거에 벽세의 대사공 역할을 하던 분에게까지 가르침을 청했던 처지라. 약독동원(藥毒同源)을 음령결(陰靈訣)에 붙인 걸 금세 알아보는 귀하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구려.”
사독불입의 약왕결에 음령부유를 붙인 게 아니라 약독동원을 음령결에 붙였다.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말은 실상 잘못 보았다는 풍자.
‘혜안’을 지닌 백포 복면인의 눈빛이 변했다.
“약독동원… 좋다, 술법의 이름 정도는. 일행월이(日行月移)라고 한다만, 일러준다고 알아먹을 수나 있을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말투에 조롱이 담겼으나.
“오오, 일행월이. 감사, 감사하외다. 그러면 조화부인이 든 두 개의 원반이 해가 가는 걸, 제갈 소저가 든 선기옥형이 달이 움직이는 걸 의미하나 보오. 쌍일(雙日)로 동(動)을 표현하고, 선기옥형의 천문(天文)으로 정(靜)을 나타내다니. 진짜 법보, 법보로다. 신기한지고!”
주절주절 해석을 덧붙이며 감탄하는 단목정.
대놓고 무시하려던 백포 복면인도 이 넉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문노인에게 잔꾀만 배운 건 아니었나. 용케 일일쟁희(日日錚熙)와 월월절문(月月節文)의 의미를 읽어냈구나. 자, 원하던 걸 알았으면 비켜서…”
“일일쟁희, 월월절문. 그것들도 황궁비고에서 나온 거요?”
“음?”
“일월동정(日月動靜)을 기쁘게 맞이하려는 훌륭한 보물들을 삼재금독(三才禁毒)과 함께 쓰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짓이지.”
“!”
말이 막힌 백포 복면인의 전신이 움찔.
그 반응을 기대했었나.
단목정이 얼굴을 굳히면서 해원기의 어깨에서 손을 뗀다.
“결국은 오독진살(五毒眞煞)을 이런 식으로 구현했구나. 원기야, 이곳에 살포된 것은 지부의 심마령도, 벽세의 절대심인고도 미치지 못할 인앙독(人殃毒)일 게다. 후우.”
긴 한숨.
백포 복면인과의 대화는 확실한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고, 마침내 그 사실을 검증해냈으나.
이를 알려주는 형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원흉을 드러낸다.
동창의 태상과 경수사의 국사 뒤에 있는 배후. 그러나 그 배후가 모든 사건의 주모자라기엔 어긋나는 점이 지나치게 많았다.
홍작과 녹명이 등장하고서도 서로 따로 행동하며 부딪치지 않으니.
이 둘을 조정하는 진짜 원흉이 있지 않을까.
사가삼미는 세 사람. 마지막 한 사람 백화가 교도인을 따라 사라졌다는 얘기를 믿어야 하나.
그 원흉을 끌어내면서 무슨 힘을 지녔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홍작에게 지부의 오대마도, 녹명에게 벽세의 사황령. 그밖에 신주영웅회에서 유실된 신공절학이나 황궁에만 전해지는 전설의 무공들이 있겠지만,
구양금오 아홉 개를 강호에 뿌리면서 노린 게 무엇이기에.
육악지력을 획득한 외에 무엇을 또 기도(企圖)했을지.
갖가지 사건에서 얻은 의문의 조각을 맞추어서 원래의 형태를 알아낸다.
물론 이런 계획을 세운 단목정에게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천외육가의 하나인 적성문 천문노인의 제자라고 해도.
그건 천외육가의 근본에 관한 문제.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자부가 남긴 잔재.
이를 처결할 권한은 오직 한 사람에게 있다.
고죽의 후예.
절세검왕이라 불리는 아우에게 맡겨야만 하는 단목정의 암울한 시선이 맞은편의 셋을 하릴없이 스쳤다.
대조주가의 조화부인, 천공사가의 백화, 신기제갈의 제갈봉.
둔갑삼가가 다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