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3화 (403/410)

제101장 종장(終章) (3)

고천무쌍진.

사부와 탁 소숙이 창안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동심합벽진(同心合璧陣).

수보 쪽의 열넷, 사정사신의 열여섯, 총 서른 명이 일으키는 기묘한 진세가 검림소연을 담은 판분천지를 기어이 막아내자,

상상지의 풍뢰지결과 대지체의 수정지력이 일순간 심중덕의 운혜덕택에 이어졌다.

성라포천과 파일식월, 그리고 백화가 빠르게 읊어대던 비결들. 정오검, 마오검, 평오검을 다 합해도 승기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자세를 가다듬을 틈도, 감긴 눈을 다시 뜰 새도 없던 해원기의 양손이 저절로 검왕오형의 역상정위로, 잔뜩 쪼그려 앉은 신형은 운보를 담은 일체경신으로.

그러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고천무쌍진이 시전되었다.

제일식 뇌전금강(雷電金剛)을.

본래 심도경에 이른 두 사람이 동심일체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합벽진이다. 말로는 쉬워도 어찌 심도경에 이른 고수들이 동심일체를 이룰 수 있겠는가.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도, 백년해로의 애정이 넘치는 부부라도 심도경에 이르기까지는 서로 눈곱만한 차이와 털끝만큼의 거리가 생기기 마련.

그런데 해원기는 혼자서 이 합벽진을 이루었다.

일체경신의 운보가 탁 소숙의 팔엽만다라를, 역상정위의 오의 격물궁리가 사부의 유의어검을 따르면서.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참혹한 광경에 인상이 일그러졌으나,

해원기는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부이진경의 결계는 완전히 깨지지 않았고, 이 결계 내부에선 강상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뇌전금강의 가공할 위력에서 홍작 등을 지켜내려던 서른 명의 기묘한 진세가 오히려 결계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고천무쌍진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도 이렇게 상대를 약화해 자신의 힘을 증대하는 고약한 포위 속에서였다고 하셨잖은가.

백화는 그 이치를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

‘구자옥결’이란 생소한 단어가 귀에 거슬리긴 해도,

불청객으로 끼어든 동료들부터 확인해야 한다.

무너져내린 대문과 담장의 파편 사이로 남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악송령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그런데 뜰 안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던 단목정이 돌연 버럭 고함을 지른다.

“후삼보(後三步)!”

뒤로 세 걸음. 악송령의 모습이 움찔 물러나고, 급하게 두 손을 교차하는 단목정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상한 행동. 해원기를 찾지도 않고 왜 갑자기 뒤로 물러나라고 외치나.

해원기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려는데,

휘익.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먼저 앞을 가로막고,

“오호, 약왕당의 주인이라는 게 그냥 붙은 이름은 아니란 건가? 용케…….”

백화의 목소리가 또 공중에 울리면서 주변이 기이하게 흔들린다.

얼핏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시야가 어긋나더니,

신속하게 중심을 찾은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위치가 바뀌었다.

뇌전금강을 펼친 후에는 현도관에 바짝 붙은 상태였으나, 순식간에 뜰 가운데로. 육악육신과 사정사신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곳으로 옮겨졌다.

누구라도 어리둥절할 상황에, 단목정의 단호한 외침이 연달아 들린다.

“벽독벽사(辟毒辟邪)! 기령이하(棄靈邇遐)!”

츠츠츠츠.

무너져내린 대문과 담장 주위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퍼져나가면서,

공중에서 눈송이가 마구 튀어나가는 광경.

게다가 곧바로 굳건한 도기(刀氣)가 우뚝 일어나고,

펑, 펑.

연이은 충격에 대문과 담장의 파편이 모조리 날아갔다.

훤히 드러나 골목 가운데.

합장하듯 두 손을 모은 단목정과 그 뒤에 서서 환도를 거두는 악송령의 모습이 보이자,

해원기의 미간에 파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원기야, 아직은.]

슬쩍 고개를 내밀었을 때, 이미 해원기를 확인했었나 보다.

단목정의 짧은 전음이 먼저 해원기의 발목을 붙잡았으나,

백화의 목소리와 함께 위치가 바뀌는 변화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훤히 드러난 골목을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불청객을 ‘고이 들이겠다.’라는 백화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양손이 교차하면서 나사관천이 더해진 고검이 눈부신 백광을 토하기 시작한다.

군림검의 어검대법.

강상이 완전치 않을지라도, 조화부인과 제갈봉 사이를 쪼갤 셈이다.

그런데.

“우우운(運)!”

기를 쓰며 부르짖는 소리가 좌우에서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골목에만 신경을 썼나. 아니면 바뀐 위치에 머리가 어지러워져서인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깜빡했다.

좌측에는 나동그라져 피를 토하던 수보가, 우측에는 사정사신에서 유일하게 남아 넋이 빠져 주저앉았던 한 명이,

똑같이 전신을 뒤틀며 두 팔을 미친 듯이 돌린다.

불구덩이나 격류 속에 떨어진 것처럼 괴로운 몸부림.

슈우우우우.

아무런 경력을 발출하지 않는데도 해원기의 주변이 뭐에 휩쓸린 듯 졸지에 빨려 나가고,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동시에 쌍장을 떨치는 모습과 함께,

“바알(發)!”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귀청을 찢었다.

꽈릉!

군림검을 날릴 새도 없이 벼락 치듯 퍼붓는 무지막지한 힘.

현도관의 뜰이 통째로 폭발했다.

솨아아.

폭우가 되어 쏟아지는 흙덩이 가운데.

“윽.”

짧은 신음을 삼키며 비틀거리는 신형을 억지로 추스르는 해원기. 머리칼이 엉망으로 흩날리고 걸친 옷이 갈기갈기 찢겨 허연 연기를 뿜는다.

지독한 충격에도 검을 놓치진 않았으나, 이미 군림어검의 빛을 잃은 고검을 선뜻 겨누질 못했다.

좌우에서 몸부림치던 수보와 사정사신의 한 명은 미친 짓이 지나쳤는지 이미 혓바닥을 베문 채 고꾸라졌고,

정면의 조화부인과 제갈봉, 후면의 홍작과 녹명이 서로 나뉘어 각각 자기 짝과 한패를 이루었으니.

더구나,

핼쑥해진 얼굴의 홍작이 치켜든 편엽도는 조화부인의 원반을 타고 꽃잎처럼 벌어지고,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녹명의 연검은 제갈봉의 선기옥형과 어울려 꿈틀거린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내상을 입었을 텐데.

아니, 그것보다 해원기는 불시에 퍼붓던 그 무지막지한 힘의 정체를 깨달으면서 얼굴이 바위처럼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역시 주의가 산만해진 틈이 있었어. 이건 뭐라고 할까, 뇌전교격(雷電交擊)이 어울릴까? 고천무쌍진은 잘 몰라서. 괜찮나요, 소공자?”

당장 득의 한 백화의 조롱이 들리지만,

해원기의 굳어진 입은 열리지 않았다.

과연.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무지막지한 힘은 뇌전금강을 뒤집어쓴 것.

어떻게 무쌍진을 이용했단 말인가.

대답 없는 해원기가 더욱 마음에 든 듯,

“많이 놀랐나 보네요.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홍작과 녹명이 거느리고 온 아이들이 거의 다 쓰러지는 바람에 제대로 굴러갈지 의심스러웠거든요. 워낙 소공자의 고천무쌍진이 무시무시해서. 역시 자부이진경이 쓸모가 많아. 조금 전에 투덜댔던 건 취소예요, 취소. 호호호.”

소녀처럼 재잘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자부이진경이 어떻고, 거느리고 온 수하들의 실력이 어떻고. 해원기의 뇌전금강 한 초식에 거의 전멸되었다고 불평하던 말을 스스로 뒤집으며 흡족해한다.

해원기의 굳어진 얼굴에서 눈만이 번쩍였다.

수보와 원좌를 비롯한 열넷과 사정사신의 열여섯. 서른 명이 이루었던 특이한 진형이 끝까지 남아 뇌전금강을 뒤집어썼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였을 터.

‘수, 화, 그러다가 당황해서인지 멸진과 둔입에서 멈칫거렸다. 그리고 지금의 운과 발.’

머릿속에 백화가 외쳤던 구결들이 빠르게 명멸하고,

닫혔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조금 더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했었지. 멸진과 둔입은 자부이진경을 이용해 피할 생각이었구나. 그러면 지금의 재주는 네가 떠들었던 구자옥결이겠지. 이것도 시험. 결과에 꽤 만족한 거로 들리는군.”

작은 소리의 혼잣말이었으나,

백화의 웃음이 뚝 끊겼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백화는 새삼스럽게 해원기를 다시 살펴보는 중. 외모가 엉망이 되었어도 생각만큼 큰 충격을 주진 못했다. 그래도 자신이 펼친 고천무쌍진을 고스란히 뒤집어썼으니 내심은 크게 동요했으리라 여겼거늘.

되레 얼핏 흘렸던 실언에서 단서를 찾아낼 줄이야.

“그간 소공자의 행적을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확실히 많이 달라졌군요. 이젠 도저히 어렸을 때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흐음, 그렇다면 그저 과거의 소요원과 소호리에 기댄 게 아닐 수도…….”

백화 역시 단목정과 방온화의 어렸을 적 별명을 알고 있다.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난 여전히 둔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지. 그래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홍작도, 녹명도. 그리고 지금의 백화도.

그녀들이 기억하는 해원기는 열 살배기. 잠룡재에서 글공부하던 어린아이다.

순박하고 아이답지 않게 진중해도, 총명하거나 기민하다는 표현과는 동떨어졌던 어리숙한 꼬마.

“흥, 그렇게 겸양을 떨어봤자 바뀌는 건 없지. 약왕당주께서는 꼼짝 못 하고 신경 쓰이는 역할을, 소공자는 계속 시험 대상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쟤네 넷의 전력이면 굳이 다른 애들이 필요하지 않.”

“음형십이사를 믿고서?”

또 끊긴 목소리.

백화가 기가 차서 헛바람을 내뱉는다.

“허, 이거 정말 딴사람이 되셨네. 겉으론 겸손한 척, 그러면서 뭐든지 아는 티를 내겠다는 건가? 예전에는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조금은 있었는데, 고죽에서 자라면서 아주 재수 없는 성격으로. 흐흥, 그렇겠지, 그 구석은 본래 그런 족속들이었으니.”

“족속?”

해원기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음형십이사를 끄집어내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려 했더니, 갑작스레 백화의 말투가 표독스럽게 변하면서.

고죽의 후예는 재수 없다느니, 그런 족속이라느니. 입이 험해졌다.

해원기 자신은 몰라도, 사부와 사조를 함부로 욕하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일. 당장 꾸짖으려는 호통을 이번엔 백화가 자른다.

“네가 감히.”

“사람의 정이 어쩌고저쩌고, 말은 번드르르하지. 그러면서 저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왜 제멋대로 굴어서 여러 사람 불행하게 만드는 거지? 다정? 흥! 다정은커녕 박정(薄情)도 모자라 무정(無情)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들잇!”

와르르 쏟아내는 말에 전부 가시가 돋쳤다.

이제껏 드러내지 않던 감정이 갑자기 폭발한 말소리에 해원기가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좌우로 나뉜 홍작과 녹명에게서 기세가 불길처럼 치솟는다.

백화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나. 당장 양쪽에서 덮쳐들 태세.

그런데.

단목정이 합장했던 두 손을 서로 뒤집어 떨치며,

“파련(破連)!”

단호한 일갈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도관 안에서 또 낭랑한 기합이 터졌다.

“해둔(解遁)!”

그건 바로 오소민의 음성. 그리고 현도관의 사방에 내리는 눈송이가 뭉치듯 흐릿한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주위를 둘러싼 저택의 벽, 어떤 것은 골목 맞은편의 담장 위, 또 어떤 것은 담장 대신 줄지어 심은 나무 꼭대기에.

전부 열둘.

해원기 또한 단목정과 오소민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해서 제자리를 팽이처럼 회전하고,

파아아아앗.

난장판이 된 뜰에서 황진이 돌풍을 타고 구름처럼 퍼져나갔다.

막 기세를 올리며 덮쳐들려던 네 여자가 뭐에 걸린 듯이 덜컥 움직임을 멈추니.

어느새 공중에 떠오른 고검에 어리는 신령한 광채가 등골이 서늘한 위엄을 드러낸다.

신령검역과 천형검계.

자부이진경이 완전히 파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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