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2화 (402/410)

제101장 종장(終章) (2)

“차앗!”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홍작의 거친 기합.

팔마반경이 빠르게 엇갈리며 붉은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고 회색 기운이 송곳처럼 끼어든다. 잔인도와 형해도로 시작하는 규환과 대규환의 팔대지옥.

그 포악하고 흉흉한 기세 뒤로 녹명의 모습이 또 사라지더니,

후우웅.

거대한 기운이 공간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경수사에서 보였던 석가척상경의 웅장한 힘이지만, 형태는 검을 휘두른 것처럼 강건하다. 게다가 희미하게 번지는 녹광.

적, 회, 녹의 기운이 눈을 어지럽히는데.

해원기의 발끝이 사뿐 앞으로 나아가며 검이 원을 그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원.

그러나 그 원이 삼색의 기운을 단번에 묶어 뒤섞고,

홍작의 여덟 개 형상이 퍽퍽 꺼지면서 녹명의 붉은 가사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녹명이 홍작 앞으로 나서며 철판처럼 빳빳해진 소맷자락을 휘두르지만,

이미 해원기의 검은 그려낸 원을 다시 거꾸로 거슬러 움직이니.

거대한 녹광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잔인도와 형해도와 뒤엉켜버렸다.

퍼펑.

사방으로 비산하는 힘줄기를 따라 중심을 잃고 비칠거리는 홍작과 녹명.

그러나 또 하나의 폭음.

펑.

선명했던 시야를 온갖 색이 뒤섞여 가리고, 그 속에서 무수한 살기가 뛰쳐나왔다.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하던 제갈봉과 조화부인이 심령의 제어에 따라 본체를 도우려는지.

신기제갈의 칠색천막이 장내를 뒤덮는 가운데 조화부인의 겉옷과 머리 장식이 화살처럼 해원기를 노린다.

졸지에 차단된 시야와 절묘한 암습이지만.

해원기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두 손을 엇갈렸다. 오른손에 쥐었던 고검이 왼손으로, 아니, 다시 오른손으로 돌아갔나.

너무나 신쾌한 움직임에 어느 손에 검이 들렸는지 분간할 수도 없이,

동그란 원이 고리처럼 횡으로 이어져 단숨에 공간을 양단했다.

차차차창!

연달아 울리는 쇳소리.

녹명과 제갈봉, 홍작과 조화부인. 넷이 현도관에 부딪칠 듯 튕겨나고,

칠색천막이 한 덩어리 구름이 되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검신을 왼쪽 팔 위에 누인 채 비스듬히 당기는 자세를 취한 해원기가 눈을 부릅뜨는 모습.

시선이 녹명과 홍작이 아니라 제갈봉과 조화부인을 향하며,

“장영비금이란 게 차천폐일(遮天閉日)이었고, 당가의 만천화우(滿天花雨)와 무형봉접(無形蜂蝶)을 같이 쓴다?”

혼잣말에 의심이 가득 담겼다.

예전에 조화부인과 처음 만났던 수차제. 마지막에 장영비금이라는 기괴한 암습을 감지하지 못해서 때맞춰 동강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크게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마주하면서 비로소 곤혹도에서 유래한 차천폐일의 수법이란 걸 확인했으나,

겉옷과 함께 쏘아낸 머리 장식은 만천화우요, 칠색천막에 감추어 흔적도 없이 요혈을 노렸던 것은 무형봉접.

전부 사천당가에서 비전으로 치는 암기술인데. 그 두 가지를 짜 맞춘 것처럼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동시에 시전했으니.

서로 적대하던 사이였잖나.

어디서 사천당가의 비전을 얻었으며, 또 어떻게 둘이 같이 쓸 수 있을까. 마치 오랜 세월 함께 수련한 동문처럼 교묘히 배합해서.

의혹이 버썩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문은 해원기만 가진 게 아닌 듯.

대뜸 종잡을 수 없는 백화의 음성이 울린다.

“천손검법의 전삼초(前三招)가 좀 이상하네. 홍몽무변에서 양의상전으로 가는 투로(套路)도 다르고, 그게 다시 뒤집혔으면서 판분천지로 나아간다? 고리처럼 이어지는 판분천지라는 건 대체 어디서 나왔지? 흐음.”

이해할 수 없다는 침중한 신음까지.

제갈봉과 조화부인을 살펴보던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손검법을 훤히 알아보는 백화. 초식명뿐 아니라 투로의 변화와 순역(順逆)의 흐름까지 짚어낼 줄이야.

천손검법은 고죽에 전해지는 유일한 검학. 설사 사부의 친형제와 같은 탁 소숙이라도 그 전모를 알지 못한다.

사부는 천하에서 천손검법 아홉 초식을 전부 목격하고 이해한 자는 사부와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천마 단 한 사람뿐이라고 했었다.

자부의 지혜를 지닌 교도인조차 여섯 초식 정도를 흉내 내는 데 그쳤거늘.

하지만, 다른 생각할 여유는 없다.

판분천지를 견디어낸 네 여자. 각각 평범치 않은 병기를 꺼내 든다.

홍작은 종잇장처럼 얇은 칼날이 무수하게 겹친 짤막한 편엽도(片葉刀), 조화부인은 허리춤에 장식처럼 매달았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은반(銀盤) 두 개, 제갈봉은 수십 개의 쇠젓가락을 얼기설기 공처럼 엮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녹명은 얇고 긴 연검(軟劍)을 쥐었다.

하나같이 은은한 보광을 뿌리는 신병이기.

게다가 좌우로 벌어졌던 홍작과 녹명의 수하들이 슬금슬금 해원기를 에워싸려는 움직임을 보이니.

수보와 원좌를 필두로 한 육악육신이 열넷, 사정사신이 열여섯. 그들 또한 갖가지 병기를 겨누며 한껏 공력을 끌어올린다.

그리 넓지 않은 현도관의 뜰이 물샐 틈 없이 뿜어지는 기세에 터질 것만 같다.

이번에도 선공은 홍작과 조화부인 쪽.

홍작이 편엽도를 휘두르며 빠르게 다가드는 바로 뒤에 조화부인이 은반을 받쳐 들고 그림자로 화한다.

둘 다 오대마도를 익혔으니 곤혹도의 미심환영으로 언제든지 눈을 속일 가능성이 있고,

한 박자 늦추어 연검을 흔들며 몸을 날리는 녹명 뒤에도 제갈봉이 선기옥형을 든 채 따르니.

마치 하나의 정교한 합벽진이라도 발동한 듯.

워낙 좁은 공간이라 순식간에 소름 끼치는 도기와 은은한 검기가 코앞에 이른다.

조금 느슨해졌다고 해도 아직 자부이진경의 결계 안.

육악육신과 사정사신이 거의 근신박투와 마찬가지로 치고받았던 것처럼 방금도 기운을 강하게 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오대마도든 사가신공이든.

그런 까닭에 사천당가의 암기 비전이 기회를 노리고 쓰여졌을 터.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짧게 꾸짖었다.

“질!”

피잉.

호통에 놀란 것처럼 누웠던 고검이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자, 양손이 좌우로 나뉘어 빛살처럼 뻗는다.

홍작에겐 절세오검, 녹명에겐 오악검법.

지이잉, 우우웅.

절세오검이 경혼음마검으로 귀속하고, 오악검법이 산신검진으로 엮이는데.

촤르르르르.

칼날을 폭포처럼 쏟아내며 옆으로 도는 홍작의 편엽도 사이에서 녹명의 연검이 불쑥 튀어나오고,

돌연 지면을 휩쓰는 섬뜩한 유영(幽影)과 머리 위를 엄습하는 성궁(星穹).

경혼음마검과 산신검진의 겨냥을 피했을 뿐 아니라 상하좌우를 일거에 점거해버린다.

과연 이 넷의 공격은 일종의 합격진.

구결 자체는 단순해도 넷이 지닌 능력과 병기가 적절하게 어울려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해원기가 일단 내친 검세를 도로 거두려는 듯 열 손가락을 활짝 펴지만,

잡아당기는 것 같던 움직임이 두 발을 겅중거리는 순간에 아래에서 위로 끄집어내는 동작으로 바뀌고,

촤아아.

섬뜩한 유영을 꿰뚫고 치솟는 거대한 기둥 하나. 곧장 둘로 나뉘어 좌우를 쪼개다가 셋으로 불어나 공간을 얼리더니, 체로 거르듯 사방을 뒤흔들곤 위쪽의 성궁까지 두들긴다.

일주경천, 절영쌍살, 삼음빙세, 사우반고, 오호단문.

경혼음마검과 산신검진을 연결하는 연주오절(聯珠五絶)의 평오검. 네 가지 병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파파파팡.

가장 늦게 두들긴 성궁이 가장 먼저 바뀌었다.

“성라포천(星羅包天)!”

공중의 별자리가 눈이 어찔하게 뒤집히면서 해원기의 전면이 휑하니 열리고,

둥실 떠오른 원반 두 개가 겹치면서 눈부신 광채를 폭사했다.

“파일식월(破日蝕月)!”

아무리 절세의 고수라도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엄청난 빛의 폭발.

제갈봉과 조화부인이 외치는 구결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의 목덜미로 연검이 감겨들고 등허리에는 편엽도가 이빨을 드러냈다.

녹광에 물든 연검은 기척도 없고, 수많은 칼날이 뒤엉킨 편엽도는 진정 짐승의 아가리 모양.

해원기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듯, 아니, 몸을 돌릴 새도 없는데.

휑한 전면을 향한 채 불쑥 무릎을 굽혔다.

마보(馬步)의 자세보다 훨씬 낮고, 너무나 급격하게 앉아서 거의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다.

그러면서 위로 쳐들었던 양손의 검왕수가 엄청난 기세로 바닥을 내려치니.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검의 소나기.

평오검이 오호단문에서 일주경천으로 되감기며 경혼음마와 산신검진이 폭우로 퍼부었다.

쾅!

굉음보다 먼저 터진 건 백화의 급한 외침.

“수(收)! 화(化)!”

수보와 원좌를 비롯한 육악육신이 온갖 기문병기를 황망히 내지르고, 사정사신 열여섯은 동시에 한 손을 옆 사람 어깨에 올리며 나머지 손을 뻗었다.

그냥 포위한 게 아니라 이들 역시 일정한 진세를 이루었다는 뜻.

분수처럼 치솟던 흙먼지가 당장 양쪽으로 갈라져 흩어지는 가운데,

반대쪽으로 밀려나는 네 여자는 비록 차림새가 흐트러지긴 했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다.

정오검, 마오검, 평오검을 한꺼번에 운용한 검왕오형의 검림소연. 그 오의인 수주개와를 판분천지를 뒤집은 형태에 담았거늘 단 한 명도 쓰러뜨리지 못하다니.

그러나.

이제는 현도관 쪽에 가까워진 해원기. 정수리 위에 고검이 물고기처럼 펄떡이고,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신형이 빙글 돌아간다.

올리고 내린 양손의 검왕수를 이제는 평평하게 앞으로 내민 채. 파일식월에 당했는지 눈도 감았지만,

힘차게 무릎을 펴며 두 손이 기이하게 흔들리자 삼엄한 검기가 거대한 형태로 일어선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형으로 솟구치는 고검은 칠흑처럼 어둡고,

칠색천막이 둥실 떠올랐던 공중을 순식간에 뒤덮는 먹구름. 그 먹구름에 실려 가려는지 해원기의 전신도 맹렬한 돌풍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거푸 진결을 외쳤던 백화의 목소리가 확 뒤집혔다.

“이건! 멸진(滅塵), 둔입(遁入)……?”

뭔가 뜻밖의 진결이었나. 막 자세를 가다듬던 홍진과 녹명이 멈칫거리고, 나머지는 내지른 병기와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했는데.

번쩍.

먹구름이 번개를 토했다.

더구나 맹렬한 돌풍을 타고 수십, 수백으로 갈라지는 번갯불.

천상의 뇌공(雷公)이 현신했는가.

현도관 앞뜰에 벼락이 다발로 내리꽂혔다.

콰콰콰쾅!

쿠르릉, 쿠릉.

비명도 신음도 전부 삼켜버리는 우레가 여운을 끌며 잦아들자,

해원기가 고검을 가슴 앞에 세우고 천천히 눈을 떴다.

만목창이(滿目瘡痍). 현도관의 앞뜰은 화산이 폭발한 듯, 홍수가 지나간 듯.

산산조각이 난 원좌 뒤에는 나동그라져 피를 토하는 수보, 그 주위에는 전신에 걸친 기이한 연갑이 갈기갈기 찢긴 육악육신이 새까맣게 그을린 덩어리로 뒹굴고,

사정사신 열여섯 중에 사지가 다 붙어있는 건 단 한 명.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동료들 가운데에서 넋이 빠져 주저앉았다.

홍작은 산발한 미친 꼴이 되어 바동거리고, 녹명은 걸레쪽으로 변한 가사를 걸치고 무릎을 꿇은 모습. 둘 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데.

의외로 은반과 선기옥형을 가슴에 안은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멀쩡하다.

눈에 들어오는 참혹한 광경에 해원기의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 정도일 줄은 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과하다.

“설마 소공자 혼자서 고천무쌍진(孤天無雙陣)을 펼칠 수 있으리라곤. 으음, 아니, 그보다 자부이진경을 어떻게, 아직 결계가 유지되는 속에서 강상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억지로 놀란 심정을 감추려는지.

다시 차분해진 백화의 목소리가 울리자 해원기의 시선이 날카롭게 위로 올라갔다.

“이 지경이 되어도 너는 나서지 않을 셈이냐?”

매서운 호통.

그러나 백화는 못 들은 척 입만 놀려댄다.

“예전에 노야가 몰래 자부이진경의 핵심을 일러줬나? 그 고약한 양반이 그냥 일러줬을 리가. 적어도 골치 아픈 수수께끼로 놀렸을 텐데. 흠,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자부이진경을 발동시키라고 했잖아. 차라리 구자옥결(九字玉訣)로 정면으로 부딪치게, 아니지, 얘네들로선 아직 부족해서. 쯧, 다른 데 한눈을 팔지 않았으면 조금 더 끌고 갈 수 있었던…… 아, 불청객이 끼어들었거든요. 소공자가 기다리던 일행. 그 단목 당주라는 양반이 생각보다 대단하네요. 일단 소공자의 체면을 봐서 고이 들이라고 했죠. 에, 이렇게 나만 손해를 봤네. 쯧쯧.”

혼잣말로 중얼대다가 혀를 끌끌 차지만, 그 목소리에는 전혀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

그래도 해원기의 주의를 끌기에 족한 내용.

해원기가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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