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1화 (401/410)

제101장 종장(終章) (1)

현도관의 전 주인인 교도인이 세상을 등지고 사라지면서, 가까이 모셨던 세 여인은 어떻게 되었던가.

처음에는 강유행의 입을 통해 들었다.

홍작은 현도관을 가끔 살피러 들렀고, 녹명은 황궁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백화는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고.

그 얘기를 들었을 때, 해원기는 현도관을 물려받은 강유행을 위한 배려로 생각했었다.

영원히 세상에 나오지 않기로 한 교도인을 백화가 모시고, 중간에 녹명이 붙박이가 되어 만일의 사태에 연락을 담당하며, 쾌활한 홍작이 강유행을 도와 자질구레한 일을 돕는 구성.

현도관의 기업(基業)이란 게 ‘엤다, 네가 가져라.’라고 넘겨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겠는가. 가전의 감식안과 열심히 닦은 학문이 있다고 해도 강유행에겐 생소한 일일 테니.

교도인으로선 당대의 사가삼미(謝家三美)를 전부 데리고 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녹명을 만나면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교도인은 마지막으로 셋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할 권리를 주었고,

‘순진해 빠진’ 백화는 끝까지 노야를 모시는, ‘줏대 없는’ 홍작은 망설일 시간을 달라는, 그리고 ‘제멋대로’의 녹명은 세상에 남겠다는 결정을 했었다.

그 결정의 대가로 교도인은 현도관의 강유행을 지켜주라는 조건을 내걸어서,

녹명이 구명(救命)의 열쇠를 보관하는 책임을 맡았고, 홍작이 틈틈이 현도관에 와보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죽을 때까지 노야만 떠받들기로 한 백화만은 아무런 족쇄를 차지 않았고.

그런 백화가.

설마 홍작과 녹명을 노리개로 삼은 흑막일 줄이야.

해원기의 질문에 백화의 목소리가 처연해졌다.

“천외지력뿐 아니라 고죽지비(孤竹之秘)도 포함해야죠. 자부, 천외, 고죽, 셋이 모이지 않고서야 어찌 신인삼보(神人三寶)를 풀 수 있겠어요. 허무맹랑한 홍작이나 꽉 막힌 녹명으로선 기껏해야 과거의 잔재나 뒤적거리는 정도라. 얘들을 이런 식으로 쓸 수밖에 없는 저도 참 안타까워요. 하아!”

덧붙인 탄식에 해원기의 눈매가 살짝 비틀렸다.

홍작과 녹명이 말다툼할 때는 서로 ‘쥐새끼’와 ‘돌대가리’라는 적나라한 욕설이 오가더니,

이제는 ‘허무맹랑’과 ‘꽉 막힌’이라.

결코, 애정이 담긴 호칭이 아니다.

“친자매와 다름없던 너희 셋이…”

“그렇게 보였나요? 흠, 그럴 때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닐 텐데. 역시 소공자는 심성이 고와서 엉뚱한 쪽으로 잘 빠지는군요. 뭐, 그래도 저는 얘네들처럼 소공자를 만만하게 보지 않아요.”

처연해졌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었을까.

차분한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따져야 할 것이 무엇이기에.

‘심성 고운’ 해원기의 눈이 가늘어지지만,

백화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지난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거든요. 자부와 고죽이 가깝긴 해도 노야에게 사랑받은 고죽의 후예는 소공자가 유일할걸요.”

뜻밖의 말.

해원기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 이유 중의 첫 번째가 이것일 줄은 몰랐다.

과연.

천하를 천손(天孫)의 발아래 꿇리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교도인에게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고검협 묵세휘와 천외인협 묵인환은 참으로 껄끄러운 존재였겠지.

“그리고 난세가 마무리될 무렵엔 대관원, 적성문, 해중천의 천외가 소공자의 사부와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아, 게다가 동도서교(東道西敎)까지 모여들었잖아요. 흐음, 그런 환경이 소공자에게 당연히 영향을 끼쳤겠죠.”

대관원의 직계 후손인 녹림노조 방송서는 사부의 절친, 적성문 천문노인의 제자인 단목정은 사부에게 조카나 다름없고.

해중천이야 두말할 게 있나. 해천옥녀 대완아가 해원기의 대사모(大師母)다.

그리고 동도서교라면 백산(白山)에서 내려온 풍요환과 대진경교(大秦景敎)의 구세성자였던 도신주를 가리키는 말.

해원기를 제대로 안다는 표현인데.

이어지는 말에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선다.

“그러니까 자부이진경도 이렇게 풀어낼 수 있는 거죠. 얘들은 유치하게 노느라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아유,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자부이진경을 풀어냈다?

녹명과 홍작이 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울어대던 검명과 지면을 흔들었던 진동.

해원기가 팔짱을 끼면서 보였던 위세가 무엇인지.

백화는 이미 간파했단 말인가.

“뭐, 소공자의 일행이 큰 도움이 되긴 어렵겠지만, 우선 얘들과 몸이나 좀 풀어볼래요?”

가벼운 권유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얼어붙었던 공간이 풀어진 것처럼.

홍작과 녹명의 시선이 불꽃을 튀기면서 살기가 엄습했다.

휘르르.

홍작이 겉에 걸친 화려한 하피(霞帔)가 너울거리자 삽시간에 여덟 명으로 불어나는 팔마반경.

해원기를 에워싸기도 전에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시꺼먼 화기가 뭉클 끼쳐온다.

그게 심왕의 연옥도(煉獄道)에 명왕의 명도흑염(冥道黑炎)이 더해진 거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스스스.

희미한 소음 속에 어느새 공중을 뒤덮는 하얀 장막. 그건 놀랍게도 녹명이 머리에 썼던 고깔이었다.

기껏해야 두세 뼘 넓이일 고깔이 어떻게 현도관 앞뜰을 전부 뒤덮을 수 있는지.

더구나 내리던 눈을 막아주는 게 아니라 거대한 빙벽(氷壁)이 무너지듯 엄청난 한기로 깔아뭉갠다.

아래는 지옥의 불길, 위에는 빙벽의 한기.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공격에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데.

해원기가 팔짱을 풀면서 두 발을 힘주어 디뎠다.

두웅.

지면을 울리는 소리는 지유진 같으나, 쩍쩍 갈라지던 땅바닥이 도로 철썩 달라붙고.

치잉.

꽂혔던 고검이 반동으로 솟구쳐오르면서 시꺼먼 화기가 돌풍을 타고 빙벽을 불사른다.

퍼엉!

큰 북이 터지는 음향.

하얀 빙벽이 갈기갈기 찢겨 도로 눈이 내리고, 멀쩡해진 지면에선 불씨 하나 나오지 못하면서 시야가 선명해졌다.

일격에 공격을 파괴했지만, 그새 홍작의 팔마반경은 해원기를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흥!”

콧소리와 함께 지면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연옥도가 제대로 곤혹도로 바뀌면서 이번엔 누리끼리한 황진이 자욱하게 밀려들었다.

명도흑염이 사라졌는데도 황진 한 톨 한 톨이 형광(螢光)처럼 반짝거려 후끈한 열기는 더욱 강해졌다.

‘형해도의 음화(陰火). 음?’

팔마반경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헤아리던 해원기가 급히 두 손을 교차했다.

여덟으로 불어난 홍작에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녹명. 내리는 눈 속에서 불현듯 그녀의 붉은 가사 자락이 얼핏 스치더니.

부지불식간에 가슴으로 스며들려는 기이한 기운.

검왕오형의 재단경위가 벼락같이 그물을 이루지만,

따앙!

맨손에서 터지는 쇳소리, 공중의 고검이 수레바퀴처럼 휘돌아 황진을 잘라내는 가운데 해원기가 주춤 뒤로 물러선다.

하마터면 심맥(心脈)이 흔들릴 뻔했다.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홍작의 팔마반경이 와락 거리를 좁혀들면서 고검을 향해 시뻘건 기운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거센 눈보라가 곧장 해원기에게 휘몰아쳤다.

피처럼 붉은 혈기(血氣)와 하나로 이어 붙은 설풍(雪風). 홍백(紅白)의 조화가 그린 듯 아름답지만, 해원기는 고검을 거두기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러나 물러났던 발을 축으로 빙글 돌면서 두 손이 상하로 나뉘자,

휘돌던 고검이 뇌광(雷光)으로 화한다.

콰앙!

현도관과 주변의 저택이 전부 흔들리는 충격.

부채를 활짝 펼친 것처럼 팔마반경의 홍작 여덟이 멀찍이 밀려나는 사이에 가사와 소매가 찢겨나간 녹명의 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쭉 펴고 곧게 선 해원기. 천지(天地)를 나누어 가리키는 양손 사이에 고검이 수직으로 서서 팽이처럼 돌던 회전을 멈춰가고,

신광이 번뜩이는 시선은 홍작과 녹명이 아니라 현도관의 낮은 지붕 위를 향했다.

입술 사이로 이를 갈 듯 나오는 저음.

“무슨 짓을 한 거냐?”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현도관 지붕 위에서 백화의 웃음이 흘러나온다.

“호호, 눈치도 빠르셔. 지부의 팔대지옥과 사대(四大)를 바탕으로 한 사가신공을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제 위치를 찾고 있었어요? 음, 확실히 검형수가 변했군요. 유의어검(由意御劍)을 기본으로 했으면서도 군림검이라고 보긴 그렇고, 그 뇌정지기(雷霆之氣)가 나사관천을 이루었다고 해서 천극의 무극신공(無極神功)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는 없고. 설마 천손검법에 수정을 가했을 리는…”

“녹명과 홍작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다!”

백화의 말을 끊는 해원기의 저음이 더욱 단호하고 무거워졌지만,

백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더구나 목소리가 현도관 지붕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온다.

“어, 왜 나한테만 그러시지? 녹명은 제갈봉에게 심심상인을 베풀었고, 홍작은 화숙인을 심마령으로 만들었잖아요. 천부신력(天府神力)을 이룬답시고 사황령쯤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녹명에, 천지신맥(天地神脈)을 능가하는 만상조화로 오대마도를 전부 통어할 경지에 이른 홍작인데. 제가 감히 ‘무슨 짓’을 할 수나 있었을까. 아, 봐요, 얘들 화났잖아요. 호호호.”

마지막 웃음은 하늘로 올라가는지 땅으로 스며드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백화의 위치를 놓친 해원기가 어쩔 수 없이 다시 홍작과 녹명에게 초점을 맞춰야 했다.

팔마반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 걸음씩 다가드는 홍작,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드러낸 채 눈을 부릅뜨는 녹명.

홍작은 본래 발랄한 성격이라 눈에 붉은 기가 있었고, 녹명은 딱딱하고 찬 성격이라 흰자위에 푸른 빛이 돌았는데.

지금 해원기를 향한 그녀들의 눈은 똑같이 희끄무레하다. 마치 나이 먹은 노인이 안질을 심하게 앓아 시력을 잃었을 때처럼.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지부의 오대마도는 그 비결을 안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마왕(五魔王)만이 지니고 독자적으로 계승하는 절대마기(絶對魔氣)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런데 홍작은 절대마기를 지니지 않고도 팔마반경으로 진왕련에서나 가능한 팔대지옥을 혼자서 펼쳤다.

황진을 형광으로 일으킨 형해도와 고검을 물어뜯으려 했던 핏빛의 잔인도까지.

과거의 신주영웅회가 천지보록을 만들어냈던 것은 홍환의 소녀 덕분. 사가의 신공을 융합하여 새로운 절학을 만들어냈고, 장래의 희망을 천지신맥을 타고난 회주 비무극에게 맡겼었는데.

지금의 홍작은 그 천지신맥을 능가하는 만상조화를 오대마도를 융합하는 데 썼다는 말인가.

그리고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선 녹명.

사흉(四凶)에 의해 이루어진 사황령은 접하는 이의 심성까지 사악하게 하거늘.

경수사에서는 실전된 불가의 무공만 쓰더니, 이번에는 도가와 유가의 절학이었다.

공중을 뒤덮던 고깔은 태상현도기기의 발동이요, 불현듯 심맥에 닥쳐들었던 무형의 기척은 일종의 현음진살(玄陰眞煞)이었고, 하나로 이어붙인 눈보라는 바로 사문위일신공.

그걸 또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에 겹쳐서. 태상현도기기는 침강의 후토승, 현음진살은 동결의 빙천주, 사문위일신공은 역전의 구표선.

사황령으로 굳이 정도의 신공을 쓰는 게 소위 천부신력을 완성하는 첩경이라도 되는 양.

상반되면서 또 묘하게 닮았다.

더욱이 싸우면서 일절 입을 열지 않는 둘.

조금 전까지 서로 민망한 소리를 주고받으며 아웅다웅하던 건 거짓이었나.

뭐에 홀린 것 같지만, 만상조화로 오대마도를 펼치는 홍작과 사황령으로 사가신공을 구사하는 녹명을 홀릴 수법이 세상에 있을는지.

심마령과 심심상인으로 남을 제어하는 이가 남에게 제어 받는다는 사실이 쉬 믿기 어렵다.

하지만,

또다시 달려들려는 홍작과 녹명은,

분명히 백화의 꼭두각시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검을 쥐었다.

백화는 풀어냈다고 봤지만, 자부이진경은 그렇게 간단히 파해할 수 있는 결계가 아니다. 땅에 꽂은 고검에 신왕공을 더한 지유진으로 조금 느슨해졌을 뿐. 그것만으로도 단목정은 충분히 길을 열어 현도관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이 오기 전에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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