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400화 (400/410)

제100장 일부함원(一婦含怨) (4)

“안, 된, 다아아아?”

홍작이 먼저 해원기의 말을 그대로 되새기자,

“하, 하하, 핫하하하하하!”

녹명이 여승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사내처럼 허리를 젖히고 웃어댔다.

둘 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

그러나,

“정말 같잖아서. 소공자는 대체…… 녹명, 좀 조용히 해! 시끄러워서 말을 할 수가 없잖아!”

“하하하, 하앙? 네까짓 게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야? 쥐새끼처럼 숨어서 앙큼한 짓거리만 했던 주제에.”

“뭐? 쥐새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돌대가리가 감히.”

“돌대가리라니. 내가 설마 몰랐을까? 동창은 내가 이 손으로 만들어 냈다고. 내시들이 까불어대는 것 정도야…….”

“알긴 뭘 알아? 그래서 경수사에서 국사와 느긋하게 구경만 하셨다? 그게 말이 되냐? 그저 신력(神力)이란 걸 손에 넣을 욕심만 가득해서.”

“뭐야!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릴 셈이냐?”

일단 입을 열자 당장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홍작이 코가 떨어져라 냉소를 쳤다.

“흥! 동창을 네가 만들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구나. 그런 대단한 분이 어째 제독태감이 내 괴뢰인 걸 몰랐을까? 아니, 이십사아문이 언제부터 동창에서 벗어났는지는 아시나? 어마감 쪽을 끼어들게 해서 동창을 엿보면 그걸로 충분할 줄 알았어? 그리고 상보감을 이용해 태후궁을 움직였다? 나 참, 네 머리로는 불가능한.”

“이게 무슨 헛소리야? 제독태감의 동창과 어마감 쪽의 이십사아문은 각각 맡은 일이 다르니까 당연히……. 너, 나 보고 자꾸 머리가 어쩌고 하는데, 강호와 대내를 동시에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나 알고서…… 잠깐! 뭐라고 했지, 상보감?”

비아냥거림에 녹명이 당장 성질을 부리려다 갑자기 목소리를 뒤집었고,

그 이상한 기색에 홍작도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네가 나를 붙잡아 두려고 대영반까지 동원했잖아. 상보감이 이제는 제독동창이 아니라 제독서창이라고 뻐기던데?”

“칠성검 서문창이 왜…… 제독서창은 또 무슨……. 궁중에서 갑자기 상덕공주가 실종된 일로 이십사아문을 전부 소집해서 연관된 조정 대신을 조사하도록, 그 이후에 필요한 감찰을 실행할 것을 논의하는 자리라고.”

녹명의 뒤집혔던 목소리가 확 가라앉으면서 머리에 쓴 고깔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훤히 드러나는 이마에 몇 개나 잡힌 주름.

그 주름을 보는 홍작도 미간이 일그러졌다.

녹명을 좀 더 놀려줄 생각이었으나 어째 얘기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돌대가리에 욕심쟁이.

제 딴에는 동창과 대내를 자기 노리개쯤으로 여겼겠지. 그래도 진짜 원하는 건 힘, 노리개는 필경 노리개, 진짜 힘을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심심상인의 비결도 극히 소수에게만 썼다.

노리개 따위를 믿지 않으니까.

이십사아문이 암투를 벌이든 말든, 동창이 역모를 꿈꾸든 말든 녹명이 노린 건 하나.

동창과 이십사아문이 갈수록 강해져도 그 결과에만 집중했지 경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황궁이 소장한 전설의 무공, 과거의 난세에서 유출된 실전 절학, 벽세가 녹판으로 찾아낸 사황령과 지부가 남겨 놓은 오대마도의 흔적.

조금씩 조금씩 원하는 걸 넘겨주면 거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굳이 그 눈을 속이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이.

몇 년간 그 멍청한 꼬락서니를 확인한 후에는 느긋하게 대내에 자리를 잡았고,

하고 싶은 실험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어마감 쪽이 국사를 따라 딴마음을 먹고, 상보감이 태후궁에 빌붙어 어떻게든 버티려고 해도 그 정도는 예상했던 바.

겉으로 내심을 드러내기엔 동창이 두려웠을 테고, 기껏 좀도둑처럼 성과를 엿보고 훔칠 궁리에 골몰하는 것들.

오히려 녹명의 주의를 돌리는 역할로 적당했다.

뒤집어 말하면 녹명이 뭘 생각하고 뭘 노리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던 녹명이 국사를 통해 상보감과 손을 잡고 동창을 옭아매는 계책을 꾸밀 줄이야.

물론 녹명 스스로 생각해 냈을 리 없고, 국사의 도움을 받았겠지.

그래도 돌대가리에게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녹명은 황궁에서 일어난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니.

더구나.

홍작이 급히 소매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도대체 열쇠도 없이 어떻게 지하 비고를 열려고…… 으음?”

거래를 통해 해원기에게서 입수한 열쇠.

슬금슬금 밀려드는 불길한 느낌에 앞뒤 따질 겨를 없이 귀한 열쇠를 꺼내 흔들다가,

시선이 녹명과 그 옆에 선 제갈봉을 번갈아 본다.

자신이 만상조화를 완성하기 위해 대조주가의 후손인 주교화를 거둔 것처럼, 녹명도 심심상인으로 제갈봉을 그 화신으로 삼은 이유가 있을 터.

이제까지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흔들던 열쇠를 와락 움켜쥐면서 중얼거리는 입술.

“천공(天工)과 신기(神機), 그리고 역형대법.”

작은 음성이지만, 녹명이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고깔을 고쳐 쓴다.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더니 그 잘난 머리가 이제야 돌아가나? 넌 항상 나를 무시했지. 그래도 사가(謝家)의 정수가 나에게 전해졌단 걸 부인할 순 없을걸. 게다가 제갈 소저 덕에 지하 비고가 언제 열렸고 어떻게 닫혔는지 다 알게 되었거든. 그따위 열쇠, 한번 보기만 해도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고. 아니, 넌 정말로 노야가 열쇠로 지하 비고를 열게 했을 거라 여기는 거야? 한심하긴.”

대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의심이 들긴 했어도.

잘난 척하는 홍작을 공박할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다.

대뜸 쏘아붙일 것 같던 홍작.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입을 꼭 다물었고 눈이 바쁘게 녹명 뒤의 현도관을 훑더니.

“열었니?”

뾰족해진 입술이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열쇠를 왜 얻었던가. 오소민을 해원기와 헤어지게 만든 게 비록 공심지계의 효과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나, 지하 비고에 대한 미련도 없지 않았다.

자부십이경 열두 개가 완전히 갖추어진 광경을 본 건 딱 한 번.

노야가 대황실을 보경실로 바꾸어 그 안에 안치했을 때뿐이었다.

비록 거울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 보경실에 남은 흔적은 참으로 귀중한 단서. 평범한 이와 달리 홍작과 녹명은 모두 천공사가(天工謝家)의 사람이잖나.

천공사가는 세상의 온갖 희귀한 보물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재주를 지녔다.

모조(模造)란 또한 복원(復原).

그 재주를 가장 많이 배운 게 바로 녹명이었고. 현도관 주위에 설치한 자부이진경을 유지하고 관리한 사람도 그녀였다.

열쇠도 없이 자부이진경을 발동한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녹명의 말대로 노야는 열쇠로 여닫는 단순한 형태를 극히 싫어했었다. 특별한 대황실을 제외하곤 어떤 곳에도 자물쇠를 채운 적이 없을 정도로.

강유행이 지하 비고로 숨었을 때 아무런 방법이 없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잖은가.

제갈봉은 신기제갈의 후대. 산학(算學)으로 이치를 따지는 데 뛰어나고, 또 역형대법으로 강유행이 될 수도 있다.

녹명이 느지막이 모습을 보였던 게 설마.

녹명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린다.

“소공자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였군요. 이게 다 노야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이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강 사부를 보호하려고, 그 열쇠를 맡긴 게 바로 저 녹명이잖아요. 그만큼 저를 믿었으니까. 다만 그 열쇠가 무슨 용도인지는 미리 일러주지 않으셔서. 제가 어찌 강 사부를 해치겠어요? 흐음, 소공자가 선선히 홍작에게 넘겨준 건 역시 쓸모없는 열쇠라는 거겠죠? 에휴, 참 어지간히.”

못난 동생이 안타까운 언니의 변명처럼.

여승의 자태를 회복해서 다소곳하게 말을 건네다가 한숨까지 짓는데.

그 눈에 들어온 건 굳은 얼굴로 공중만 쳐다보는 해원기의 모습.

홍작과 녹명이 등장해 한바탕 말싸움을 펼쳤던 꼴 사나운 장면을 외면이라도 하듯이.

녹명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홍작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아직 못 열었구먼. 소공자에게 확인이라도 받으려고? 어지간히는 노야가 아니라 헛수고만 하는 너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녹명이 열쇠가 진짜 필요한지 아닌지 떠봤다는 소리.

누구라도 금방 알아들을 유치한 수작이었지만, 홍작은 이번에 ‘돌대가리’라고 놀리지 않았고,

도리어 바로 웃음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노야가 너에게 맡긴 열쇠로 네가 따로 시험해 보지 않았을 리 없고, 전혀 열릴 기미가 없으니까 다시 강 사부를 기다렸을 테고. 그런데 지금 또 열쇠가 나와서 내 손에 들어왔으니. 똑같은 농간일 수가 있거든. 깜빡했었네, 노야가 어떤 사람인지, 그 노친네가 얼마나 괴팍했는지.”

바뀐 말투.

자신의 속내가 바로 탄로 난 녹명도 찡그린 표정으로 홍작을 향했다.

영악한 홍작이야 단번에 열쇠에 대한 의심을 품지만, 자신은 얼마나 오래 희롱당했던가.

현도관에 큰 화가 닥치면 강유행에게 열쇠를 건네라는 노야의 마지막 명령. 그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지 알 도리가 없어서 강유행 몰래 현도관을 몇 번이나 찾았었다.

그런데 강유행에게 건네주자마자 그걸로 지하 비고에 들어 건드릴 수가 없었으니. 열쇠를 보관하는 동안 따로 만들어 둔 똑같은 모조품을 제갈봉에게 들려 보낸 것도 헛일이었다.

지금 홍작이 손에 쥔 게 과연 진짜 지하 비고의 열쇠일지.

괴팍한 노친네란 말에 동감을 느낄 수밖에.

빠르게 이어지는 홍작의 말에 눈썹이 절로 움직인다.

“혹시 말이야, 진짜 열쇠란 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그런 게 아닐까? 뭐, 강 사부는 일개 평범한 서생, 물려받은 것도 단지 감식과 진품의 보관 정도잖아. 지하 비고를 마음대로 개조할 재주는 애초에 지니지 못했지. 심지어 자부이진경을 발동할 줄도 모르는. 그런데…….”

일부러 말을 끄는 듯.

그러면서도 해원기를 향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녹명이 조금씩 시선을 해원기 쪽으로 바꾸면서,

자신도 모르게 홍작의 말을 잇기 시작했다.

“소공자가 경사에 이른 후에 몇 번이나 현도관이 잠겼었어. 또 강 사부가 모습을 감춘 후에도 소공자는 이곳에 계속 돌아왔지.”

“맞아. 경사에 아는 곳도 없는 소공자가 어디에 강 사부를 피신시켰을까. 우리 다정하신 소공자가 강 사부를 아무 데나 내팽개쳤을 리 없는데. 그리고 너도 눈치챘을 거야, 경사에 온 후로 소공자의 능력이 어쩐지 갑작스럽게 높아진 것 같거든. 그게 가능하려면…….”

“노야의 안배. 역시 열쇠는 바로.”

“소공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놔두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한 셈이지.”

주고받고, 주고받고.

그간의 사정을 서로 자세히 밝히지도 않은 두 여자가 마치 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뚝 끊기고.

해원기를 향한 홍작과 녹명의 시선이 불이라도 붙인 듯 이글거린다.

그건 탐욕.

지하 비고의 열쇠가 바로 해원기라고 똑같이 생각한 거다.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거리를 벌려 정면을 차단하는 바람에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지만,

주인의 뜻이 통했는지 본래 한편이었던 것처럼 해원기만 노리고,

장내에 살기가 해일처럼 일어났다.

해원기가 비로소 얼굴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러고도 뭔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면서,

“이제야 손을 쓰려느냐? 한참 기다렸다.”

담담한 목소리. 그러나 아직 팔짱은 풀지 않았고,

“너희 둘이 이렇게 변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걸까, 아니면. 흐음, 먼저 좀 물어보자꾸나.”

요지부동의 자세로 홍작과 녹명을 번갈아 본다.

공간을 순식간에 채우는 살기를 무시한 채.

“신주에서 유출된 사가의 절학, 벽세가 녹판에서 구한 사황령, 지부가 남긴 오대마도의 편린. 그리고 금오혈석에서 발견한 육악지력. 그런데도 기어이 자부십이경을, 그 남은 흔적이라도 탐내는 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서냐?”

어쩐지 뜬금없는 질문이라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몰라서 묻나. 아니면 이렇게 정리해서 따로 확인할 것이 있나.

말을 잇는 해원기의 표정이 슬쩍 변했다.

“십이음형사에게 자부십이경의 흔적이 보이던데, 그들은 너희의 노리개가 아니었나? 사일신력을 구한다고 해도 여전히 억지스러워 보이고. 그렇게나 힘에 집착했다면 어째서 한 가지는 전혀 도외시하는 건지.”

궁금해서 좁아지는 미간.

홍작과 녹명이 살기를 누르지 않고 짤막하게 반응하는데,

“십이음형사가 여기서 왜 나와?”

“뭘 도외시했다는 거지?”

해원기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천외지력(天外之力).”

한 마디.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시간이 멈춘 듯, 장내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홍작도 녹명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거느린 수하들도 목석으로 화해 그 자리에 못 박히고.

이게 무슨 변고인가.

그리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차분히 울리는 여자 목소리.

“다시 봐야겠네요, 소공자. 자부와 천외를 그렇게 엮어 낼 수 있을 줄은. 아, 물론 천외지력을 도외시하진 않았지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건만. 대체 누가 말했는지.

그러나 해원기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기울였던 머리를 세우며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듯 한숨을 내쉬고,

“후우, 홍작과 녹명까지 노리개로 삼았느냐, 백화?”

누구의 목소리인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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