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장 일부함원(一婦含怨) (3)
잠깐의 정적, 제갈봉이 되돌아가려던 현도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낮게 외쳤다.
“사극포설(四極布設).”
사정사신 열여섯이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현도관 앞으로 물러나서,
이제 뜰 가운데 선 사람은 해원기 혼자뿐.
여전히 바닥에 꽂은 고검을 지팡이처럼 짚고서 슬쩍 고개를 돌린다.
“생각보다 늦었군.”
딱히 누구를 보며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이런 상황이 되리란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덤덤한 혼잣말.
무너진 대문 근처를 막 넘어서던 조화부인의 시선이 움직이지만,
현도관 안에서 녹명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화숙인,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렇다면…”
“아유, 이제 알아보는 거야? 저 제갈세가의 계집이 익힌 역형대법이면 전부 속아 넘어갈 줄 알았지? 하여간 넌 지나치게 단순한 게 문제라니까. 심심상인으로 지금까지 저 계집을 믿은 것도 그렇고.”
녹명의 목소리가 끊기고, 제갈봉의 얼굴이 굳어지고.
조화부인, 즉 홍작의 심마령은 그 반응이 즐거운지 더욱 경쾌하게 말을 이어간다.
“국사를 손에 넣었다고 아주 마음을 턱 놓더구나. 동창을 비롯한 대내 전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뭐, 동창 따위는 단지 네가 금오혈석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실험장 정도였겠지. 녹판에 깃들었던 힘을 얻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으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는데 말이야. 흐흥.”
조롱의 코웃음에 제갈봉이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헛소리는 나중에 얼마든지 들어주마. 그보다 네가 뭐 때문에 여기 나타난 거지? 아니,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느냐?”
말투도 표정도 녹명이 아닌 제갈봉.
조화부인이 홍작의 심마령인 걸 알고서도 그 출현의 배경을 먼저 따져 묻는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그 물음에 조화부인의 얼굴 위로 얼핏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스치고,
“흐음.”
눈을 깜빡거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역시 네년이 수상해. 오면서 아무리 따져봐도 저 머리 나쁜 녹명이 이런 재주를 부렸을 리 없거든. 게다가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중얼거림을 끝맺지 않고 한 손을 번쩍 쳐들었다.
“쳐랏!”
뜬금없는 명령.
그러나 수신호를 기다렸던 것처럼 사방에서 십여 개의 인영이 유성처럼 현도관으로 덮쳐들었다.
현도관 앞으로 물러난 사정사신도 마찬가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일제히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기묘하게 서로 위치를 바꾸면서.
퍼펑, 퍼펑.
지붕 곳곳에서 폭음이 터지고,
양쪽으로 나뉘어 떨어지는 두 무리.
제갈봉의 앞에 둥글게 모인 사정사신 열여섯과 조화부인 앞에 두 줄로 늘어선 열둘이다.
“흐흥, 사극포설이 뭔가 했더니 건천사극(乾天四極)의 순환무궁(循環無窮)을 용케 자부이진경 안에 끼워넣었.”
“흥, 기껏해야 육악육신(六惡六神)의 정반음양(正反陰陽), 결국은 그 수준일 거라고 진즉부터 예상했었.”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여는 통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더구나 서로를 비웃으려던 말이 뒤섞이다가 뚝 끊긴다.
두 여자가 눈을 치켜뜨고 매서운 시선이 향하는 곳.
어느새 뒤로 훌쩍 물러선 해원기를 찾았다.
현도관의 좁은 뜰 가운데에 고검을 땅에 꽂고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분명히 육악육신의 열둘이 사정사신의 열여섯과 격돌하기 직전까지.
조화부인은 홍작의 심마령, 현도관 문에 버티고 선 제갈봉은 녹명과 심령을 공유하는 상태.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해원기는 묵묵히 듣기만.
아무리 놀랍고 의심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해원기를 잊었을 리 있나.
조화부인도, 제갈봉도 서로 상대를 경계하는 와중에 계속 의식하고 있었거늘.
언제 뒤로 물러섰는지 모르겠다.
해원기는 여전히 검을 짚은 채,
구경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비로소 사정사신과 육악육신을 번갈아 살펴보는 모습.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가신공을 하나씩 뒤섞어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이치로 이어가면 강상을 구현하지 못하는 이상 뚫을 수가 없겠구나.”
“육악지력을 여자에게, 그 힘을 뒤집는 육신지공을 남자에게라. 그 보기 민망한 전신갑(全身甲)을 뒤집어쓴 건 이런 상황을 상정해서일까. 흐음.”
양쪽에 평가를 해주니.
조화부인과 제갈봉의 치켜떴던 눈매가 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일그러졌다.
여기서 이런 평가라니. 구경 값은 치르겠다는 건가.
해원기의 언행이 영 거슬리면서, 아울러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건천사극의 순환무궁, 육악육신의 정반음양.
서로가 상대를 비웃으려고 떠들었던 비결은 그저 명칭을 듣는다고 금세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정사신으로 같은 신공을 익힌 네 명씩 네 조였던 열여섯이 유불도속(儒佛道俗)으로 골고루 섞이는 건천사극의 진형은 원형이정의 흐름이 핵심.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한 정파의 신공이 끝없이 서로 이어지므로, 응기성강에 이르렀다 해도 강기무공의 수준으로는 절대 깰 수가 없다.
또한, 동창의 번역들처럼 검은색 경장을 차려입은 열둘은 남녀가 각각 여섯. 그 경장 안에는 여섯 가지 색깔의 괴이한 연갑을 입었다.
이전에 사륙변려의 무채상변이니 뭐니 잘난 척을 했던 조화부인이 이번에는 육악지력을 지닌 여자 여섯과 육신지공을 익힌 남자 여섯을 내세웠고,
그 힘이 음양으로 작용해 마치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신체라도 된 양 그대로 사정사신을 들이받았다.
첫 격돌은 거의 평수(平手). 그러나 승패보다 두 무리가 거리낌 없이 치고받는 박투(搏鬪)에 유의했었나.
자부이진경에서는 계역과 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해원기는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언제 어떻게 위치를 바꾸었는지 혼자만 뒤로 물러나 구경을 즐기고선.
홍작과 녹명이 얼굴을 내밀진 않았으나, 조화부인과 제갈봉도 그냥 허수아비는 아니다.
조화부인이 육악육신 뒤에서 머리를 조금 내밀었다.
“녹명, 혼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붙잡고 기쓰는 건 그만하지. 자부이진경을 발동한 지도 꽤 된 듯한데.”
표정이 납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입술만 오물거리고, 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스산한 음성.
제갈봉 역시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찬다.
“칫, 해 소제답지 않아서. 흐으음, 홍작, 그러는 너나 그 고약한 짓거리부터 거두는 게 어때?”
납덩이처럼 딱딱해진 조화부인의 표정, 짧게 혀를 찬 후에 갑자기 목소리가 바뀐 제갈봉.
심마령과 심심상인이 강화되어 홍작과 녹명이 직접 서로를 부르는 것이다.
조화부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해원기를 보다가 눈을 감고,
그 뒤에 흐릿한 그림자가 어리기 시작하자,
제갈봉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문에서 벗어난다.
끼익.
현도관의 낡은 문이 활짝 열리면서 승복에 고깔을 쓴 녹명이 나서는 동시에, 요술처럼 흐릿한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화려한 차림새의 홍작.
조화부인과 제갈봉이 자세를 가다듬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마침내 서로 대면하게 된 둘이지만, 제대로 상대를 확인할 새도 없이 급히 돌아가는 고개.
둘이 나타나자마자,
치이잉.
청아한 검명이 길게 울어대기에.
아울러,
드드드드드.
거친 진동이 발밑에 전해진다.
홍작과 녹명의 시선 속에 멀찍이 물러났던 해원기가 팔짱을 끼는 모습과 그 앞에 수직으로 꽂힌 한 줄기 기이한 광채가 들어왔다.
바닥에 꽂은 고검이 홀로 울며 빛을 뿜어서 지면이 이렇게 흔들리나.
그러나,
해원기가 팔짱을 완전히 끼는 순간,
검명과 진동이 씻은 듯 사라지니.
홍작의 두 눈에 이채가 스치고, 녹명의 고깔이 의아함을 억지로 감추었다.
둘 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해원기가 홍작과 녹명을 차례대로 보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처음에 동창의 배후는 국사라고 생각했었다. 연왕을 제위로 올린 도연의 후계자 묘능이니 눈엣가시 같은 강호를 교묘하게 제압할 머리를 썼을 터. 그래서 사일신화에 나오는 아홉 개의 돌멩이를 아직 안정되지 않은 강호에 던져서 혼란을 부추겼다고. 그런데 아홉 개나 던진 것치곤 파문이 거의 없었지.”
강호는 강과 호수. 거기에 커다란 돌멩이 아홉 개, 그것도 신화와 연관된 비밀을 간직한 막대한 무게를 지닌 돌멩이를 던졌으니.
풍랑이 일고 홍수가 범람하며 진흙탕 범벅이 되어야 했다.
“나같이 어리숙하고 서툰 사람이라도 황하의 피해를 몇 년간 미리 살펴서인지 차츰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여기에서 헤매고 저기에서 기웃거리고, 돌고 돌아 겨우 다다른 곳이 여기 현도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호중객잔에서 머물다 우연히 휘말린 사건. 금오혈석의 하나를 얻었고, 황장촌의 화전민들이 무고하게 해를 입은 일에 분노해서 무림에 뛰어든 게 시작이었다. 흉수를 찾고 그 배후를 밝혀 책임을 묻겠다고.
그리곤 현재.
해원기가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공중의 한 점을 응시한다.
“그러나 국사의 뒤에 또 누가 있었고, 동창의 우두머리도 한낱 괴뢰에 불과해서. 저 구중궁궐이 어떤 곳인지 전혀 관심 없는 나라도 황실과 조정은 유명무실하고 소위 대내라는 세상이 어지럽기 그지없다는 걸 알겠더구나. 뭐, 일개 무부가 감히 입에 올릴 얘기는 아니지. 그러나 그 혼란이 강호로 퍼지는 건.”
번쩍.
두 눈에서 벼락 치듯 쏟아지는 엄청난 신광과,
“안, 된, 다.”
뚝뚝 끊겨 나오는 단호한 음성.
각자의 화신을 물리고 비로소 대면한 홍작과 녹명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해원기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겨우 몇 달이었다. 고죽의 후계자가 될 아이가 머물렀던 기간은.
재주라곤 매를 길들여서 부리는 것밖에 없는 이족의 하찮은 아이였다. 나이답지 않게 말수가 적었던 건 한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였고, 글자조차 제대로 떼지 못해서 따로 글 선생을 둬야 했었다.
천하제일검의 제자랍시고 알뜰히 보살펴주는 이들이 우습게 보였다.
고죽에 어울리는 주인이 될 재목이라고 처음부터 애지중지하는 노야도 영 미덥지 않았다.
평범하잖아.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것도 아니요, 비상한 재지를 지니지도 못했다.
고심막측한 무공을 닦기엔 이미 늦은 나이. 체질이야 영약과 대법으로 바꾼다 해도 우둔한 머리로 어찌 이해할까.
차분하고 순진한 애늙은이가 어른들 눈에야 좋게 보이겠지.
그저 그것뿐이다.
천하제일검이니 백년제일검사니 떠들어도 제자를 보는 안목은 없구나. 뭐, 고검협도 천살을 타고 나지 않았다면 별 특별할 게 없었을 거야.
나이를 잊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산 노야 역시 슬슬 노망이 드는 건지. 하긴, 명조운류로 벽세를 구상할 때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소공자’는 무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신물(神物)은커녕 보물(寶物)도 될 수 없는,
별 볼 일 없는 범물(凡物)에 불과했다.
세월이 흐른다고 바탕이 달라질 리 있나.
절세검왕이라는 소문이 잠깐 돌았을 때, 허풍으로 겉에 금칠을 올리는구나 싶어 코웃음이 나왔고,
장거리 쾌체라는 일을 하면서 남몰래 황하의 범람을 막으려 애쓴다는 소식에는 애처롭기까지 했었다.
분수에 넘치는 지나친 복은 도리어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었을 테니까.
경사에 오고 나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고, 직접 목격하고 손을 섞은 후에는 상당히 놀랐으나.
고죽의 검이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고, 완성되지 않은 미숙한 경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
천외인협 묵인환도, 고검협 묵세휘도 결국 폐인이 되었잖나.
해원기야 더 말할 게 뭐 있겠어.
그런데 지금 팔짱을 낀 채 눈길도 주지 않는 해원기에게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느낌이 전해지니.
혹시 심마령과 심심상인으로 조화부인과 제갈봉을 다룬 것처럼. 천외인협이나 고검협의 화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