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8화 (398/410)

제100장 일부함원(一婦含怨) (2)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현도관 안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목소리는 분명히 녹명.

그런데 강유행으로 분장한 제갈봉이 본모습을 찾자마자 그녀에게서 또 녹명의 기척이 느껴지니.

녹명이 둘일 리 없다.

“절대심인고?”

영혼을 빙의시켜 그 심성까지 장악하는 사악한 고술(蠱術).

제갈봉에게는 오대마도의 흔적이 없으니 당장 떠오르는 건 바로 이 사악한 고술인데.

제갈봉이 소리 내어 웃는다.

“호호호! 기껏 그 생각밖에 못하나? 설마 절대심인고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비웃는 음성이 녹명과 똑같고,

해원기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짧은 탄식을 삼켰다.

“흐음, 절대심인고는 영광종 외에는 근절된 셈이니…… 그래, 심심상인(心心相印)이었구나. 하지만 제갈 소저에게 강제로 쓰는 건 이미…….”

“하, 또 삿되다 뭐다 하나 마나 한 소리나 떠들려고? 여보세요, 소공자, 심심상인은 글자 그대로 서로 마음이 딱 맞아야 이루어지는 비결이라고요. 제갈봉에게 억지로 쓴 게 아니라 그녀도 원했다는 뜻이지. 확실히 소공자는 아는 게 별로 없네. 흐흥.”

심심상인은 자부십이경 중의 공능.

과거에 벽세가 세상에 해를 끼쳤던 절대심인고도 심심상인의 비결을 고술에 덧붙여서 만들어졌다.

심심상인을 절대심인고처럼 써서 제갈봉을 강제로 녹명의 화신으로 바꾸었다고 여겼는데.

제갈봉은 되레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지금의 제갈봉은 녹명.

해원기가 입을 닫고 두 발을 살짝 움직였다.

고무래 정자였던 형태가 가지런히 모여 딱 붙자,

스으으으윽.

현도관 뜰에 물결처럼 퍼지는 계역.

그러나 신령검역이 제갈봉의 바로 앞에서 그친다.

현도관 뜰이 얼마나 되나, 기껏해야 사방으로 십여 장 정도.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백 장이라도 덮을 수 있는 신령검역이 겨우 해원기 주위에 머물기만 하다니.

제갈봉이 방금 자신이 나온 문턱으로 조금 물러나고,

“역시 고죽은 그저 검 하나뿐인가요?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는데, 자부이진경(紫府離塵境) 안에서는 어떤 계역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여기가 본래 어디였는지 잊었나? 한심한!”

이번에는 현도관 안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이게 녹명의 목소리다.

현도관 앞에 선 제갈봉도 녹명, 현도관 안에 또 한 명의 녹명.

해원기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녹명이 둘. 현도관을 중심으로 주택구 전체를 덮은 자부이진경이라는 결계.

신령검역도 펼쳐지지 않으니 싸움을 포기하는 건가.

해원기가 사방에 널브러진 소위 사정사신이란 자들을 훑어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나가떨어졌던 열여섯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괜히 사정사신이란 이름을 붙였을 리 없다.

섭선을 든 백의인 넷은 유가의 사문위일신공을, 철장을 든 회의인 넷은 불가의 미륵제세심공을, 장검을 쥔 청의인 넷은 도가의 태상현도기기를, 단창을 쥔 흑의인 넷은 속가의 제왕군림신공을 익혔다.

하나하나의 화후(火候)는 대성지경(大成之境)에 이르지 못했어도 곤룡복마결을 함께 익혀 사가의 신공을 서로 엮어낼 수가 있고,

정파의 공부답게 호신의 공능이 특히 뛰어나다.

그렇다고 해도 해원기의 검을 견디는 건 그만큼 이들의 바탕이 단단하다는 의미.

“흠, 좋은 수하를 두었구나. 이런 자들을 그저 짐꾼으로 부리려고?”

약간 맥이 빠진 듯한 말투에,

현도관 안의 녹명이 또 장탄식을 했다.

“하아! 소공자는 그동안 도대체 뭘 배운 거요? 어렸을 적 여기에 있을 때는 그래도 뭔가 비범한 구석이 있으리라고 여겼거늘. 그리 총명한 편은 아니었어도 성실했었고, 또 노야가 상당히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서…… 아니, 고죽에 가서는 그냥 시간만 보냈나요? 고검협이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하던데. 그래서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었던 건가? 어찌 이리 무능한.”

어지간히 해원기가 한심스러운지 투덜거림이 꽤 길지만,

쿡.

해원기가 고검을 땅바닥에 박는 바람에 말이 끊겼다.

시선을 아예 내리고 인상을 잔뜩 쓴 모습이 녹명의 비난을 더는 듣기 어려운 듯.

고검을 지팡이처럼 손바닥으로 짚으면서 화제를 바꾼다.

“그래, 내가 부족한 것은 맞다만, 너는 여기서 뭘 찾고 또 어떻게 찾을 셈이냐?”

뻔한 질문.

문 앞에 선 제갈봉이 피식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것도 가르쳐 줘야 하나요? 소공자는 설마 자신이 이 현도관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현도관에서 볼 곳이라곤…….”

“지하 비고.”

“그렇죠. 물론 지하 비고에서 보관하는 진품들을 가리키는 건 아니고.”

“대황실.”

“강 사부에게 이름이 바뀌었다고 들었을 텐데요. 이젠 보경실이라고 불러야…….”

“자부십이경은 없다.”

해원기는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아래를 보며 짤막한 말만 툭툭 던져서, 제갈봉이 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바보 취급을 받았다고 심통을 부리는 걸까.

그러나 제갈봉이 입을 닫았다고 대화가 중단되지 않는다. 현도관 안에는 진짜 녹명이 있으니까.

“호오, 강 사부와 벌써 둘러본 모양이죠? 그걸 내가 모를 것 같나요? 자부에서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보물을 노야가 놔두고 떠났을 리가. 하지만, 호호호!”

녹명의 웃음이 급격히 높아지고, 이어지는 말은 또 제갈봉이.

“보경실이 원래 대황실이었다는 걸 잊으면 안되죠. 노야도 실수할 때가 있다니까. 호호호!”

두 여자의 웃음이 뒤섞여 더욱 요란해진다.

해원기가 아니라 ‘노야’를 비웃으면서.

바닥에 꽂은 고검을 살피듯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황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성모봉(聖母峰) 꼭대기처럼 기이한 방.

설사 고수라도 내공을 한껏 운용하지 않고선 채 일각도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공기도 희박하고, 견디기 어려운 압력이 팽배한 공간이라.

그런 곳을 자부십이경이라는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바꾸었다.

그게 노야의 실수라니.

벽면에 남아 있던 열두 개의 흔적.

자부십이경은 이미 사라졌으나 벽면에 박아두었다는 증거였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처음 강유행을 찾았을 때 들었던 얘기.

어쩔 수 없는 화를 맞이하면 녹명에게 열쇠를 찾아 지하 비고에 숨어 구원을 기다리라고.

그 화를 조장한 자가 바로 녹명.

열쇠를 강유행에게 주었고 해원기가 구하러 온 것도 알았다.

그리고도 뜸을 들였다가 이제야 자부이진경을 발동했다는 건.

“대황실에 남은 자국이 필요했나? 지하 비고를 안전히 열 때를 기다렸고?”

해원기의 낮은 목소리에 두 여자가 동시에 웃음을 그친다.

“흐흥, 이제야 소공자도 머리가 돌아가나 보지?”

“그러니까요. 꽤 오래 걸리네요. 그 바람에 사정사신이 거의 회복할 시간을 얻었으니 나쁘진 않고. 훗!”

이번에는 두 명의 녹명이 아니라 대화를 주고받으니.

해원기가 숙였던 머리를 들어 제갈봉을 응시했다.

“제갈 소저.”

심심상인이 서로 마음을 맞춰야 이루어진다고 해도 완전히 녹명이 되진 않았다.

제갈봉은 녹명으로도, 제갈봉으로도 존재하는 듯.

“해 소제, 이렇게 혼자서 뛰어든 건 아마 단목 당주의 지시겠지. 절세검왕이라고 추켜주니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죽을 둥 살 둥. 에휴! 그 착한 성품이 안타깝구먼. 쯧쯧.”

한숨에 혀를 차기까지.

본모습이 드러났다고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따질 필요도 없이, 제갈봉이야말로 해원기를 이용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해원기는 한 번 더 확인해야만 했다.

“가문의 오욕을 씻겠다더니. 결국, 이런 방법이었소?”

“우리 집안이 어떻게 버려졌는지 잘 알잖아. 신기제갈이니 둔갑삼가의 으뜸이니 오만 아부를 떨던 것들이 천외육가가 나타나자마자 헌신짝 버리듯이. 그 오랜 난세 속에서 잘못된 길을 들었던 자가 오직 우리 제갈세가뿐이었나? 그런데도 난세가 끝나고 우리 집안을 기억하는 이 하나 없었어. 아니, 오히려 사마의 무리를 도왔다고 매도당했지. 진짜 삿된 것들은 죄다 구주정문에서 나왔는데 말이야. 신주의 정기? 협의? 웃기는 소리. 무림은 필경 강자존(强者存), 힘이 있어야 대접을 받는 세상이라고.”

기다렸던 질문인지 곧장 나오는 대답.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와르르 쏟아낸다.

해원기의 찌푸린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한(恨).

그녀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한을 이렇게 푼다면 대상도 방법도 크게 잘못되었다.

힘이라는 것 또한 그저 무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잖나.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이를 고치며 계속 바르게 행하려는 의지.

의지가 없고서야 무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당장 제갈봉의 비틀린 생각을 깨우쳐 주고 싶지만,

“소공자, 제갈 소저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의기투합했는지 알겠지요? 옛말에도 있잖아요. 일부함원(一婦含怨)이면…… 호호호!”

일부함원, 오월비상(五月飛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앞의 구절만 읊은 녹명의 웃음에도 한이 담겼다.

원한.

쌓이고 쌓인 원망과 한은 사람을 귀신으로 만든다.

오죽하면 고죽지보인 이제검에 귀왕검이 깃들고, 사부조차 귀왕검에 사역당해 인성을 잃은 적도 있었다니.

그러나 그 한을 푸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해원기다.

폐인이 되다시피 했으면서도 끝내 위령과 진혼으로 귀왕검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부.

해원기에게는 고죽의 숙명을 건네지 않으려고 묵(墨)이라는 성도 내리지 않았었다.

바로 사랑.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소이는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해원기 역시 풀지 못할 원망스러운 심정을 품고도 어떻게든 세상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려 애썼다. 홀로 황하의 범람을 미리 막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마다치 않고.

제갈봉과 녹명은 틀렸다.

한을 품은 이유도, 그 대상도, 푸는 방법도 전부 틀렸다.

일신에 지닌 훌륭한 재주를 어찌 이렇게 쓴단 말인가.

속은 답답하고, 뭔가 말하려고 해도 입은 떨어지지 않고.

제갈봉이 뒷걸음으로 문턱을 넘으며 냉정한 눈으로 머뭇거리는 해원기를 노려보았다.

“해 소제, 사가신공과 곤룡복마결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었지? 이번에는 좀 색다를 거야. 천천히 즐겨보라고.”

얘기가 지나치게 길었다.

사정사신 열여섯은 이미 완전히 회복한 걸 넘어 어쩐지 아까보다 더 강한 기운을 흘리며 앞뜰을 빈틈없이 채우고,

드문드문 내리던 눈이 갑자기 거세진다.

아무리 해원기라도 이렇게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건 어리석은 짓.

제갈봉의 정체가 그렇게 놀라웠을까. 한을 품었다는 소리가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참으로 우둔하다.

그런데.

“어머! 경수사의 신니께서 막무가내로 선수를 치셨네. 그러면 소공자랑 한바탕 진하게 회포를 나누시지 지금까지 도란도란 담소만 나누셨나? 아유, 여기만 왜 눈이 이렇게. 이것도 신기제갈의 솜씨야?”

경쾌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불쑥 전해지자,

포위를 좁히던 사정사신이 움찔 동작을 그치고, 막 현도관 안으로 되돌아가려던 제갈봉의 걸음도 딱 멈추었다.

가장 놀란 이는 녹명.

“홍작?”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현도관 안에서 터져 나왔지만,

해원기만은 찌푸린 얼굴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이제야 왔군. 여기까지는…….”

누구도 그 혼잣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스스스스.

현도관을 둘러싼 높다란 저택들 곳곳에 수십 개의 인영이 환상처럼 드러나고,

무너져 버린 대문으로 조화부인이 수보와 원좌를 양쪽에 거느리고 들어오면서 웃음을 터뜨리니.

“호호호! 겨우 요만큼 끌고 와서 뭘 하려고? 아, 그보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나? 녹명, 너도 참. 하여간 징그러울 정도로 꽉 막혔다니까.”

조화부인의 깔깔거리는 말에도 제갈봉과 녹명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뜸 녹명이라고 부르며 비웃는 소리.

해원기는 이미 보았던 심마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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