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7화 (397/410)

제100장 일부함원(一婦含怨) (1)

또 높다란 담장, 그리고 담장과 담장 사이의 좁은 골목.

그 앞에 선 단목정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톡.

얼굴을 간지럽히는 차가운 기운. 눈송이가 드문드문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두운 밤하늘을 살피다가 해원기에게 시선을 돌린다.

“때마침 눈까지 내리는구나. 정 형제와 악 형제가 오 장로 지인들을 호송한 후에는 경공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

해원기도 손바닥을 펴 눈송이를 받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눈, 상당히 많이 올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형님.”

담담한 음성이지만, 조금 긴장한 표정.

단목정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장 원치 않았던 예측이 맞은 셈이랄까. 음, 우선 규모가 엄청나구나. 현도관을 중심으로 사방의 거대한 저택까지, 이 저택구(邸宅區) 전체가 결계에 덮였다고 봐야겠다. 얼마나 많은 인마를 투입했을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 정도로는 불가능해. 장기간 준비한 결계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게 하는.”

현도관은 본래 왕공귀족의 저택들 한가운데 숨겨진 곳. 저택 하나하나가 다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인데, 이 저택들이 몰린 구역 전체를 결계로 가두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진정 중요한 건 단목정이 맨 처음에 한 말.

가장 원치 않았던 예측.

해원기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고,

“확인해봐야 합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후우.”

무거운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한숨이 매달린다.

무엇일까.

단목정은 그 심정을 아는지, 살짝 고개를 젓다가 바로 표정을 바꾸었고.

해원기 역시 한숨을 도로 삼키면서 몸을 돌리니.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세 사람. 정록, 악송령, 그리고 오소민이 다가오자 해원기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 왜……?”

오소민이 같이 올 줄은 몰랐기에.

정록이 머리를 긁으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폐병방 녹호로에 유모와 춘매 낭자, 아니, 안빈이시지. 두 분을 훼병장이란 양반에게 맡기곤 얼마나 독촉을 해대던지. 에, 그래서 같이 오게 됐네.”

악송령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

“믿을 만한 어른들이었소. 또, 오… 오 소저로선 해 대형을 꼭 보고 싶을 테니까. 으흠.”

오소민이 여장한 걸 처음 봐서 당황했던 모양이다.

호칭을 더듬다가 괜스레 목을 가다듬고, 정록이 피식거리며 악송령이 손에 든 자루를 살짝 건드린다.

“어이, 환도 한 번 봐줬다고 평가가 너무 후한데? 뭐, 보통 솜씨는 아니었지. 좀 괴팍해 보이긴 했어도. 믿을 만하다는 데는 나도 동의.”

녹호로의 위치는 해원기와 오소민 밖에 모른다. 동창을 벗어나 경수사로 간 후에, 악송령과 정록이 오소민을 따라 녹호로까지 호송하는 게 원래의 계획. 춘매와 유모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고 오소민이 남아서 돌볼 줄 알았건만.

“흥, 내가 온 게 불만이야? 이 중에서 처음부터 여정을 같이한 사람이 누구지? 시작한 사람이 끝을 봐야 할 것 아냐.”

척하니 허리에 손을 얹으며 암팡지게 쳐다보는 오소민의 시선에.

해원기가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다셨다.

여자는 무섭다.

그 사실은 진즉 알았다. 환정곡에는 두 분 사모와 금쪽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니까.

백년제일검사인 사부도, 수라와 같이 무서웠다는 교 노인도 꼼짝 못 하고 눈치만 보기 일쑤.

평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햇살처럼 밝은 분위기지만, 어떤 때는 칼바람이 불 듯 매섭고, 또 어떤 때는 폭풍이 몰아치듯 사납고.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다정하다.

겉으론 무관심한 척하면서 사실은 다 알고,

웃는 표정으로 대하는 게 더 무서울 수 있다.

지금의 오소민도 똑같아서.

작별을 고하고 떠났을 때, 영랑각에서 쓸쓸히 말했을 때, 춘매와 유모를 구해 동창을 떠났을 때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총명하고 드센 예전의 그녀로 돌아왔다.

뭐, 그 덕분에 서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쑥스러움은 없어졌고.

단목정이 가벼운 웃음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준다.

“하하, 유시유종(有始有終)이란 말이지. 오 장로는 갚을 빚도 많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결계가 워낙 커서 고민하던 중이라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네.”

또 이렇게 칭찬이 과하면 민망해지는 법.

“에이, 저 하나 더해졌다고 천군만마는 아니죠.”

“그만큼 드세다는 의미 아닐까?”

“이게!”

오소민과 정록이 투덕거리자 해원기의 얼굴도 많이 풀어진다.

확인해야 할 무거운 문제가 남았어도, 이렇게 벗과 함께이니 무엇이 두려울까.

또 오소민이 예전처럼 대하는 게 그저 마음 편할 뿐.

단목정이 빙긋 웃곤 젊은이들을 모았다.

“자, 우선 여기를 보게나. 오 장로의 가세로 나까지 넷이 되었으니 사주개문(四柱開門)을 시도할 수 있지. 그러면 결계를 완전히 파해하진 못해도 원기를 곧장 현도관에 이르게 한다네.”

슥슥.

눈송이로 젖어가는 바닥에 간단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드는 가운데 오소민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이렇게 큰 결계라. 외부와 격리시키는 목적 같은데. 제가 없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아니, 사주개문으로 현도관까지 이를 수 있나요?”

“셋이면 셋으로 문을 여는 방법이 또 있지만, 그래도 네 개의 기둥이 더 튼튼하거든. 그리고 이 커다란 결계에는 이미 손을 써놓았으니까.”

오소민보다 해원기가 의아한 얼굴. 발동하기 전에는 이렇게 광대한 지역을 덮을 줄 몰랐던 결계, 오랜 시간 준비한 것도 방금 알아냈거늘.

언제 손을 써두었다는 건가.

“흠, 연둔과라고 좀 우스운 짓을 했는데, 거기에 간단한 술법을 남겨두었지. 만일을 위해서.”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면서 화호초에게 들었어요. 그렇다면 역시 제갈…….”

“미리 예단할 필요는 없네. 어차피 들어가 보면. 자, 일단 사주개문의 요령부터 익히지.”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끗 보곤 입을 닫았다.

악송령이 해원기의 판과를 본받겠다고 가져온 작은 솥. 그걸 연둔과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현도관 내 신감 아래에 둔 것은 제갈봉의 진짜 의도를 밝히기 위한 책략이었다.

조화부인의 뒤에 홍작이 있었던 것처럼, 제갈봉이 배후가 누구인지 의심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결계. 아무리 제갈봉이 신기제갈의 후예라도 그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소민이 황궁을 벗어난 후, 해원기는 과연 어떤 일을 겪었고 조화부인과 홍작을 어떻게 했을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그녀를 위해 현도관에서 얻은 열쇠를 홍작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했잖나.

이 결계 안에 누가 더 있을지 모른다.

“입주(立柱)! 개문(開門)!”

단목정의 호령에 따라 골목 어귀에 나누어 선 오소민과 정록이 동시에 양쪽 담장을 향해 공력을 가하고, 뒤이어 단목정과 악송령이 골목을 향해 손을 떨치자.

우웅.

낮은 소음과 함께 공간이 일렁거렸다.

사주개문은 결계를 억지로 비틀어 들어갈 문을 만드는 것.

미리 정한대로 신왕공을 끌어올린 해원기가 차례로 네 사람을 본 후에 곧장 일렁거리는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골목에 들어간 얼마 후에는 동서남북을 분간하지도 못한 채 도로 밀려나겠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골목 그대로.

검왕법신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구름을 밟는 듯한 걸음으로 골목을 미끄러져 나아갔다.

손끝에 어린 삼매마려의 기운.

단목정이 말한 대로 연둔과에 남겨놓은 것은 간단한 연환쇄(連環鎖)의 술법. 그래도 괜히 연둔과라고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서, 솥을 가공한 해원기의 삼매마려에는 바로 반응해서 마치 둔점처럼 작용한다.

사슬이 이어져 잡아당기듯, 해원기의 신형이 채 일 각도 안 걸려 현도관에 다다랐고,

그 낡은 대문을 밀어젖히려는 순간,

쉬쉬쉬쉭.

무서운 기세가 전신을 꿰뚫으려고 쏟아졌다.

그러나 해원기의 발이 슬쩍 엇갈리며 춤추듯 쏟아지는 기세를 피해 간다.

운보가 당연히 입무와 어울리고,

양손의 검왕수가 거침없이 팔방으로 뻗었다.

솨아아아.

딱히 형태를 의식하지 않아도 검왕오형이 모두 담겼고, 거센 바람이 공간을 뒤덮으며 거꾸로 기세를 쫓아가서.

파파파팡!

연달아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 현도관의 낡은 대문이 박살이 나서 날아갔다.

단창을 든 네 명의 흑의인이 뜰 안쪽까지 밀려나서 겨우 다시 자세를 잡는데.

파라락.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밀려드는 엄청난 압력.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미처 위를 쳐다볼 새도 없다.

해원기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으려다가 돌연 제자리에서 풍차처럼 맴돌았다.

차앙.

고검이 절로 뽑혀 마찬가지로 회전하고,

검왕수가 좌우를 번갈아 무찌른다.

퍼엉!

“으읏.”

옆의 저택 지붕에서 덮쳐오던 백의인 넷이 거꾸로 뒤집혀 중심을 잡느라 당황하고,

“허억.”

골목 안쪽과 담장에서 숨 막히는 소리를 내는 회의인 넷과 청의인 넷.

해원기가 회전하는 고검을 머리 위에 둔 채 훌쩍 현도관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에 갇히는 게 싫어서였나. 그러나 공간이 넉넉해지면 공격하는 자에게도 유리한 법.

단창을 든 흑의인 넷, 섭선을 쥔 백의인 넷, 철장(鐵杖)을 세우는 회의인 넷, 장검을 겨누는 청의인 넷.

“이얏!”

열여섯 명이 마치 한 사람처럼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단창 네 자루가 하나의 거대한 화살처럼 꽂혀 오고, 섭선과 손바닥이 엇갈리며 또 산이 무너지는 듯한 경력, 철장은 서로 교차하며 웅후한 힘을 퍼뜨리는데, 장검 넷은 있는 듯 없는 듯 부드러운 호선만 드린다.

전혀 다른 공력과 속도지만, 또 서로 간섭이 아니라 은근히 조화를 이루어.

공간이 일순 굳어지는 느낌.

해원기도 사지가 누군가에게 붙들린 것처럼 움찔했다.

고수의 싸움은 눈 깜빡하는 순간의 실수가 승패를 가르는 법. 열여섯 명의 공격이 지척에 이른다.

그러나 구름은 그 형상이 수시로 바뀌고, 바람은 가만히 머물지 않는다.

더구나 검.

해원기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던 검이 수십 수백으로 변해 소나기가 되었다.

콰콰콰콰.

“으아악.”

“컥.”

“끄윽.”

환상 같았던 검의 폭우는 내리기 무섭게 그쳤고, 대신에 비명과 신음이 회오리치면서 열여섯 명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회오리바람이 잦아들면서 해원기의 모습이 드러나니,

위로 세운 오른손 위에 살짝 얹힌 고검, 가슴 앞에 눕힌 왼손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정(丁)자를 이룬 두 발아래엔 자욱하게 안개가 인다.

번뜩이는 신광이 현도관을 향하면서 낮게 깔리는 목소리.

“사가신공(四家神功)이든 곤룡복마결(困龍伏魔結)이든 내게는 소용이 없다. 그 정도는 알 텐데?”

열여섯 명이 어떤 공력으로 어떤 조화를 이루었는지 전부 간파했다는 뜻.

녹명이든 홍작이든 해원기의 내력을 자세히 파악했다면 신주영웅회나 천지보록에서 유출된 공부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달칵.

해원기의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현도관의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오는 인물.

놀랍게도 그 인물은 피폐한 모습의 강유행이다.

해원기의 미간이 깊게 파이고 낮게 깔리던 목소리가 매섭게 올라간다.

“이제 와서 이런 장난은 그만하지. 녹명!”

강유행이 멈칫 걸음을 멈추고,

현도관 안에서 차가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지하비고를 열 때 써먹어야 할 사정사신(四正四神)을 망가뜨렸으니 나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죠. 용케 강 사부를 빼돌리셨던데, 오히려 그 바람에 강 사부가 필요치 않다는 걸 알려줬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연둔과? 신감 밑의 열쇠 구멍? 소공자는 내가 누구고 저 애를 왜 강 사부로 분장시켰는지 하나도 모르는군. 호호호호.”

과연 녹명의 음성이고,

그 차가운 웃음이 들리자 강유행도 괴상한 미소를 보내며 전신을 뒤흔드니.

삽시간에 변하는 모습은 바로 제갈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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