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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396화 (396/410)

제99장 삼색비보(三色非寶) (4)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갑작스럽게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 뭔가 덮였던 장막이 일시에 걷힌 듯 한꺼번에 전해져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경수사에서부터 영랑각, 그리고 이곳 창붕당 앞까지. 조금 전만 해도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웠었는데.

물놀이로 막혔던 귀가 뻥 뚫린 것 같다.

그건 바로 육심마령 중 녹색의 여자가 쓰러진 직후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라 시선이 호통을 친 사람을 금방 찾아냈다.

금실로 수놓은 비어복에 높다란 모자를 쓰고, 예리한 보검을 비껴든 위맹한 인상의 인물.

칠성검 서문창이다.

그의 좌우로 늘어선 자들도 비슷한 차림새, 수가 백이 넘어 담장 위를 가득 채웠고.

아래를 훑어본 서문창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사례태감(司禮太監)은 어이해 어명을 거스르고 이곳에 있는 것이지? 그리고 선랑(仙娘)은 왜 무령산을 떠났는가?”

제독태감을 사례태감이라는 본래의 직명으로 부르면서, 홍작에게도 따지듯 묻는 말투.

이미 제독태감과 홍작이 있는 걸 알고 왔음이다.

분명히 해원기을 알아봤을 텐데 눈길도 주지 않는다.

공령만상의 호령에 기겁해서 수보와 원좌를 이끌고 창붕당 앞으로 피했던 제독태감이 크게 당황한 모습으로,

“에, 에, 대영반이 왜? 어, 어명이라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자,

홍작이 잠깐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서문 대인, 오랜만이네요. 안빈께서 심신이 불편하시다는 전갈을 받아서 동창의 도움으로 급히 입궁했지요. 그것보다 서문 대인이 이렇게 친히 동창에 오신 게 더 희한한 일 아닐까?”

안색과 음성이 그새 우아하게 바뀌어 태연하게 되묻는다.

서문창이 그런 홍작을 내려다보다가 냉소를 머금고,

“흐흥, 역시 속을 알기 어려운 요물이로군. 두말할 것 없지, 사례태감과 작약선랑은 당장 황극전으로 대령하라는 어명이 있으셨소. 호명하지 않은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목소리를 착 깔면서 손을 가볍게 떨쳤다.

치링.

맑은 검명과 함께 성광(星光)을 뿌리는 보검.

동시에 담장 위의 백여 명이 가볍게 뛰어내려 창붕당과 연무장을 둘러싸는데,

착지하는 소리도 거의 내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 상당한 수준이다.

녹색 옷을 제외한 육심마령의 나머지 다섯이 이에 놀랐는지 차례로 풀썩 주저앉아 맥을 못 추고.

금오장과 구대금오 역시 홍작 근처로 바짝 모여들었다.

홍작은 고개를 쳐들어 서문창을 보는 자세 그대로.

“어머, 이 무슨 일이실까, 평소 같으면 어린 환관으로 부르셨을 텐데. 동창의 제독을 금의위 대영반을 시켜 부르신다? 아, 그러고 보니 어째 사례태감이라 하시지요? 제독태감이 모르는 어명이란 건, 흐음.”

살짝 갸웃거리는 머리. 의심스럽다는 표현이다.

하긴.

당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동창의 본거지다. 아무리 대내제일고수라고 해도 금의위의 대영반이 동창의 제독태감도 모르는 어명을 들먹이다니.

더구나 ‘사례태감’이라. 사례감이 하는 일이 바로 비답주장(批答奏章)과 전선유지(傳宣諭旨). 소위 ‘황제의 입’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사례감의 태감이거늘.

어명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황제의 비빈에게 빌붙어 기도와 제사나 맡는 도관의 일개 여도사가 아예 제독태감을 제치고 나선 꼴이지만,

서문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황상께서 이미 사례감의 직무를 정지시키셨지. 이십사아문을 전부 소집하시면서. 물론 본관 정도가 어찌 직접 어지(御旨)를 받았겠나. 혹여 어명을 행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도우라 하셨으니, 자, 믿기 어려우면 직접 여쭙도록. 조공공.”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는 곳.

연무장 쪽을 둘러싼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쓱 앞으로 나서고,

“삼가 흠차(欽差)의 직을 맡아 동집사창의 모든 사무를 거두러 온 서집사창(西輯事廠)의 조윤(曹允)이옵니다. 사례태감과 작약선랑,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비어복 대신에 넉넉한 금포, 관모가 아니라 두툼한 복건(福巾). 풍채 좋은 백발노인이 자신을 소개하자,

홍작과 제독태감뿐 아니라 해원기까지 놀랐다.

“으윽, 탐보귀, 네놈이…….”

제독태감의 앓는 듯한 혼잣말이 없어도 알아볼 얼굴.

동집사창의 모든 사무를 거두러 온 서집사창의 흠차대신은 상보감의 조공공이었다.

천외천 주루에서 만났던 조공공과 똑같은 모습.

그러나 이번의 조공공은 해원기를 처음 보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서문창과 마찬가지로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모습을 보이고선 계속 주시하는 대상은 홍작뿐. ‘탐보귀’라고 욕하는 제독태감조차 안중에 없다.

홍작이 입가를 씰룩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후, 서창(西廠)을 세운다는 풍문은 꽤 오래전부터 나돌았지. 그래 봤자 어마태감의 쓸모없는 군불 때기 정도로 치부했는데. 상보태감이 나설 줄은, 호오, 어마태감을 어떻게 끌어들였을까? 그래, 황태후겠구먼. 어쩐지 오늘따라 십이음형사가 죄다 두더지 흉내를 내더라니.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호호호.”

혼잣말이 점점 커지더니 기어이 웃음으로 바뀌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냈다는 듯.

그러나 체념이나 후회의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다.

조공공이 두 손을 모으며 부드럽게 말을 받는다.

“자, 상황이 워낙 급변해 경황이 없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황실 어른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곤란하지요. 자세한 내용은 황극전에 이르면 알게 될 터. 순순히 어명을 따르셔서 괜한 소란을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명.

대영반 서문창과 백여 명을 데려온 게 그저 위엄을 부리기 위해서는 아닐 터. 무력을 써서라도 끌고 가겠다는 뜻인데.

홍작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호호호, 그 뻣뻣한 녹명이 이런 수를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멍텅구리인 줄 알았더니 내 뒤통수를 이런 식으로 친다? 게다가 황태후를 움직여 대영반이 비밀리에 양성한 황실친위(皇室親衛)까지 부릴 줄이야. 황상도 그저 동창이 서창으로 글자 하나 바뀐다고 여겼겠지. 때를 정말 잘 잡았구나. 하필…… 가만!”

조공공의 말은 들을 생각도 없고, 주위를 둘러싼 서문창과 황실친위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혼잣말만 이어가던 홍작이 웃음을 뚝 그쳤다.

크게 뜬 눈이 데굴데굴.

연무장에 홀로 묵묵히 선 해원기를 향하더니.

“이런, 젠장!”

욕설보다 소매가 더 빠르게 흔들리고,

펑.

“컥.”

한 줄기 소맷바람에 제독태감이 붕 날아서 해원기 앞에 처박혔다.

해원기조차 움찔할 정도로 뜻밖의 변화. 미처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 창붕당 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사례태감은 어명을 따라야지. 작약은 속세에서 벗어난 몸이니 이만 물러나 선경(仙境)에 머물겠다고 전하시게. 호호호호!”

창붕당 앞을 밝혔던 커다란 화로 두 개. 그곳에 돌연 소나기라도 쏟아진 것처럼 허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창붕당 전체를 가리고,

그 속에서 홍작의 웃음소리가 귀를 찢을 것처럼 울렸다.

“멈춰랏!”

서문창이 버럭 호통치며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손에 쥔 보검에서 일 장이 넘게 일어나는 검강.

홍작이 있던 곳을 거대한 화살처럼 꿰뚫지만,

콰앙.

허연 수증기가 날리는 곳엔 이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서문창이 인상을 쓰며 발을 구르고,

두웅.

창붕당의 기단이 크게 울리는 가운데 그 신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해원기 앞에 내려선다.

검강이 걷힌 보검에는 별 무리가 가득 어렸고, 그 끝은 해원기의 얼굴을 겨눈 채.

그러나 해원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 시선이 얼굴을 겨눈 검을 따라 천천히 서문창의 얼굴로 향한다.

별 무리가 가득 어린 보검을 한낱 작대기 보듯.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두 눈.

잔뜩 인상을 쓴 서문창도 아무 말 없이 해원기의 눈을 뚫어지게 본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짧은 시간이 흘렀다.

깜빡.

해원기가 먼저 깜빡였으니 눈싸움은 서문창이 이긴 셈인가.

“당신이 누군지 아오. 그러나…….”

서문창이 비로소 나직하게 말을 시작하더니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렇다고 내 입장이 달라지진 않소. 아까 말했듯이 호명하지 않은 자는 속히 떠나도록.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우요.”

연인끼리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

파팟.

말을 마치자 보검이 훌쩍 내려가 제독태감의 전신을 가볍게 두드렸다.

해원기가 그 가벼운 동작에 제독태감의 전신 혈도가 제압되었음을 알아봤지만, 시선은 계속 서문창에게 둔 채.

문득 입을 열었다.

“녹명은, 국사는 어디 있소?”

차분한 음성.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 심지어 홍작이 구대금오나 수보 등과 함께 사라진 것에도 관심이 없는 얼굴이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흐음, 꽤 도움이 되었다는 보고를 듣긴 했으나, 그렇다고 강호의 일개 무부가 대내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어선 곤란하지. 못 본 척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네.”

녹명과 국사에 대한 답이 아니라 서문창에게 건네는 조공공의 충고.

서문창이 미간을 더 찡그렸다.

“그만 떠나시오.”

묵직하고 단호한 말투. 그리고 전음이 거의 동시에 해원기의 귀를 울렸다.

[그는 서창의 주인. 조정의 권력은 이제 그의 손에 들어갔고, 그는 눈에 거슬린 자는 어떻게든 해치는 자요. 정녕 조정과 대적할 셈이요?]

어쩐지 간절함이 느껴지는 전음에,

해원기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황실친위를 거느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조공공을 한번 훑어보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문 대인의 충의(忠義), 잘 알겠습니다. 그저 그 충의가 협의에 앞서지 않기를 바랄 뿐. 정하불상침의 묵계가 계속 지켜진다면야. 흠.”

차분한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쉬익.

돌풍과 함께 해원기의 신형이 거대한 독수리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

눈 깜빡할 새에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대신에 은은히 울리는 우레.

우르릉.

조공공이 서문창에게 다가오며 하늘을 살피다가 혀를 끌끌 찬다.

“쯧쯧, 풍화절세와 응양구천의 절세검왕이라더니, 진짜 보통이 아니구먼. 역시 조금 더 지켜보다가 나서는 게 좋았겠소. 작약선랑과 양패구상(兩敗俱傷)이 되면 손쉽게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 저자가 끝까지 뒤쫓는다는 보장도 없거늘, 어째서 국사는 그냥 지켜보라고만. 에잉.”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슬쩍 서문창의 눈치를 살피는데.

서문창이 제독태감을 붙들어 일으키며 그 시선을 피했다.

“본관은 황상의 뜻을 받들 뿐입니다.”

딱딱한 대답에 조공공도 얼른 표정을 바꾸어,

“그렇지. 그저 어의(御意)를 따르기만 하면. 그게 우리 본분 아니겠소? 뭐, 저자도 우리 서문 대인의 충의를 잘 알더구먼. 어흠.”

맞장구를 친다.

그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갔지만, 서문창은 눈치채지 못했다.

해원기가 떠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 뇌리에 계속 남아서.

그건 분명히 자신이 보낸 전음의 대답.

정하불상침의 묵계가 지켜지지 않으면, 조정의 분란이 마침내 강호를 어지럽히게 된다면.

설사 조정이라도 대적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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