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5화 (395/410)

제99장 삼색비보(三色非寶) (3)

홍작이 조화부인에게 다가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해원기의 시선이 자신을 둘러싼 소위 육심마령에게 돌아갔다.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낸 색색의 복장. 그게 일종의 연갑이라는 건 백운동 위에서 육신사를 쓰러뜨렸을 때 알았지만,

눈앞의 육심마령이 착용한 것은 연갑이라기보다는 기이한 실로 짠 피륙.

그런데도 자전검강으로 쳐낸 음마검경을 견뎌냈다.

물론 홍작이 아는 척 떠들어댄 것만은 아니어서,

‘군다리명왕진(軍茶利明王陣)과 마두관음수(馬頭觀音手)를 섞은 검은 금강불괴라도 멀쩡하기 어렵거늘.’

지금의 해원기는 탁관영이 창안한 양천팔괘심형극을 거의 완벽하게 검으로 구사할 수 있다.

자전검강이 외부, 음마검경이 내부를, 더구나 육심마령을 하나로 묶어 여섯 자루의 검이 두들긴 격.

북소리가 터지고 전신을 미친 듯이 떨어댔건만, 그 상태로 무형의 거미줄로 해원기를 묶으려 했다.

보기 민망하게 달라붙은 색색의 복장과 그걸 뒤집어쓴 여자 여섯 모두 평범하지 않다.

더구나 포위만 한 채 가만히 있는 육심마령.

나뒹구는 십팔상사를 수보와 원좌가 수습해서 제독태감 옆으로 물러나도 딱히 움직일 기미가 없다.

해원기도 당연하다는 듯이,

철컥.

검을 검집에 넣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육심마령이 움직이지 않으니 자신도 싸울 마음이 없다는 건가.

수보와 원좌가 움찔하고, 제독태감은 얼떨떨한 표정을 다시 홍작에게 돌리고.

심지어 금오장의 강퍅한 얼굴도 이상하게 굳어졌다.

가장 놀란 이는 홍작. 막 조화부인을 옆에 앉혀서 폐혈쇄맥을 살펴보려다가 시선이 홱 돌아갔고,

팔짱을 끼는 해원기의 모습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불현듯 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기에.

큰 키에 넓은 어깨라 조금 말라 보이는 체형, 느슨하게 묶은 장발과 무서운 얼굴, 그리고 습관처럼 끼는 팔짱.

같은 부분이라곤 어깨 위로 삐죽 나온 고검의 검병뿐이지만,

해원기에게 ‘그 사람’이 겹쳐 보이는 건,

오연(傲然)한 자세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억지로 가라앉히던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뭐 하자는 거지? 육심마령에 갇힌 주제에 여유로운 체는 무슨.”

비난과 조롱이 한꺼번에 나오려는데,

해원기가 대뜸 고개를 젓고,

“아니, 여유로운 체가 아니다. 생각해야 할 문제가 갑자기 많아져서, 음, 내가 그리 영민한 사람은 아니잖느냐.”

머리를 쓰느라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니.

확실히 그 사부와는 다르다.

그러고 보니 팔짱을 낀 것도 갑자기 많아진 문제를 궁리하느라 그랬나.

“흥, 물론 소공자는 어렸을 때도 총명함과는 거리가 있었지.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에서 머리를 굴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당장 가소롭다는 마음이 들지만,

“제독태감을 거느리는 태상이, 동창의 중지인 창붕당에 친히 납시었는데. 흐음?”

해원기의 의아한 중얼거림에 말이 끊겼다.

미심쩍은 듯이 홍작을 보고, 그 주위를 헤아리기 시작하다가,

“조화부인이야 그렇다 치고, 구대금오와 금오장은 수신호위(隨身護衛)겠지. 그리고 제독태감이 밀각과 비전의 수령을 대동하고 나섰지만, 아무리 육심마령이 희한한 재주를 지녔다고 해도 지나치게 단출해. 천하에 으뜸가는 권력이라며? 황제를 해치고 뭐라더라, 성조니 뭐니 나라를 새로 세운답시고 거창한 소리를 해대던 거에 비하면.”

시선이 제독태감을 향하면서 눈꼬리가 살짝 쳐진다.

“공산 백운동보다 못하잖아.”

생각해야 할 문제.

그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해원기와 정록이 몰래 숨어들었을 수는 있다. 그래도 조화부인이 등장한 순간에 이미 행적이 드러났고.

동창과 같은 조직이라면 경보가 울려 무수한 인원이 몰려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공산 백운동, 그 이전의 육신지궁과 은허에서도 막대한 물량을 쏟아 붓던 자들이 어째서 본거지인 이곳에 소수만 남겨놓았을까.

제독태감이 인상을 쓰면서 노려보고, 홍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불의의 기습이라도 당한 양, 생각지 못했던 허점을 찔린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묘한 반응을 확인하고서 해원기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경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정신없이 바빴다. 경수사의 국사 뒤에 녹명이 있음을 확인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후로 정말 부지런히 끌려 다녀야만 했지. 십이음형사라는 자들이 끼어들면서 더 그랬고. 그렇게 무령산까지 갔다 오고서야 현도관의 태상인 너, 즉 홍작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이상하지.”

이제 해원기는 홍작과 제독태감 누구에게도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천천히 고개를 젖혀 천색을 살피면서,

“동창은 본래 환관들이 모여 이룬 곳. 누가 배후에 있든지 그 본색이 변할 리 없다. 밖에서야 알기 어려운 기밀이라도 자기들끼리는 낌새 하나도 놓치지 않을 텐데, 경수사의 국사와 현도관의 태상이 서로를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상보태감이 이 원흉 둘을 걱정해 금오혈석의 겁표 사건까지 꾸며야 했다던데.”

제독태감이 인상을 쓴 채 이를 북 갈아붙였다.

“으득, 탐보귀(貪寶鬼), 이 빌어먹을 놈이 무슨 헛소리를.”

보배를 탐내는 귀신. 상보태감을 욕하는 별명이란 건 전부터 짐작했었다.

“헛소리라. 뭐, 나도 믿기 어려웠다만, 그 내용의 진위는 차치하고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

이번에는 홍작의 반문.

해원기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동창을 지탱하는 이십사아문이 셋으로 갈라졌다는 부분. 동창의 제독태감을 따르는 일파, 제독태감을 반대하는 어마태감의 일파, 그리고 이 둘의 배후를 걱정하는 상보태감의 일파. 그런데 상보태감은 녹명과 홍작을 아는데 다른 쪽에선 상보태감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녹명은 홍작의 존재를 모르고, 홍작은 녹명을 허수아비 취급한다. 여기에 또 홍작이 부리는 조화부인과 상보태감의 지원을 받는…… 흠, 십이음형사도 뿔뿔이 나뉘어 파벌을 이루었을까? 복잡미묘하고도 어딘가 어수선한, 재미있잖으냐.”

홍작이 조화부인을 놔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건 해원기의 얘기가 그만큼 의미심장하기 때문일 터.

차갑게 굳은 얼굴로 해원기의 말을 다시 되뇐다.

“복잡미묘하고도 어수선한. 재미, 있다?”

심리적인 충격을 받았을까.

해원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받았다.

“그래, 녹명은 어떤 식으로든 사황령을 얻었던 것 같고, 너는 만상조화에 매달렸던 모양이다만. 그러면서도 금오혈석에 계속 집착했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에서 육악지력을 찾아낸 후에도. 소위 사일신력이란 힘에 매달려서 마지막 비밀을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애쓰더구나. 이미 단서를 발견한 거로 보이는데, 굳이 자부십이경을 동원하려고. 그 바람에 항상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채 따로따로 놀아났다. 지금도 그렇지 않으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미간이 깊게 파인 홍작의 입술이 움찔거리다가 끝내 닫히고.

해원기가 팔짱을 풀며 다시 턱을 당겼다.

“물론 내 능력은 사부에게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다만, 그렇다고 하찮은 놀잇감은 아니지. 아니, 너희가 아는 무림은 모두가 단지 노리개로 보였을 수도 있겠구나. 용호방과 풍운책이라던가? 누가 저술했는지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

화제가 조금 바뀌어서인지,

홍작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높이는데.

“그깟 무림이란 게 뭐 대단하다고! 백 년이 넘게 허우적대던 것들이. 용호풍운은 이미 전대의 국사가 그 난세의 흐름을 파악해서 남겨둔 기록을 정리. 응?”

무림을 어떻게 여기는지 그 뒤집힌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알만하다.

하지만,

용호방과 풍운책의 배경을 떠들던 홍작이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해원기가 문득 그 이유를 짐작하고서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렇구나.”

전대의 국사라면 경수사의 주지로 영락제를 도와 황제로 등극시킨 도연. 그 도연, 즉 요광효와 거래가 있던 이는 바로 천교진인.

홍작도 비로소 깨달았는지 안색이 하얗게 질려간다.

“노, 노야……라고?”

한때 모셨던 주인.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홍작에게 있어서 ‘노야’인 천교진인은 참으로 숙명의 굴레 같으리.

해원기 역시 용호풍운의 기록이 천교진인에 의해 ‘조작’되었으리라는 심증이 강하게 들면서 입맛이 썼다.

오소민이 ‘도깨비 같은 영감’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댔을지. 또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지. 그 심중을 헤아리는 건 무리.

하여간 녹명과 홍작을 비롯해서 동창이나 대내의 고수들이 강호무림을 경시하는 듯한 인식의 기초가 바로 용호방과 풍운책.

백 년이 넘는 오랜 난세로 강호의 원기가 크게 상하긴 했으나, 그 난세를 헤치고 당세에 이름을 떨치는 이들은 당연히 남다른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단순히 특이한 신공절학이나 신병이기 따위로 가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해원기가 계승한 고죽의 검.

사부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을지 정말 그 기록을 직접 열람하고 싶었다.

과거의 난세를 조성했던 신주영웅회, 벽세, 지부의 힘을 다시 재현했다고 망령되이 설칠 수 있을까.

‘박대정심’을 목표로 삼은 해원기도 검이라는 길 하나조차 아직 완성하지 못했거늘.

어떻든 동창을 장난감처럼 여기고 세상을 제멋대로 다루려는 망상도 이런 오류에서 시작되지 않았을지.

해원기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엇을 더 끄집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동집사창이 황궁 외곽에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한산하다니. 녹명과 마찬가지로 너도 겉으로만 화려할 뿐이었더냐. 됐다. 이 정도면 더 구경할 건 없겠다.”

뭐가 더 나오나 기다렸단 말인가.

이것저것 말을 이어가며 시간을 끈 건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나.

홍작의 표정이 홱 바뀌었다.

“이, 이게…….”

콧김을 내뿜을 듯 흥분해서 말까지 더듬다가,

“공령만상(空靈萬象)!”

앙칼지게 외치는 소리가 섬뜩하고,

휘이이이이이.

육심마령에게서 일제히 치솟는 기이한 기세.

더구나 제독태감과 수보, 원좌가 기겁해서 십팔상사를 돌볼 새도 없이 황망히 몸을 날리는데,

“끅.”

“억.”

아직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던 십팔상사가 맥없이 나동그라진다.

해원기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양천팔괘심형극을 검으로 썼으되 육악지력에 근거한 강상을 깨는 데 주력해서,

십팔상사는 근기가 파괴될 정도로 중한 내상을 입긴 했으나 목숨이 끊기진 않았었다.

그런데 육심마령이 기이한 기세를 일으키자마자 동시에 절명했고,

그런 기미를 미리 알았는지 부하를 내버리고 몸을 뺀 제독태감 들.

홍작이 외친 ‘공령만상’이 어떤 의미의 호령인지보다 인명을 한낱 도구로 여기는 행태에 노기가 일었다.

두 발이 먼저 엇갈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고, 양손의 검왕수가 주위를 거침없이 휩쓸었다.

재단경위의 검망(劍網)이 육심마령을 한꺼번에 뒤덮는데,

흑, 청, 홍, 백, 남, 녹의 여섯 가지 색깔로 나뉘었던 민망한 껍데기. 돌연 전부 색깔이 없어져 버린다.

백색조차 아예 투명해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재단경위의 검망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서 해원기에게 덮쳐들었다.

홀랑 벗은 여체라기보다는 무슨 유령처럼.

그러나 민망해하던 해원기는 미간을 찡그린 채 제자리에서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주위를 휩쓸었던 검왕수가 아깝다는 듯 서둘러 거두면서 움츠리는 자세.

나신조차 흐릿해진 육심마령의 손이 수십 개로 불어나 해원기에게 달라붙지만,

움츠린 해원기에게서 한순간 빛이 폭발했다.

번쩍.

머리와 어깨, 팔꿈치, 등과 허리, 그리고 무릎. 움츠린 몸의 관절이란 관절에선 전부 검형이 치솟고.

육심마령의 불어난 손과 몸뚱이를 가차 없이 꿰었다.

퍼엉!

해원기를 중심으로 연무장 바닥이 방사형으로 쪼개져 날아가는데,

스륵.

연무장뿐 아니라 창고 지붕이나 담장 위 수십 장 떨어진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육심마령. 투명했던 껍데기가 도로 선명해지고 없어졌던 색깔도 다시 돌아왔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현상.

하지만,

퍽.

그중 담장 위, 녹색 껍데기를 뒤집어썼던 자의 가슴이 쩍 갈라지면서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침중한 호통이 울렸다.

“이 무슨 요사스러운 짓! 동창 제독은 어디 있는가!”

담장 위로 수십 개의 인영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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