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장 삼색비보(三色非寶) (2)
챙!
대뜸 검을 뽑아 든 해원기.
“어, 태상!”
제독태감이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여 부른다. 태상을 따라 수하들을 거느려 나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는데.
믿었던 역산전해도는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해서 헛손질만 했고,
태상을 호위하는 구대금오가 전부 현신하고도 그저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해원기가 곧장 검을 들었으니.
공산 백운동에서 당했던 일이 기억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황제를 시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었던 함정. 군부의 화포를 동원해 연장암막을 발동시켰고, 정예라고 할 인원을 삼백이나 투입했었건만.
철저하게 실패했다.
활강시에 육신갑을 입힌 육신사도, 지옥도를 새긴 여덟 개의 초석으로 구성한 팔대지옥도, 이백의 밀각 중사와 일백의 비전 장령을 모조리 자폭시킬 홍황공멸의 술수로도.
황제인줄 알았던 상덕공주는커녕, 그녀를 보호하던 자들 하나도 처치하질 못했다.
아니, 미리 반룡십삼령을 호출하지 않았더라면.
수보와 원좌는 물론, 제독태감 자신도 어떤 처지가 되었을는지.
끔찍한 생각이 절로 들고, 자연히 태상을 부르는 목소리엔 애처로운 느낌까지.
겁을 먹었다.
그러지 않아도 짜증이 올라오던 홍작이라,
“왜 부르고 난리야? 뭐해, 당한 대로 갚아줘야지!”
앙칼진 답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히는 곳.
구대금오를 쓰러뜨리고 금오장이 금천절예를 쓰게 만들 때는 끝까지 맨손의 검형수만 쓰더니,
제독태감 쪽으로는 몸을 돌리자마자 검을 뽑은 해원기.
당최 의미를 모르겠다.
해원기가 곧장 원좌 쪽으로 움직였다.
좌측에 몰려 있다가 뒤로 돌던 무리라서 원좌와 그 수하 열여덟이 더 가깝기도 했지만, 수보 앞의 새로운 육신사가 영 민망한 모습이라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식겁한 제독태감과 달리 수보와 원좌는 진즉 싸울 태세를 마쳤고,
비어복을 입은 열여덟이 잽싸게 칼을 들어 올리며 반원형으로 퍼진다.
덕주에서 처음으로 동창의 번역(番役)들을 상대했을 때부터 눈에 익은 차림새요, 손에 쥔 칼도 여전히 어중간한 길이에 새까만 도신(刀身).
그러나 그저 평범한 번역일 리 없다.
스으으으으.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그물처럼 얽혀 연무장 바닥을 파도처럼 휩쓴다.
도기? 뿜어대는 기세와는 달리 새까만 도신은 희미한 도기조차 형성하지 않았고,
반원의 진형을 형성하는 순간에 수보와 여자 육신사는 신속하게 원좌 옆으로 붙었다.
그런 변화를 고스란히 눈에 둔 채,
해원기는 산보라도 나온 듯 경쾌한 걸음.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린 고검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다.
도기가 없으니 검기도 없다는 건가.
열여덟의 칼잡이와 똑같이 전신에서 일으키는 기세만이 연무장 바닥을 뿌옇게 만들 뿐.
원좌의 호령이 떨어졌다.
“수화상접(水火相接)!”
물과 불이 서로 만난다. 진결처럼 들리지만, 칼잡이들이 펼친 건 그저 반원형의 포위, 특별한 진법이 아니다.
그 호령에 맞추어 번갈아 칼을 위아래로 흔들어 수기와 화기를 섞어내지만, 상접이 아니라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고.
해원기에게 직접 달려들지도 않는데.
열여덟 자루의 칼이 순간적으로 요철(凹凸)을 이루자,
해원기의 경쾌한 걸음이 멈추었다.
석판이 깔린 연무장 바닥이 돌연 늪처럼 다리를 휘감고, 머리 위에선 후끈한 열기가 와락 덮쳐오니.
반사적으로 고검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긋는다.
파아악.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기이한 소음을 내면서 흔들리는데,
“침식난만(浸蝕爛漫)! 전폐도리(全廢道里)!”
원좌의 호령이 갑자기 빨라지고,
반원의 포위가 확 모여들었다. 부채가 접히듯.
짤막짤막한 호령을 다 알아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진세도 아니면서 진결 같은 네 글자.
그래도 상대의 공격을 짐작할 단서는 될 텐데,
해원기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왼손을 가슴 앞으로 올렸다.
늪처럼 다리를 휘감는 느낌과 머리 위를 덮치던 열기는 사라졌으되, 묘하게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다.
지나치게 피곤한 것처럼 전신이 무거우면서 또 더위를 먹은 것처럼 띵해지는 머리.
전혀 개의치 않고 위로 올렸던 검을 당기면서 왼손을 검신과 교차하듯 앞으로 뻗었다.
반원의 포위가 모여들 걸 예상이라도 한 듯이 손끝이 딱 한 점을 찌른다.
순식간에 모여든 열여덟 자루의 칼, 접히는 부채의 손잡이를 향해.
쾅!
석판이 쩍쩍 갈라지면서 해원기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접혔던 부챗살이 좌라락 벌어지고, 그 뒤로 여자 육신사들이 빠르게 늘어서서 자세를 취하니.
충격을 받은 쪽은 분명 열여덟 명의 칼잡이일 텐데.
빙글빙글 회전하며 방향을 트는 해원기는 어느새 처음에 연무장으로 나왔던 창고 쪽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역시 홍작과 금오장 들에게 등을 보이는 게 싫었나. 아니면 틈을 봐서 왔던 길로 도주하려는 속셈인가.
하지만, 위치를 바꾼 해원기가 곧바로 몸을 세웠다.
“흠, 칼은 뭐하러 들었을까. 육악지력을 같이 쓰기에 적당한 병기가 아니거늘.”
무표정으로 살짝 갸웃거리는 건 의아하다는 표현.
칼잡이들이 무슨 수법을 썼는지 훤히 안다.
그러나 해원기의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들려오는 홍작의 질문.
“왜 군림검으로 어검대법을 쓰지 않지? 육악지력을 상대하기엔 본연검으로 충분하다는 건가? 십팔상사(十八上士) 정도면 검상이 선명하지 않아도 된다. 뭐 이런 거야?”
신경질이 담긴 말투.
그러지 않아도 짜증이 나는 판에 해원기의 대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홍작의 목소리를 기다렸었나.
해원기가 검을 다시 내리면서 눈을 껌뻑였다.
“십팔상사라. 전에 백운동에 나왔던 무리가 중사였으니. 육악지력을 쓸 줄 알아야 높은 자리란 거로군. 그런데 내 검상을 어찌 다 알아보느냐?”
얼굴에 얼핏 스치는 건 놀랐다기보다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이 덤덤한 반응이 또 속을 긁어서,
홍작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코웃음을 쳐야 했다.
“흥! 누굴 바보로 아나. 어떻게 모를 수 있지? 그 검, 이제검의 내력은 고죽에만 전해지지 않았다고. 거기에다 이것저것 갖다 붙인 게 소위 십대검상. 딱 열 가지는 아니겠지만. 그래 봐야 검상마다 한계는 뚜렷하고…… 으음?”
울컥한 기분에 빠르게 입을 놀리다가 일그러지는 인상.
뭔가 놓쳤다는 걸 비로소 자각했다.
십팔상사의 육악지력이 비록 대성(大成)의 경지는 아니어도 군림어검의 위력이어야 압도할 수 있다.
그런데 해원기는 어떤 검상을 썼는지 불분명. 그러고 보니 역산전해도를 빠져나온 방법도, 구대금오를 자빠뜨린 검형수도 확실치 않다.
대체 뭐였지?
이제야 태상의 불쾌한 심정을 알아챘는지 제독태감이 벌컥 화를 낸다.
“이놈이 감히! 태상께 무엄한 저놈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셈이냐!”
노성을 지르며 양팔을 거칠게 휘두르자 수보와 원좌 가릴 것 없이 수하들과 한꺼번에 몸을 날렸다.
십팔상사가 여섯 명씩 세 무리, 그 뒤에 바짝 붙은 육신사. 왼쪽은 바닥을 미끄러지듯 영활하고, 중간은 들이받을 듯 막무가내며, 오른쪽은 거칠게 겅중거리니.
이미 알아보았듯이 수사, 봉희, 착치의 힘을 끌어낸 듯. 조금 전 원좌의 호령으로 미리 펼쳐내던 구영의 수화지력과 거기에 덧붙인 알유와 대풍의 기세는 생략한 채.
빠르게 거리를 좁히면서 뱀, 멧돼지, 늑대의 아가리가 선명하게 구상화한다.
뚝 떨어져서 기세로 얽어매고 부채를 접듯 하나로 뭉쳐 덮치려던 것과는 정반대. 단번에 접근해서 강상으로 부딪칠 셈이다.
눈앞에 닥치는 흉험한 기세에도 해원기는 태연자약.
“이것도 알아보려나?”
끼이잉.
말을 차분해도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정도. 나사관천으로 회전하는 고검이 순식간에 공간을 누비고, 양손이 신쾌하게 갈마든다.
번쩍번쩍.
명멸하는 예광이 해원기를 중심으로 연꽃처럼 펼쳐지더니 번갯불이 세 줄로 꼬여 튀어나갔다.
콰콰쾅!
“컥.”
“으악.”
구상화한 강상이 산산이 조각나면서 십팔상사가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데,
홍작의 목소리가 그 비명보다 더 컸다.
“팔엽만다라에 밀적금강저? 이건 천극의 양천팔괘(量天八卦)…….”
탁관영의 독문절학도 알아보긴 하지만, ‘양천팔괘심형극’이란 이름을 다 읊기도 전에,
해원기의 신형이 벼락같이 날아올랐다.
십팔상사가 쥐었던 어중간한 칼이 제멋대로 날아가지만, 절반 이상은 해원기의 양천팔괘심형극에 강상이 부서지기 전에 손에서 벗어난 것. 더구나 나가떨어지려는 상사 뒤에 육신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얼싸안으려고 하니.
전에도 육신사는 영사태화를 연환해서 받은 충격을 흘려냈었다.
어느새 해원기의 손에 들린 고검이 육신사를 한꺼번에 무찌른다.
붉은빛이 공중을 스친다고 느끼자마자 북을 치는 것처럼 울어대는 육신사.
퍼퍼퍼퍼퍼펑.
몸의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난 민망한 육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뒤를 따르던 수보와 원좌까지 그 여파에 중심을 잃고 밀려나는데.
공중에서 검을 거두던 해원기가 돌연 허리를 틀었다.
미친 듯이 전신을 흔들던 육신사가 그 모습 그대로 위치를 바꾸면서 기이한 기운이 덜컥 옭아맨다.
무형의 거미줄에 걸린 듯하면서 따끔거리는 피부. 신왕공의 청정력에 검왕법신이 호신하는 해원기에겐 극히 드문 일.
육신사를 쓰러뜨린 후에 수보와 원좌, 제독태감까지 연달아 노렸었지만, 우선은 이 기이한 거미줄에서 벗어나야 한다.
왼손의 검왕수를 흔들어 제탁지검을 발동시키며 옆으로 돌아 내려섰지만.
그곳은 바로 둥글게 둘러싼 육신사의 가운데.
어지럽게 나가떨어진 십팔상사를 발로 차내기까지 하면서 공간을 만든 여섯을 둘러보다가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오련칠법을 거친 자들과는 다르군.”
어디 눈을 두기 민망한 차림새들. 해원기의 시선은 육신사가 아니라 홍작을 향했고.
홍작이 혀를 차며 말을 받았다.
“쯧, 진짜 맘에 안 드네요. 소공자. 심형극을 검으로 쓰질 않나, 자전검강을 음마검경으로 펼치지 않나. 어지간히 검상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야. 그래도 육심마령(六心魔令)은 쉽지 않으니까. 활강시 따위가 아니거든.”
툴툴거리는 말투는 여전하지만, 육심마령이 해원기를 붙잡은 광경이 짜증을 조금 풀어주었나 보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백운동의 육신사와는 이름부터 다르다. 그것도 육심마령.
과거의 심마왕도 자신이 분신이랄 수 있는 심마령을 다섯까지 밖에 운용하지 못했고, 심마령을 쓸 때는 본체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조화부인뿐 아니라 이 육신사가 전부 홍작의 심마령, 게다가 홍작은 태연히 입을 놀리잖나.
그렇다면 피부를 따끔하게 했던 무형의 거미줄은 곤혹도(困惑道)의 한 갈래. 그런데 또 육심마령이란 여자들에게선 딱히 마기(魔氣)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오련칠법을 거친 활강시가 아니라면서.
해원기가 입을 닫고 검을 고쳐 쥐자.
홍작은 더 기가 사는지.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려던 건데. 소공자가 워낙 의뭉스러워서 말이죠. 에휴, 제독은 다시 정비를 좀 해요. 이렇게 허술한 대접으론 나중에 웃음거리가 된다고요. 그러기에 미리 어마감 쪽도 좀 다독이고 그러라니까. 경수사에 그리 민감하게 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해줘도. 쯧쯧, 자, 그럼 교화가 괜찮은지 좀 볼까?”
말투까지 바꿔가면서 으스대기 시작한다.
‘의뭉스러운’ 해원기는 여전히 묵묵부답.
육심마령에게 포위되고 나선 선뜻 손을 쓰지 못한다.
“네? 네엣. 삼가 명을.”
제독태감이 황망히 수보와 원좌를 시켜 장내를 수습하는 것도 외면하고.
그저 홍작 쪽을 유심히 볼 뿐이다.
뭘 생각하는지 도통 알기 어려운 해원기의 얼굴.
그런데.
조화부인에게 건네준 열쇠에는 별반 관심이 없나. 어쩐지 느긋하게 시간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