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3화 (393/410)

제99장 삼색비보(三色非寶) (1)

근 이십 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비록 아는 척하긴 했어도 ‘소공자’가 현도관에 있었던 것은 겨우 몇 달. 주로 강유행에게 글을 배웠고 짧은 간식 시간에나 가끔 교도인과 담소를 나눈 정도여서.

제대로 무공을 배운 건 전혀 없다시피 했었다.

순박한 아이였다.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말이 적은 편이었지만, 그거야 타고난 성격이거나 한어(漢語)가 능숙하지 못해서였겠지.

다음 대의 고검지주(孤劍之主)라고 여길 특출난 점도 없었고,

교도인이 금쪽같이 아끼는 이유도 아리송하기만 했던,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었다.

아무리 백년제일검사라고 해도 채 이십 년도 되지 않는 시간으로 제대로 키워내기는 어려울 터.

우선 평범한 자질에 입문한 시기가 너무 늦었고,

다음으로 사부인 묵세휘가 다시는 검을 쥐기 어려울 정도의 폐인(廢人)이 되었으니.

최대한 너그럽게 봐주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물론 방심은 금물.

묵세휘 외에 영향을 줄 만한 자들을 잊지 않았다.

묵세휘의 부인 두 사람. 해천옥녀 대완아는 해중천을 이은 재원이고, 비봉황 이벽령은 신주영웅회가 낳은 진정한 여중고수.

그밖에 녹림노조 방송서나 철금선생 종지음 등도 빼놓지 않았으나.

역시 가장 주의할 대상은 소위 무림삼정이라 일컬어지는 세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극 탁관영.

그야말로 차후 백 년이 지나도록 다시 나오기 어려운 절대고수요, 심지어 무신(武神)으로 추앙받을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니.

그러나 주위에 훌륭한 고수가 많다고 꼭 좋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방잡(庬雜)한 배움은 성장을 가로막기 일쑤.

과연 해원기는 십여 년이 넘도록 강호에 출현하지 않았다.

하북과 산동 일원에서 엉뚱하게 쾌체라는 일을 한다나. 매년 황하의 범람을 막는 데 공을 들이고 간혹 뜻밖의 재난을 구제하는 등 협행을 하긴 했어도 남의 눈에 뜨이는 걸 극력 피했다.

무림에 나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을지. 혹은 자칫 사문을 욕보일까 두려워서였을지.

어떻든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 오악검법과 마도 절세오검, 그리고 더 배웠다고 해도 십여 종의 검법.

신왕공과 천손검법도 기껏해야 팔성(八成)에 불과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출도한 후에 주로 쓴 것은 왕년의 검형수. 귀왕검이 소실되었는데 뭐가 겁나 검을 뽑지 못한단 말인가.

절세검왕이니 뭐니 화려한 수사로 가리려 해도,

도금은 어차피 벗겨지기 마련이다. 고죽의 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조사했으니까.

그래도 만무일실(萬無一失)이라고.

실체를 낱낱이 밝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놓았다.

화극(化極)한 홍환(紅環)과 법정(法正)한 녹판(綠板)으로.

스윽.

“태상!”

그사이 조화부인을 데려온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도 황급히 앞으로 나설 만큼 해원기의 출현은 의외였으나.

중년인의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후다닥 일어나는 둘.

점고달초식을 펼쳤던 짧은 편책(鞭策)은 손잡이만 남았고, 세 부분으로 연결되는 삼절간은 끝부분이 날아갔지만.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진 않았고.

돌계단 위에 몸을 세우자마자 사방에서 인영들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모두 아홉. 가슴에는 붉은 원이 그려진 흑색 연갑(軟甲)을 두르고 순식간에 홍작 주위를 병풍처럼 막아선다.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고 죽 훑어보았다.

괜히 칭찬한 게 아니다.

편책과 삼절간을 부쉈는데도 능히 자신을 보전한 둘. 확실히 원양대진력과 서권송긴강기를 제대로 익혔다. 겉멋만 부리던 태백종사 따위와는 견줄 수 없는 견고한 근기.

그런 자들이 아홉으로 늘었다.

손에 든 병기들도 흔히 보기 어려운 기특한 것들. 눈에 어린 형형한 정광이나 침착한 자세를 보지 않아도 전부 충실하게 바탕을 다진 자들이 틀림없다.

짝.

홍작이 짧게 손뼉을 치고 입을 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네요. 오죽하면 금오장(金吾將)이 구대금오(九大金吾)를 다 불러냈을꼬. 역산전해도에서 이렇게 빨리 벗어날 줄은. 흐음, 속상하네.”

펼칠 때처럼 거두는 방법도 손뼉인 듯.

일렁이던 공간이 선명해지면서 좌측에 모인 수십 명이 드러난다.

제독태감을 중심으로 밀각 수보와 비전 원좌. 수보 앞에는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열여덟 명이, 원좌 앞에는 여체의 곡선이 민망한 육신사가.

헛손질에 조금 당황한 모습이다.

해원기가 나온 창고 쪽에서부터 오륙십 장 거리.

발동하면 즉시 해원기를 끝에서 끝으로 이동시켰을 역산전해도가 아무런 역할을 못 했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들끼리 춤춘 꼴이다.

그저 심통 난 표정만 지은 홍작이었지만,

내심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 듣는 진도지만, 이름만큼 대단치 않구나. 아니면 아직 운용이 서툴러서인가? 게다가 황제를 호위하는 금오라, 천상의 선랑(仙娘)치곤 지나치게 속돼.”

속을 뒤집는 통에 미간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명랑하고 쾌활해서 한 떨기 붉은 작약처럼 화사한 미녀.

그런 겉모습은 종잡을 수 없는 기질로 남을 희롱하기 좋아하는 성격의 한 단면이다.

본래는 역산전해도로 해원기를 가두고 실컷 구경이나 할 셈이었다.

해원기가 경사로 들어선 후에,

녹명이 잘난 척하며 여유를 부리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고, 조화부인이 제안한 공심의 계책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해원기가 어떤 무공으로 어떻게 싸우는지, 무엇을 익혔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걸 확인하는 게 가장 큰 즐거움. 매번 보고로 들어서야 감질만 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십이음형사까지 내보내 이리저리 돌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현도관 지하 비고를 열 수 있는 열쇠까지 손에 넣은 바에야 여우가 굴 파듯 사방으로 숨바꼭질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야 직접 관전하는 재미를 누릴 판이었는데.

역산전해도는 그걸 위한 짐승 우리.

그런데 그 오랜 기대는 시작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고, 울에 갇혀서 정신없이 싸워야 할 짐승이 이렇게 속을 뒤집다니.

짜증이 난다.

“금오장이란다고 금위(禁衛)인 줄 아나? 뭐 해, 다시 밀어내!”

막 옆에 이른 조화부인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강퍅한 중년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금오장이라는 중년인이 강퍅한 인상을 찡그리더니 두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양대도위(兩大都尉)는 물러나고 사대기위(四大騎尉)는 나를 따르라. 우주국(右柱國)이 나머지를 지휘해 태상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금오가 아니라고 했지만, 부르는 이름은 전부 무산계(武散階)의 직위.

돌계단에 나가떨어졌던 양대도위가 즉각 홍작 곁으로 물러나자,

금오장이 좌우로 둘씩, 사대기위란 자들을 거느리고 나선다.

그런데 가볍게 흔든 두 손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경풍(勁風), 사대기위가 동시에 그 경풍을 끌어 해원기의 좌우로 짓쳐 들고.

금오장은 공중을 격하고 쌍장을 번갈아 내민다.

우웅.

공간을 울리는 음향과 함께 밀어닥치는 가공할 장력은 마치 거대한 성벽이 통째로 덮치는 듯하고,

좌우에는 매서운 경풍을 탄 사대기위가 일시에 병기를 휘두르는데, 어중간한 길이의 검과 도, 장난감처럼 작은 창과 봉이지만, 하나같이 강기를 이룬 놀라운 위력.

앞은 막혔고 좌우에선 강기가 날아드니 피할 곳은 뒤뿐.

홍작의 명대로 밀어내려는 의도다.

왜 밀어내라고 했을까.

처음에 안배했던 대로 해원기를 연무장 안으로 돌려보내 다시 느긋하게 싸움 구경을 하려는 욕심.

금오장이 나서자마자 제독태감이 눈치 빠르게 수보와 원좌를 해원기의 뒤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해원기가 조금이라도 밀려나면 곧장 달려들 셈이다.

그러나.

해원기가 어떻게 역산전해도를 벗어났는지 조금 더 관찰했어야 했다.

일렁거리던 공간은 선명해졌으되,

낮게 깔린 구름처럼 뿌옇던 기운은 여전히 해원기의 발치에 어려있으니.

그게 경수사에서 비로소 완성된 운보(雲步)란 걸 알 도리가 없다.

해원기의 양손이 검왕수를 다시 일으키기 전에 운보가 먼저 움직였다.

양대도위와 같이 구대금오에 속한 사대기위와 금오장. 수정지력이 신왕공을 힘껏 밀어 올리고, 풍뢰지결이 상대의 공세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는 걸 운보가 미리 알았던 것처럼.

뭉클.

운기(雲氣)가 치솟자 왼손의 검왕수가 바람을 휘감는다.

한가로운 손짓 같아도 금오장이 일으켜 사대기위가 올라탔던 매서운 경풍이 그 손끝에 홀린 듯 매달리고,

오른손의 검왕수가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되어 쏟아지자 좌우의 강기가 제멋대로 뒤집히더니,

“어엇?”

놀란 소리를 낼 새도 없다.

양손이 엇갈려 장대한 번갯불을 정면으로 무찌른다.

일초(一招).

그 안에 검왕오형이 담긴 단 한 초식이다.

펑!

돌계단이 쩍 갈라져 분수처럼 돌가루를 뿜어대는 가운데 좌우로 벌어져 황망히 자세를 고치는 사대기위.

강기가 뒤집히면서 하마터면 자기들끼리 병기를 부딪칠 뻔해서 다들 눈이 둥그레졌다.

비록 밀어내라는 명을 따라 전력을 기울이진 않았어도 강기를 구현한 채로 맞부딪쳤다면 병기가 망가졌을 터.

비로소 양대도위의 병기가 어떻게 부서졌는지 깨달았지만,

이런 수법이 있다니.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발검제형으로 바람을 휘감기 시작해서 재단경위로 경풍을 부리고, 검림소연으로 소나기를 뿌려 역상정위로 강기를 뒤집은 후에, 유야무야가 검도창봉의 힘을 거두어 다시 발검제형의 번개로 내던졌다.

발검제형에 단홍검과 섬전이, 재단경위에 복룡검식과 추풍이, 검림소연에 기수검봉과 붕악이, 역상정위에 해운파랑과 탈백이, 유야무야에 수미전단검과 음마검경이 어울렸다는 건 의식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운보가 움직일 때부터.

딱히 구분할 것도 없고, 마음에 품은 대로 이루어진다.

둘이든 다섯이든 똑같이 병기가 부서져 나가떨어질 터.

하지만,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마른 몸매에 큰 키. 정면을 가로막은 금오장은 양 손바닥을 활짝 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

파라라락.

충격의 여파로 양쪽으로 휘날리는 옷자락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 눈여겨보지 않았으나 전신에 학창의(鶴氅衣) 같은 옷을 입었던 모양이다.

밀어내진 못했어도 능히 버텨낸 금오장.

홍작의 교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귀에 울린다.

“호호호, 왜 금오장이라 불리는지 알아보겠어? 금천절예(金天絶藝)가 뭔지도 모를걸? 호호호호.”

금천절예.

확실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특별히 눈에 뜨이는 형태도 없고, 그저 쌍장으로 이룬 성벽처럼 거대한 기운이 공간을 채울 뿐.

그런데 잠깐 금오장을 훑어보던 해원기가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모르겠군. 내놓고 자랑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구나. 그럼 아는 쪽과 어울려볼까.”

아예 뒤로 몸을 돌려 제독태감의 무리를 향하니.

훤하게 드러내는 등.

홍작이 웃음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 무슨 방자한 짓거리.

일부러 여유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배후에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치한 믿음인가.

혼자서 용담호혈에 뛰어든 주제에. 꼴에 절세검왕이랍시고.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짜증이 점차 심해지는 그녀의 눈에,

해원기의 등에 비스듬히 걸린 고검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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