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2화 (392/410)

제98장 심소담대(心小膽大) (4)

철컥.

고검이 검집에 꽂히는 소리에 조화부인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둔점(遁點)을 이용하지 않고 무사히 경수사까지 갈 수 있을까? 편한 길을 굳이 마다하는군.”

두 눈에 어렸던 기이한 빛이 사라졌고, 말투도 바뀌어서.

심마령이 해제된 조화부인 주교화가 분명하다.

해원기가 덤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춘매도 그렇지만 쇠약한 유모로선 둔법을 견디기 어려울 거요. 또 둔점에 무슨 수작을 부려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해원기도 이럴 줄 알았는지 평소의 말투.

조화부인이 위에 걸친 하피를 가볍게 추스르며 코웃음 쳤다.

“흥, 의외로 겁쟁이로구먼. 조금 전에 잘난 척 호기를 부렸던 건 여자 앞이어서였나? 새파란 애송이 둘만으로는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걸. 아무리 영랑각이 가장 외진 곳에 있어도 여긴 동창이란 말이야.”

해원기에게 당한 게 억울해서, 또 이렇게 포로가 되어 안내하는 처지가 한심해서인지.

전신 경맥이 제압되어 맥이 빠졌으면서도 억지로 괜찮은 척 입을 놀린다.

“새파란 애송이 둘이라. 개방의 장로와 녹림의 대탐자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요.”

그런 조화부인을 무시하듯 주위만 살피는 해원기.

영랑각의 가산 구석, 벽돌 담에 숨겨진 작은 문을 통해 나온 곳에는 창고 같은 건물이 늘어섰고. 그 창고들 사이로 높다란 기단 위에 얹힌 단층 건축.

멀리 전각군(殿閣群)이 아스라이 보이긴 해도 특이한 환경이다.

황성(皇城). 궁궐이 있는 내성(內城)과 그 내성을 보호하는 외성(外城), 즉 성곽(城廓)으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외성의 동쪽 끝이라도 높고 큰 건물을 숲처럼 복잡하게 세워 외부의 침입을 막는 구조일 텐데.

홍작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드물게도 넓은 평지 위의 단층 건축이었다.

“흐흥, 개방 장로? 전에도 우스울 정도로 쉽게 잡히던데. 덕분에 그 보패를 잘 써먹었고. 녹림의 대탐자라는 녀석도 그저 까불기나 하는…….”

“그 정도만 하시오. 저게 창붕당(昌朋堂)이요?”

해원기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말이 끊긴 조화부인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수차제 때니까 초여름 무렵. 그로부터 반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껄끄럽다.

‘언제 이렇게 변한 거야. 아니, 처음부터 의뭉스레 자신을 숨겼나. 영 만만치 않아.’

무공도 무공이지만,

뭘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동창으로 쳐들어와 서슴없이 손을 쓰는 대담함, 홍작이 배후라는 걸 알아채고도 아무렇지 않게 거래를 제안했고.

그러고서도 혼자 남아 이렇게 자신과 잡담이나 하며 약속한 장소로 향한다.

‘제가 아무리 고검협의 제자라 해도 그 진전을 얼마나 얻었겠어. 더구나.’

하던 생각을 접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보통 창공절당(廠公節堂)이라고 부르는 동창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지. 태상께서 달리 약속 장소로 정하셨을까. 자, 이제 어떤 곳인지 알았으니 감히 들어갈 담량이나 있을지. 호호.”

굳이 설명을 보태며 비웃음을 덧붙이는데.

“취의청(聚議廳) 같은 기능이라면 중지(重地)라기보다는 금지(禁地)겠구려. 하지만, 부절(符節)을 지닌 이들만 모이는 군막(軍幕) 취급에 모이는 이들은 창공이라니. 으흠.”

또 덤덤한 해원기의 반응.

그러나 조화부인은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창붕당. 창성할 창에 벗 붕, 과연 황궁 안의 건물에 붙일 만한 멋들어진 뜻이다.

그런데 조화부인이 슬쩍 겁주려고 보탠 설명을 듣자마자 해원기는 단박에 어떤 장소인지 간파했으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의사를 결정하는 취의청. 동창이니까 당연히 고위의 태감들이 모일 터.

절당(節堂)은 예전에 군의(軍議)를 논하는 최고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당연히 병부(兵符)를 지녀야 출입이 가능했었다.

동창의 정식 명칭인 동집사창은 본래 동쪽 구석에 자질구레한 일을 모아 처리하는 헛간이라는 뜻.

창공절당이란 별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꼬는 거다.

절세검왕이든 뭐든 강호의 무부 따위가 이런 학식을 지녔을 줄이야.

조화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지만,

화르르.

기단 위의 커다란 화로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낭랑한 웃음이 넓은 평지로 퍼졌다.

“호호호, 교화, 소공자는 짧은 시간이지만 훌륭한 선생 밑에서 착실하게 학문을 닦은 적이 있거든. 괜한 심통 부리지 말고 어서 모시거라.”

창붕당 앞이 환해지면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는 등이 살짝 굽은 노인. 관복을 걸치고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바로 제독태감이었고,

오른쪽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

그리고 가운데.

해원기가 착실하게 학문을 닦은 적이 있는 걸 아는.

홍작이었다.

창붕당의 전면은 엄청난 크기의 평지. 바닥에는 석판이 깔렸고 불빛이 비치는 넓이만도 백여 명이 함께 훈련할 수 있는 연병장이다.

맞은편에도 창고 같은 건물이 늘어섰으니 창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창고를 늘어세운 구조.

아득하게 높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건 마찬가지지만, 황궁에서 이 정도로 넓은 면적을 지닌 곳은 다시 없을 터.

‘아니, 황극전(皇極殿)이 있군.’

황제가 백관(百官)의 조회(朝會)를 받고 만기(萬機)를 친람(親覽)하는 대전.

해원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창붕당 앞으로 옮겼다.

붉은색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환형(環形)의 가발을 황금잠(黃金簪)으로 고정해 선녀처럼 꾸민 차림새.

그야말로 한 떨기 작약화(芍藥花)를 방불케 하는 미모의 여인이 두 손을 가볍게 모은다.

“별래무양하셨나요? 소공자.”

해원기가 잠시 홍작의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경수사의 국사와 현도관의 태상, 마침내 동창의 배후를 다 만났구나.”

인사를 나눌 마음도 들지 않는다.

무시당한 꼴이 되었으나 홍작은 도리어 활짝 웃는 얼굴.

“어머, 그런 얘기는 녹명 앞에서 하시면 안 돼요.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은 자기가 동창을 마음대로 하는 줄 알고 있는데. 불쌍하잖아요?”

해원기의 덤덤한 얼굴에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꽉 막힌 고집불통.

홍작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녹명과 달리, 홍작은 녹명에 관해서 훤히 아는 듯.

“너도 장난감이 필요했느냐?”

묵직한 질문에,

“에에? 저를 녹명 수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 떼쟁이랑 비교하면 속상하다고요. 걔는 그냥 할 일이 없으니까 되는대로 성질이나 부리는 거지, 계획이고 전망이고 제대로 갖춘 게 없잖아요. 괜히 허황한 욕심만 그득해서.”

펄쩍 뛰는 모습도 보는 사람이 황홀할 만큼 귀엽다.

당장 좌우의 제독태감과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몽롱한 표정을 짓지만.

해원기는 평소의 무표정.

“힘을 원하잖느냐. 금오혈석 아홉 개를 쥐고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작의 자태가 확 변했다.

양팔을 가볍게 벌려 자애롭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

“이렇게 한가한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죠. 아, 먼저 말씀드리지만, 오 장로는 단지 소공자의 마음이 얼마나 굳은지 확인하는 목적으로 쓰였을 뿐,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요. 하필 방효유와 얽힌 건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거라. 제게 큰 도움을 준 춘매와 유모를 해칠 리도 없고. 경수사로 가서 단목 당주와 만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보장하죠.”

맑고 차분한 음성도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우아해졌다.

인사를 나누고 남 얘기나 하려고 만난 게 아니다.

거래.

오소민 일행을 보내주었으니 받을 걸 받을 때다.

해원기가 다시 홍작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비스듬하게 섰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화부인을 향하고 천천히 쳐드는 손에는 고색창연한 열쇠 하나.

“부인에게 건 폐혈쇄맥법(閉穴鎖脈法)이 독특하긴 해도 너라면 쉽게 풀겠지. 이건 부인에게 들려 보내겠다.”

조화부인이 눈치 빠르게 얼른 열쇠를 집어 들더니 창붕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신의 무공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중병을 앓는 것처럼 형편없는 체력이라 당장 숨이 찬다.

“헉, 헉.”

막 창고 사이를 빠져나온 판, 창붕당 앞까지는 오십 장 거리.

이 정도를 헉헉거리며 뛰는 게 속이 뒤집힐 노릇이겠지만,

짝짝.

홍작은 손뼉을 치며 또 웃음을 터뜨린다.

“호오, 교화가 비록 만상조화를 전부 받아들이진 못했어도 나름 신마지체(神魔之體)에 가까운데. 그런 교화에게 먹히는 폐혈쇄맥법이라뇨. 정말 궁금하네, 열쇠보다 소공자가 어디서 그런 수법을 찾아냈는지. 호호호.”

재미난 장난감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두 눈.

그러면서 조화부인의 지친 뒷모습이 돌연 아득히 멀어졌다.

폐혈쇄맥법 때문에 기껏해야 십 장도 달리지 못했거늘 창붕당으로 빨려들 듯이.

그뿐 아니라,

홍작의 어깨에 걸친 얇은 경사가 너울거리며 공중을 덮어가고,

좌우의 둘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번 알아볼까나.”

짝!

마지막 손뼉이 뺨을 갈기듯 매섭게 울리더니,

해원기의 주위 공간까지 물속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거래를 마쳤다고 선선히 보내줄 리 있나.

비스듬히 선 해원기가 두 발을 엇갈려 단숨에 일곱 걸음을 걸었다.

화라락.

돌풍이 일면서 안개처럼 흩어지는 신형.

홍작이 수작을 부릴 걸 미리 대비했었다.

그러나.

“칠성둔형보에 파진운보를 더한 정도로는 어렵죠.”

홍작의 웃음기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이 일렁이며 여섯 가지 색깔의 복면인이 튀어나왔다.

홍작이 어떤 수단을 써도 일단 말려드는 걸 피하고자 보법을 썼건만,

방금 벗어난 창고조차 보이지 않는 엉뚱한 공간에, 공산 백운동에서 제독태감이 거느렸던 육신사라는 자들이 또 나타났다.

그때의 육신사가 아니다. 민망하게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육합신피라는 복장이 이번의 육신사는 전부 여자라는 걸 알려주는데.

곧이어 등장하는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눈을 부릅떴다.

“으응?”

비전의 원좌라는 자. 새로운 육신사를 지휘해 막 해원기를 공격하려던 찰나에,

해원기가 보이지 않는다.

원좌의 당황한 기색을 바로 깨달은 제독태감이 급히 두 손을 교차했다.

태상이 베푼 역산전해도(易山顚海圖) 안에서 구역마다 병력을 배치하는 건 자신의 일이다.

‘위치가 조금 어긋났나? 그럼.’

시왕팔옥(十王八獄)에서 자신과 병력이 들고 나는 출입구 외에는 전부 사문(死門). 빠져나갈 길은 없다.

구역을 다시 획정해 수보와 대부들을 내보내면 그만.

현신장에 준하는 자들이 열여덟이다.

하지만,

또다시 수보의 놀란 음성이 들리자,

“어엇? 이놈이 어디로!”

제독태감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석판이 깔린 연무장의 사방 백 장. 역산전해도가 뒤덮은 공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시야가 뿌옇다.

마치 구름이라도 낮게 깔린 것처럼.

해원기는 대체 어디 있는 건가.

천하에 다시 없는 신법이라도 일단 역산전해도 아래에선 그저 같은 자리를 뱅뱅 돌게 될 터.

벗어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벌써 태상이 칠성둔형보와 파진운보까지 알아보지 않았나.

눈에서 불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데.

퍼펑!

생각지도 않았던 폭음에 몸이 덜컥 굳었다.

창붕당의 기단으로 오르는 다섯 개의 돌계단 위로 처박히는 두 개의 인영.

그리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목소리.

“원양대진력에 점고달초식, 서권송긴강기에 삼절간. 이쪽이 훨씬 근기가 훌륭하군. 이자들은 뭐라고 부르느냐? 홍작.”

구름 속에서 빠져나오듯이 홀연히 나타난 해원기가,

평범한 걸음으로 돌계단을 향한다.

저벅저벅.

그 발소리가 유난히 귀를 울리는 건 착각일까.

창붕당 앞에 선 홍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도 해원기가 어떻게 역산전해도를 벗어나 어디로 나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만약을 대비하는 호위들을 정면에 세워두지 않았다면 코앞에 다가와도 몰랐을 것 아닌가.

처음부터 해원기는 홍작을 노렸었다.

어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마음이 대담한 행동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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