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1화 (391/410)

제98장 심소담대(心小膽大) (3)

살기가 없다는 게 무엇인가.

천성이 순후해서 남과 다투길 즐기지 않고, 함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때 위축되어 물러나거나,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나보다 남을 배려하고, 웬만하면 스스로 참으려 하기에.

진짜 화를 내면 오히려 더 무서운 법.

어떻게 오소민을 겁박했는지 확인하자, 눈앞의 조화부인이 홍작의 심마령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

또 똑같은 불행을 만들려고 했단 말이냐.

검을 뽑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전에 고검이 먼저 공중으로 솟구쳤고,

검을 쥐겠다는 의지 이전에 손에는 천형검이 들렸다. 아니, 손에 들렸다기보다는 손끝에서 뛰쳐나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츠츠츠츠츠.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붉은 강기가 벼락처럼 뻗는다.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수법.

어렸을 때 교노인에게 배웠던 자전검강(紫電劍罡)이 조화부인에게 절세오검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좁디좁은 공중 다리에서 피할 곳도 마땅찮은데.

“칫.”

입술 사이로 불만을 짧게 토하는 조화부인의 신형이 순간 여덟 개로 불어났다.

공중 다리 좌우로 퍼지는 여덟 명의 조화부인, 각각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 채 자전검강을 고스란히 맞지만,

안개를 벤 것처럼 흐려졌다가 도로 선명해진다.

미심환영이 더해진 진정한 팔마반경의 신법. 어느 게 진짜 조화부인인지 알 수 없다.

“이러다간 유모를 깨우다 못해 영랑각까지, 음?”

벼락처럼 뻗는 검강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러나 여유만만하게 입까지 놀리던 여덟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해원기의 손끝이 꿈틀하면서 보이지 않는 검경(劍勁)이 일거에 팔마반경을 꿰뚫었기에.

콰직.

공중 다리 가운데가 가루가 되어 무너지고,

팔마반경이 씻은 듯 사라지며 영랑각의 이 층으로 물러난 조화부인이 드러났다.

“젠장, 비천경혼의, 음마검경(陰魔劍勁)이었구나!”

머리에 쓴 주관이 절반이나 쪼개진 조화부인.

섬전, 추풍, 탈백, 붕악, 그리고 비천경혼. 마도절세오검을 전부 익힌 자만이 이룰 수 있다는 음마검경을 그래도 막아낸 듯.

욕설을 내뱉는 불쾌한 표정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공중 다리의 남은 부분에 이어진 난간에 서서 목소리를 높인다.

“소공자, 설마 오 장로의 은인을 돌보지 않을 셈이요?”

기어이 유모를 인질로 삼는 위협.

“해 형!”

오소민의 간절한 외침이 바로 귀를 울리지만,

해원기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팔마반경을 깨뜨리느라 자전검강과 음마검경을 펼쳤던 천형검은 그새 사라졌는지.

해원기가 양손을 기이하게 휘두르는 게 똑똑히 보였다.

누대에서 이 층 난간까지는 채 십 장이 안 되는 거리. 미세한 검기의 움직임도 숨길 수 없다.

맥없이 맨손을 휘두르는 게 뭔 소용이 있나.

부서진 주관을 벗던 조화부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치는데.

스스스스.

처마와 벽, 난간과 바닥, 그리고 절반도 남지 않은 공중 다리가 먼지가 되어 흩날리고.

조화부인이 선 곳만 고스란히 해원기 쪽으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이건?”

전신을 옥죄는 무서운 기운, 함부로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 조화부인이 급히 고개를 쳐들다가 안색이 홱 변했다.

주관을 벗은 정수리 바로 위에서 고요히 회전하는 고검.

치링.

놀리듯 가벼운 검명을 내자 조화부인이 비로소 자신을 옥죄는 열 자루의 검형을 인지할 수 있었다.

두 겹.

사슬처럼 엮인 다섯 자루가 꼼짝 못 하게 공간을 묶은 뒤에 암담한 다섯 자루가 틈을 채우고 일렁거린다.

좌아아.

해원기가 훌쩍 물러나면서 조화부인이 단숨에 누대 위로 끌려왔다.

옴치고 뛸 수가 없다. 미심환영이든 팔마반경이든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바에야.

조화부인이 뻣뻣하게 선 채 눈을 깜빡거렸다.

“고검으로 미리 산신검진(山神劍陣)을 펼쳤을 줄은. 절세(絶世)를 음조(陰曹)로 삼고, 오악(五岳)을 뇌옥(牢獄)으로 삼는다라. 십절경화도해에도 이런 비결은 없는데, 설마 소공자가 창안했을까요? 호오.”

뭔지 알았다고 감탄과 함께 아무렇지 않은 척.

해원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헛된 수고는 그만둬라. 그 정도로 검을 안다면 이 십면검뢰(十面劍牢)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짐작하겠지. 홍작, 네 심혼(心魂)조차.”

“으음.”

조화부인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정수리 위의 고검을 발견했을 때부터 벗어날 생각이었다. 일부러 감탄을 늘어놓으며 틈을 찾고 있었는데.

들어본 적도 없는 십면검뢰. 정말로 이 뇌옥 안에서는 심마령이 해제되지 않는다.

이렇게 영어의 몸이 될 줄이야.

오소민이 멍하니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해원기의 화난 모습을 자신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고.

이번에는 진짜 화난 게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단숨에 조화부인의 목을 날려버릴 만큼.

그런데.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이성을 잃기는커녕 영랑각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서 조화부인을 생포하려고 철저하게 준비했었다.

여기서 조화부인을 없앤다고 오소민에게 뭐가 달라지겠는가.

조화부인은 어차피 홍작의 괴뢰에 불과하거늘.

해원기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울린다.

‘나를 되찾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거라고.’

아무리 노했어도.

해원기가 오른손의 검왕수를 가슴 앞에 세우고 말을 이었다.

“동창에선 패도오경이라고 한다던데. 지부의 오대마도를 어디서 얼마만큼이나 긁어모았는지 모르겠다만, 자부의 지혜를 계승한 태사야라도 사부님보다 더 잘 알긴 어려울걸.”

조화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교도인을 모셨던 홍작이니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

지부 오마왕과 직접 싸웠고 다섯 모두를 전부 꺾은 사람. 고검협 묵세휘는 어쩌면 오마왕보다 오대마도를 더 잘 알지도.

“곤혹도에서 심마령을 쓰는 건 왕위마들이 수하들의 마력을 증강하는 광혼(狂魂)의 술법에서 유래했으리라 추측하셨지. 심검경(心劍境)의 검진이라면 육체만이 아니라 심혼까지 가두고…….”

말을 끌면서 천천히 조화부인에게 뻗는 오른손.

“지금의 나는 그 심혼을 파괴할 수 있다.”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이지만,

조화부인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정도 오악검법이 십절경화도해에 의해 산신검진으로 구성되는 건 이미 아는 사실. 그러나 마도 절세오검이 음마검경으로 하나의 검진이 되다니.

절세오검이 뭔지는 뻔하다.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넋이 나가고, 산이 무너지고, 결국 놀라서 하늘로 날아간다. 그걸 절세라고 부르는 건 허풍이라고 여겼거늘.

산신의 뇌옥과 어울리자 진짜 세상과 끊어지게(絶世) 하잖나.

심검경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하겠나. 이 십면검뢰라면 진짜 심혼을 파괴할 수 있으리라.

‘천극에게 광혼을 막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끔찍하게 서로를 아끼는 그 재수 없는 형제가 함께 연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설사 쌍둥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심도경의 동심진(同心陣), 무쌍고천진(無雙孤天陣)까지 연성해낸 형제 아닌가.

당연히 해원기에게 가르쳐주었겠지.

여기서 심혼이 파괴되면 본체도 손해를 본다.

조화부인의 눈에 두려움이 스치고, 일그러진 입가로 억지웃음이 맺힌다.

“호, 지난 세월 쾌체로 지낸 건 세상을 속이려는 것이었나요? 소공자가 이렇게 교활하고 이렇게 독한 사람으로 변했으리라곤. 흐으음, 뭘 원하죠? 제가 직접 뵈러 갈까요?”

사로잡혔으니 해원기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

거래할 때다.

검왕수로 조화부인을 겨눈 채,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신광을 거두고 깊은 바다처럼 그윽한 눈.

“춘매와 유모가 홍작에게 진 빚은 다 갚은 건 같은데. 오 형의 생각은 어때?”

이제 오소민을 본다.

구명지은을 베푼 홍작이 조화부인의 하극상에 제압당해서 춘매와 유모는 오소민을 유인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조화부인이 홍작의 심마령인 게 밝혀진 순간부터 그간의 사정은 전부 홍작의 농간. 둘은 이용당했을 뿐이다.

“어, 하지만…….”

총명한 오소민이 바부탱이 해원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춘매와 유모가 풀려난다고 해도 절세검왕을 세상의 공적으로 모함하려는 계획은 고스란히 남아있잖나.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데,

해원기가 빙긋 웃었다.

“다른 건 따지지 마. 사부님은 신의를 무엇보다 중시하셨고, 참된 사람으로 무도를 걸으셨던 분. 평생 무림의 판도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건만, 백년 난세를 끝내셔야만 했지. 어떤 모략과 음모라도, 천기를 뒤집는 놀라운 능력이라도 세상은 결국 바른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거든.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웃는 표정이 따뜻하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일이란 게 어찌 다 뜻대로만 될까, 그저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설사 천하를 상대해야 한다고 해도.”

기능진여인의(豈能盡如人意), 단구무괴오심(但求無愧吾心).

좌우명 같은 소리를 읊더니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머뭇거리다가 마저 하는 말.

“자네를 잃을 바에는 천하랑 싸우는 게 낫지. 음, 명황실(明皇室)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해본 적 없는 허세를 부리려니 창피했는지.

목소리가 슬그머니 작아진다.

“에엥? 허어, 하, 핫하하하하!”

해원기가 이런 소릴 할 줄이야.

있는 듯 없는 듯 오소민의 뒤에 있던 정록이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으나.

오소민은 웃지 않았다.

정록처럼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싶었는데,

얼굴이 자꾸 울상이 된다.

순박하고 착실하면 흔히 답답하게 여긴다. ‘고구마 대장’이라고.

그러나 해원기는 어려서부터 답답한 적이 없었다.

처음 사부에게 뜻을 밝힐 때도, 환정곡에서 가족과 같이 지낼 때도, 심부름으로 연검지회에 참석했을 때도.

오죽하면 탁소숙이 절세검왕이란 명호를 지었을까.

본래 지녔던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기상. 그 호기(豪氣)를 오랜만에 보이는 게 부끄러운 모양인데.

“응, 응!”

그런 해원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오소민이 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뭘 동의하는 건지 확실치 않으나, 해원기는 그걸로 충분했다.

시선이 바로 조화부인에게 돌아가고,

“함께 경수사로 갈 수 있도록 춘매를 이쪽으로 보내. 은문진이든 둔법이든 다 동원해서. 그때까지는 내가 여기 있다가 너를 만나러 가마.”

다시 단호해진 목소리.

눈알을 굴리던 조화부인이 대뜸 코웃음 치며,

“흥, 소공자 뜻대로 될 거 같아요? 떨거지들을 죄다 데리고 내뺄 생각이라면. 여기가 동창이란 걸 잊었나. 아무리 연애질에 눈이 멀었어도…….”

고개를 흔들려고 했으나, 해원기의 왼손이 요대자를 더듬자 말이 끊긴다.

검왕수 대신에 조화부인의 눈앞에 내미는 해원기의 왼손.

“조화부인을 무사히 돌려주고, 이 열쇠를 보험으로 맡기지.”

현도관의 지하 비고에서 나온 열쇠.

조화부인의 눈에 기이한 빛이 번들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열쇠의 내력을 모르고서야 이렇게 순순히 응낙할 리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