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0화 (390/410)

제98장 심소담대(心小膽大) (2)

움찔했던 오소민의 고개가 삐걱대는 것처럼 이상하게 돌아간다.

배신을 강요한다. 협박으로 가둔다.

두 가지가 귀청에 왱왱거리며 맴돌아서.

본디 총명한 그녀.

해원기가 그냥 한 말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강호를 떠난다고, 모든 인연을 끊겠다고 작별을 고했을 때 해원기는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요, 그러면서도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해원기를 잘 알잖나.

답답하기 짝이 없는 ‘고구마 대장’이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누구보다 정이 많은 사람.

‘그래, 그럼 이만.’일 리가 없다.

알면서도 떠났던 건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찾아오길 기대하는 응석이 남아서였을지도.

그래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떠나야 했다.

해원기가 고통을 당하는 건 견딜 수 없기에.

그러나 지금 해원기의 덤덤한 말에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저렸다.

낙담하고 실망했으리라고,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따라 멀어지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사람은 오소민 자신이었다.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난다는 건 곧 해원기를 끊고 해원기를 떠난다는 말이었잖나.

조화부인이 내건 조건.

그건 바로 해원기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였었다.

그 아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뜬금없는 작별에, 그 속에 담긴 의도를 알고도 어찌 견뎌냈을까.

마치 이전에 그런 일을 겪었던 사람처럼.

머릿속이 헝클어져 해원기가 마지막에 묻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협박으로 떠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해 형을, 해 형을 배신하게 할 셈이었나?”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콱 막힌 음성이었으나,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중 다리의 흔들림이 가라앉았다.

예상치 못했던 해원기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실태를 보였던 조화부인에게 오소민의 억눌린 목소리는 알맞은 핑곗거리.

“어머, 조건을 더 세게 붙이려고 해도 이렇게 다정한 원앙(鴛鴦)에게 설마 그런 짓을 했을까? 오 장로도 참.”

‘그런 사이’가 ‘원앙’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소민을 살짝 흘기는 조화부인은 해원기와 오소민을 아예 한 쌍의 정려(情侶)로 확신하는 듯.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콱 막힌 데가 있었네. 뭐, 어떻든 약속은 약속, 이제 와서 다른 조건을 추가할 생각은 없으니까. 오 장로를 순음지체로 여겼던 착각도 이젠 바로잡았고,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으니. 호호.”

다시 웃음을 덧붙인다.

오소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소기의 목적?”

되새기는 입술이 떨리다 못해 전신을 휘청, 정록이 급히 어깨를 받치지 않았다면 쓰러질 뻔했다.

오소민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조화부인이 자신에게 모든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라고 했던 진짜 이유를. 의도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의도를.

해원기에게 고통을 주고, 기어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

유모를 간병하는 영랑각이라지만, 이곳은 바로 동창의 중지(重地). 해원기는 정록만을 데리고 뛰어든 셈.

이게 모두 오소민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누가 기대했단 거요?”

해원기가 다시 묻는다. 여전히 무덤덤한 음성으로.

자책에 빠지려던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평소처럼 무표정한 해원기의 얼굴을 확인했고, 그러면서 평소와 다르게 단단히 굳은 정록의 표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평정을 회복한 조화부인이지만, 역시 해원기의 질문엔 곤혹스러움을 면키 어려운지.

잠시 기이한 시선을 보내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해 대협이 이렇게 둔할 줄은. 지금 눈앞에 내가 보이지 않나? 혹시 절세검왕이라 받들어주니까 이 몸을 무시하는 걸까?”

여전히 자신이 주재했다는 주장인데.

해원기가 대뜸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남을 함부로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소. 더구나 당신은 분명히 진짜 조화부인이니. 그래도 이 모든 걸 당신 혼자서 꾸몄다는 건. 흠.”

말을 아끼는 건 믿지 못하겠다는 뜻.

경시하거나 무시하진 않지만, 상대방을 도발하는 데는 충분했다.

조화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무시보다 더하군. 아주 얼굴을 흙바닥에 처박은 기분이야. 그 알량한 무공으로 이렇게, 아니, 건방을 떠는 이유라도 들어봐야겠어. 내가 누구를 받든다는 거지? 오 장로에게 이미 들었을 텐데. 나야말로……”

분이 나서 말이 거칠어지는데.

“주교화라는 이름, 대조주가의 후손이라는 신분. 전부 들었지. 처음 수차제에서 만난 후로 그간 몇 차례나 대면했으니 우리 인연도 박한 편은 아니요.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홍작과 잠시 함께 지낸 건 알고 있소?”

반문에 다시 조화부인의 말이 막혔고,

해원기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래서 당신이 홍작을 제압했다는 소식이 영. 더구나 그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무령산의 현도관까지 들르면서 더 묘한 느낌이더구려. 작약홍랑? 흐음.”

또 하다 마는 말.

본래 말재주가 없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이게 무슨.”

조화부인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해원기는 또 얼른 화제를 바꾼다.

“부인이 어떻게 심마왕의 마공을 펼칠 수 있는지, 동창에 어찌 오대마도의 흔적이 남았는지도 참 골치 아픈 문제였다가 겨우 실마리를 찾았다오. 홍작이 본래 지나치게 쾌활해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 여겼는데, 무슨 골방 샌님처럼 연구에 몰두했다고 하더이다. 그래, 주 부인께선 마침내 만상조화를 이루셨소이까?”

홍작에 대한 내용은 오소민에게 들은 것.

그게 이렇게 풀려나간다.

한데 마지막의 놀리는 말투에,

조화부인의 얼굴에 올라오던 노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마치 얼굴을 갈아붙인 것처럼 차분해진 표정, 눈빛만이 더욱 기이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바로 기특하다는 감정이로구먼. 잘 자랐네요, 소공자.”

해원기를 부르는 칭호도 달라졌다.

해원기는 이미 이럴 줄 알았던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심마령(心魔令)이었군. 오랜만이라고 해야겠으나, 꼭두각시에게 인사를 하고 싶진 않다. 이러려고 만상조화를 이루었느냐?”

바뀐 말투.

조금 전과 달리 조화부인을 아랫사람으로 대하는데.

조화부인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살짝 모으면서 머리를 조아리니.

“재미있었잖아요. 그리고 아예 체신으로 바꾼 것도 아닌데 뭘 그리 타박하세요? 자, 기특한 우리 소공자, 워낙 바빠서 이렇게 인사 올리는 홍작을 이해하세요. 호호.”

웃음소리는 나도 얼굴은 웃지 않는 조화부인.

홍작을 자칭했다.

가운데서 듣던 오소민과 정록으로선 놀라서 자빠질 변화. 심마령이라면 과거 지부의 심마왕이 수하들에게 심령을 옮겨 괴뢰로 부리던 수법이다.

조화부인 주교화가 지부의 마공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만상조화의 영향, 그리고 심령은 이미 홍작에게 장악되었다.

오소민에게 알려진 하극상은 처음부터 거짓.

인사를 마칠 때까지 쳐다보던 해원기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바쁘다? 그래, 녹명도 어지간히 바쁜 척을 하더구나. 세상을 조용히 피하려던 태사야의 뜻을 저버린 채.”

“흥, 그 멍청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 그리고 노야를 들먹이면 뭐 달라질 게 있나요? 그렇게 애쓰던 난세를 이루어주었다고 오히려 감사해야 할 텐데? 어쩌면 지금의 국면도 모두 그 노친네가 꾸민 일일지도.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심할까. 호호호호!”

노야가 금세 노친네로.

자지러지게 웃으면서도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무표정한 게 소름 끼친다. 웃음 속에 담긴 건 바로 원망과 증오.

해원기의 무덤덤한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홍작, 너지. 네 어처구니없는 장난질도 묵과할 수 없다만, 감히 오 형에게.”

“얼씨구, 우리 소공자께서 이제 사내가 되었다. 이건가? 마음에 둔 계집 하나 놀렸다고 발끈하기는. 동이(東夷) 오랑캐의 직계가 왕호(王號)를 참칭(僭稱)해서 남만북적(南蠻北狄)을 동원해 천하대란을 일으킨다는 소리에 어찌나 놀라던지. 자칫 무림에 금무령(禁武令)을 내리게 하는 공적(公敵)이 될 거로 생각해서 벌벌 떨더구먼. 뭐, 흑수(黑水)와 백산(白山) 사이를 모조리 도륙하는 계획도 절세검왕 하나 때문에 세워질 테니까. 계집이 제 딴에는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심산이었겠지만. 호호호.”

또 귀에 거슬리는 웃음.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떨다가 정록이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다.

으득.

등을 받쳐준 후에는 그저 뒤에만 서 있던 정록. 아무 말 없이 듣던 그로서도 참기 어려웠는지.

오소민이 어떻게 협박당했는지 알았다.

고죽과 동이는 동원(同源). 절세검왕이라는 명호가 왕을 자칭해서 난을 일으키려는 단초란다.

그러지 않아도 명의 건국은 무림에 힘입은 바가 적잖아서 정하불상침의 묵계를 무시할 수 없었고,

영락제가 보위에 올라 경사를 북쪽으로 천도한 후에는 이민족에게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북쪽에는 몽고의 잔당이 호시탐탐, 남쪽 운남(雲南)에서 녹천선위사(麓川宣慰使)가 반란을 일으켜 네 차례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얼마 전이었으니.

가장 민감한 문제. 강호에 불손한 싹이 트기 전에 아예 무림을 강압하는 금무령을 내린다. 북쪽의 기마민족이 힘을 키우기 전에 요동벌을 도륙한다.

이게 전부 절세검왕 해원기 탓이라고 널리 선전하면서.

황당한 모략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 누구보다 해원기는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괴로워질 테니까.

그렇게 협박당한 오소민은 어떻게든 황궁에 남아 사태를 막아볼 셈이었겠지.

유모를 돌보고 안빈이 된 춘매를 보살피면서.

총명하고 강단 있는 방효유의 딸.

오소민으로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으리.

정록이 이를 갈 수밖에 없는데.

“그리 하거라. 어떻게 하든 네 자유지. 그러나.”

해원기의 음성이 돌연 칼날같이 날카로워지고,

성큼 거리를 좁혀간다.

“이사모와 같은 불행을 또 만들려 했단 말이다!”

차아아앙.

단호한 말과 함께 고검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단숨에 누대 위를 뒤덮는 서기는 바로 신령검. 그런데 나아가는 해원기에게선 또 등골이 오싹한 기세가 공간을 채우니.

공중 다리가 형당의 바닥을 두드리듯 울어대기 시작한다.

위이이이, 무우우.

신령검역 안에 천형검계(天刑劍界).

해원기 자신도 크게 노해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질 줄 미처 몰랐다.

이사모.

누구보다 강한 성격에 여중제일인으로 불렸던 비봉황 이벽령.

사랑하는 사부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전신에 오행명공권이라는 굴레를 채웠고, 천마의 삼마절연법에 당해 하마터면 사랑하는 이를 자기 손으로 해칠 뻔했었다.

그 후유증으로 사부의 아이를 사산(死産)하기까지. 다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사부도, 대사모도, 이사모 자신도 해원기 앞에선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 슬픔을 어찌 모르겠나.

가슴에 불이 확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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