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장 심소담대(心小膽大) (1)
오소민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고,
해원기는 문득 그 속눈썹이 참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 아니, 음, 오랜만이네. 정 형.”
그러나 오소민의 시선은 어색한 인사를 얼버무리려고 정록에게 돌아갔다.
해원기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나마 정록과는 먼저 난성의 장원에서 헤어졌으니 오랜만이란 건가.
정록도 크게 뜬 눈으로 입맛만 다셨다. 만나면 언제나 ‘화호초’라고 놀리면서 마구 대하던 오소민에게 ‘정 형’이라 불리다니.
이 어색한 인사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해원기의 입이 겨우 떨어졌다.
“잘, 있었나?”
이것도 며칠 만에 건네기엔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진심으로 염려했던 것은 단 한 가지.
공심의 계책이든 아니든, 별일 없이 건강한지가 가장 궁금했었다.
오소민이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보다시피. 대우받으며 편하게 지냈어.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를 찾았대? 아무리 해 형이라도…….”
말을 맺지 못하고 깜빡이는 눈.
“쉽지 않았네. 정 형이 없었다면.”
“응? 정 형이 무슨 재주로. 아, 녹림장관에는 특별한 추종술이 있댔지. 어쩐지 노조께서 선선히 보내준다 했더니만.”
“맞아. 만일을 위해 자네와 나에게 백일향을 남겨두셨다네. 덕분에 정 형이 단목 당주와 함께, 악 형도 왔고.”
“악 형? 허, 그 양반은 이환 소저랑 살림 차리고 잘 살 것이지 뭐 하러. 에이.”
일단 대화를 시작하자 조금씩 말이 편해진다.
그래도 이전의 오소민과는 뭔가 다르다.
녹림장관의 백일향도 바로 추측해내는 총명함은 그대로면서, 어째 단목정이 왔다는 소식은 못 들은 척.
악송령에 관해서도 반가움에 허튼 농담을 덧붙인 게 아니다.
진정으로 악송령이 온 걸 안타까워하는 눈치. 억지로 지은 웃는 표정이 금세 어두워진다.
정록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가만. 지난 얘기는 해 형에게 들었는데. 여기가 동창이라고? 그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건데? 강호를 떠난다는 괴상한 소릴 해놓고, 여기?”
한가하게 인사나 나눌 때인가.
정신을 차리면서 와르르 질문을 쏟아낸다. 오소민을 찾아낸 건 다행이지만, 이곳이 황궁의 동집사창이라면 그야말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셈.
오소민은 이 호랑이 아가리에서 왜 여염집 규수로 지내나.
조화부인과의 거래로 모든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기로 했다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뭐에 홀린 거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소구인!”
당장 달려들어 정수리를 쥐어박을 기세인데.
오소민이 안색이 변해 급히 손을 내젓는다.
“그만. 쉬잇! 이 재수 없는 족제비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조용히 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 그래서인지 예전의 말투가 도로 나오고,
내젓던 손으로 두 사람을 서둘러 부르면서,
“일단 이쪽으로. 영랑각(永朗閣)에선 큰 소리를 내면 곤란, 에휴, 하여간 어서!”
아담한 누각의 뒤쪽을 가리켰다.
궁금한 것 투성이지만, 이 황망함엔 따로 이유가 있을 터. 해원기가 얼른 정록을 끌고 오소민이 가리키는 대로 누각의 뒤로 뛰었다.
뒤쪽에는 단단하게 지은 창고. 지붕에 두꺼운 나무판을 깔아 대(臺)로 만들었고, 누각의 이 층에서 바로 건너갈 수 있게 공중에 작은 다리까지 얹었다.
앞에는 관상용 가산, 뒤에는 공중 다리에 이어지는 누대. 상당히 공들인 구조지만,
사방을 둘러싼 아득하게 높은 담장에 무슨 소용 있을까. 누대에 올라봤자 시야에는 벽돌만 들어올 텐데.
그러나.
오소민을 따라 누대에 오르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을 들였다고 해도 기껏해야 창고 지붕인데. 갑자기 시야가 탁 트여 맑은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달과 별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벽돌 담장은 어디로 갔고, 시각도 알기 어려웠던 흐린 밤하늘은 또 언제 갰나.
정록이 어이없어한다.
“이게 무슨.”
별다른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시야를 바꾸는 환경(幻境)은 분명히 고등의 술법. 딱히 사람을 헷갈리게 해서 길을 잃게 만드는 용도도 아니면서.
그저 답답함을 없애려고 이런 술법을 베풀었다니.
그 심정을 알아들었는지 오소민이 고소를 머금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유모는 심울증(心鬱症)이 있거든. 이 환경에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아.”
심울증은 가슴이 답답해지다가 숨이 콱 막히는 병증. 갑자기 심기경색(心肌梗塞)이 오면 매우 위험하다.
해원기가 바로 오소민을 보았다.
“유모가 여기 계시나?”
“응.”
고개를 끄덕이다가 힐끗 영랑각을 돌아보는 오소민.
그 얼굴에 어린 서글픔을 해원기는 놓치지 않았다.
어이없게 호화로운 환경의 술법을 베푼 누대라 여기저기 놓인 의자도 전부 도자기.
자리를 나눠 앉자 해원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얘기해 주게.”
낮은 음성에 짧은 말. 그러나 간절함이 깃들었고.
오소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시 얘기할 게 뭐 있다고. 이미 말했듯이 유모와 춘매는 목숨을 구해준 홍작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거고, 나는 또 유모와 춘매를 위해 조화부인과 거래했을 뿐이야. 아직 영랑각에 남은 건 유모의 병세가 가볍지 않아서. 아울러 조화부인이 제대로 약속을 지키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똑같은 얘기인데 해원기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
“심울증이 심하신가?”
“응. 태의원(太醫院)에서 좋은 약을 많이 썼지만, 별 차도가 없으셔. 심울증 외에도 치매(癡呆)의 질환까지. 항상 곁에서 돌봐드려야만 하지.”
기억이 흐려지고 성격도 자주 바뀌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매병(呆病)이다.
“춘매도 같이 있겠군.”
심울증이나 매병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기는 병이 아니니 친딸이 붙어있는 게 당연할 터.
그러나 오소민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춘매는 그럴 여유가 거의 없거든. 당금 황상의 후궁, 안빈(安嬪)이니까.”
“음?”
“홍작이 유모와 춘매를 구해서 어디에 거처하게 했겠어? 두 사람 다 황궁에 들어왔고, 춘매는 궁녀로 있다가 총애를 입었다나. 지금의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어지간히 궁녀들을 건드렸다니까 춘매도 그중 하나. 이젠 안빈이 누군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후궁이라는 자리가 자기 맘대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조금 의외였으나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유모와 춘매는 황궁에서 동창의 비호 아래 있었을 것이고, 삼음절맥을 지닌 춘매는 오랫동안 안정되게 지내야 하니까.
유모가 태의원의 약을 쓰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안빈의 실제 모친이란 걸 밝히진 않았을지라도.
“그렇군. 참 교활한 거래였네. 그럼 홍작은?”
춘매는 후궁, 유모는 항상 누가 돌봐야 하는 병, 오소민으로선 이들을 버릴 수가 없다. 힘으로는 구할 수 없는 상황.
조화부인은 뻔히 이렇게 될 줄 알았겠지.
문제는 오소민이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면 홍작을 살려주겠다고 한 조건.
오소민이 다시 영랑각을 돌아본다.
“본래 이 영랑각이 거처였고, 지금은 안빈의 처소인 흥안당(興安堂)에 있다더군. 무공을 전폐시키고 괴이한 약물로 중독시켜서 목숨만 붙여놓은 채로. 후우.”
해원기의 교활한 거래라는 표현 그대로.
살려준다는 최소한의 조건만 맞춰준 건가.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리자 오소민이 또 한숨을 내쉰다.
어쩐지 현도관에서 매몰차게 떠났을 때와는 다르게 묻는 대로 선선히 일러주니.
이렇게 해원기를 다시 만나 마음이 놓여서일까. 아니면 이미 체념해서일까.
감옥에 갇히는 걸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더니, 지금의 오소민이 딱 그렇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그녀의 사지를 속박한 셈.
굳이 보은(報恩)이 아니어도, 춘매와 유모의 상황은 오소민을 꼼짝달싹 못 하게 얽어매어.
동집사창의 외진 구석, 이 영랑각에 갇혔다.
해원기가 물끄러미 오소민을 보다가 일어났다.
“유모를 잠시 뵈었으면 하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몰라.”
일부러 허리를 두드리는 손길에 맑은 기운이 맺힌다.
제탁지검과 보명오석.
심울증과 매병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탁기를 없애고 목숨을 지키는 능력을 유모에게 써보겠다는 의미.
오소민이 멍하니 해원기를 보다가 벌떡 일어난다.
“아니, 왜, 왜 그러는 거야? 이젠, 이젠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과 떨리는 목소리.
“설사 유모가 호전된다고 해도. 나, 나는…….”
“이 방법부터 시작해보려고.”
속삭이듯 차분한 해원기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제탁과 보명으로 시작한다니. 뭘 하겠다는 건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정록이 결국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참, 그 총명하던 오 소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꼬. 해 형이 뭘 하려는지 모르겠어? 왜 이러는지도? 나도 이제야 비로소 해 형의 의지를 알아차렸는걸. 허어!”
그답지 않게 애처로운 어조.
오소민이 뭐에 찔린 것처럼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모를 리 없다. 굳이 총명하다고 하지 않아도.
정록이 백일향을 추종했다고 해도 영랑각까지 오는 길이 간단했겠나.
그렇게 찾아낸 오소민이 차림새까지 바뀌어 제 얘기만 늘어놓는데도,
해원기는 원망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다 얘기해주게.’
오소민에게 간절히 청한 그 말. 그래서 유모가 앓는 병을 듣고, 춘매의 신분이 후궁이란 걸 알았다.
길러준 유모가 아프다면 고칠 방도를 찾으면 된다.
황제에게도 잊힌 허울뿐인 후궁이라면 황궁에서 안전하게 빼내면 되겠지.
얘기를 다 들었으니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오소민의 얘기를 눈곱만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오소민을 얽어맨 속박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줄 궁리만.
어리석기 그지없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덤덤한 해원기의 얼굴. 오소민이 두 눈을 치켜떠 노려보았고,
“이, 이 멍청한…….”
거하게 욕설을 퍼부을 생각이었으나.
“뭐든지 할 거야. 자네를 되찾을 수 있다면. 난 원래 바부탱이잖나.”
해원기의 어쭙잖은 응대가 태산처럼 무거워서,
더는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찌 모를까.
누구보다 해원기의 성격을 잘 아는 오소민인걸.
얘기를 다 해주었다고 믿고, 어떻게든 위해줄 방법을 찾아내 전력을 다한다.
해원기의 진정(眞情)이다.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
영랑각의 이 층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공중 다리 위로 올라섰다.
“아아, 가슴이 떨리고 낯이 뜨거워져 더는 듣질 못하겠네. 해 대협도 해 대협이지만, 오 장로도 참. 여자가 그리 억세면 매력이 없어요. 쯧쯧.”
혀를 차며 빙글거리는 여인.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돌려 아는 체를 했다.
“조화부인. 몰래 엿듣는 고약한 취미가 있구려.”
머리에 작은 주관(珠冠)을 쓰고 금실로 장식한 하피(霞帔)까지 걸친 화려한 옷차림.
조화부인이 웃음을 터뜨린다.
“호호호, 고약한 취미라. 궁정의 여자들은 본래 남 얘기를 즐기거든. 그나저나, 해 대협과 오 장로는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대? 이 거래가 이렇게나 가치 있을 줄 진즉 알았더라면 조건을 더 세게 붙일 걸 그랬나. 호호호.”
재미있는 노리개라도 얻은 양.
오소민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잔뜩 찡그린 채, 정록은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데.
해원기만은 평소 표정 그대로 조화부인을 쳐다본다.
“더 센 조건이라. 예를 들자면 오 형에게 배신을 강요해서 내가 낙담하도록 한다? 뭐, 오 형을 협박해서 이렇게 가둔 것만으로도 과하다고 여기지만. 어쨌든 당신은 진짜 조화부인이겠지. 하나만 물어봅시다.”
배신을 강요해서 해원기를 낙담하게 한다.
협박으로 가두어 해원기와 멀어지게 한다.
오소민이 움찔하고, 정록의 눈빛이 차가워지지만. 반응이 가장 뚜렷한 건 조화부인이었다. 진짜인지 확인하는 해원기의 곧장 이어진 질문에.
“당신이 진실로 받드는 이가 누군지.”
드드드.
공중 다리가 격하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