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88화 (388/410)

제97장 홍홍녹록(紅紅綠綠) (4)

임모(臨摹)란 본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것이고, 때로는 본 위에 아주 얇은 종이를 대고 똑같이 베끼기도 한다.

그래 봤자 외형을 본뜨는 데 그치지만, 구도와 선의 흐름 등 화예(畵藝)의 기초를 습득하기엔 유용한 방법.

고화문(古畵門)의 기예는 형(形)만이 아니라 그 바탕인 뜻(意)을 찾아낸다. 어떤 기관이나 세상에 드문 진도라도 점과 선을 따라가면 구조가 대강이나마 그려지기 마련. 그려지고 나면 무슨 뜻으로 베풀었는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임모득의의 기예를 완성한 자는 뜻을 넘어 형신(形神)을 전부 꿰뚫어서 세상의 모든 기관진도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고까지 전해지는데.

물론 정록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기관을 건드려 함정을 발동시키거나 진도의 사문(死門)에 빠지는 걸 겨우 피하는 수준이다.

그런 자신을 잘 알기에.

정록은 임모득의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평소보다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뒤쫓아올 해원기를 위해 표기를 남기고, 기루에 접어들면서는 진짜 족제비가 무색하게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오소민에게 남긴 백일향을 놓칠 수는 없는 일.

세 개의 누각이 처마를 맞댄 형태가 함정을 숨긴 기관이라고 추측하고도 들어가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운데 누각의 기특한 계단. 기둥에 판자를 나선형으로 박은 그 계단에 백일향이 남았고,

그런 장소에 왜 백일향이 남았는지 이유를 밝히려고 부근을 더듬다가 술법에 휘말려버렸다.

기관 안에 술법이 더해졌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술법에 휘말리자마자 임모득의에 전력을 기울인 덕에,

음양루의 좌측인 음각에 떨어지는 순간 다시 비슷한 영기(靈基)를 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전이한 곳이 무수한 기둥이 열주처럼 늘어선 장소.

바로 이전에 해원기를 무령산 기슭의 뇌옥으로 보냈던 ‘통왕의 중지’였고,

거기서 고생 끝에 가장 안쪽의 문으로 빠져나오면서 사방의 벽화를 휘장으로 가린 이 희한한 방으로.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를 모르거든. 이 방에는 문이 없어. 일단 사방의 벽에 그려진 그림을 훑어보면서 누가 들어오길 기대하다가. 흐음, 과연 사라졌군.”

정록이 간단히 자신이 거친 과정을 설명하곤 이마를 문질렀다.

탁자 너머의 벽면. 해원기에게 오소민을 보았다고 휘장을 젖혀 보여주는 벽화 어디에도 오소민은 보이지 않는다.

정록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해원기가 유심히 벽화를 살펴보았다.

높은 봉우리와 절벽이 연이어지고 사이사이 기암괴석이 놓인 산. 그 아래에 구불구불 옆으로 가지를 뻗친 고목 몇 그루와 작은 연못 하나.

꽤 독특한 경관인데 그 옆에는 굵은 기둥과 정교한 난간으로 치장한 건물 일부분이 어울리지 않게 채워졌다.

기둥 한 개, 난간 한 칸, 댓돌 몇 개로 이루어진 건물의 한쪽 면이 지나치게 커서 원근감까지 무너뜨린 그림.

정록이 숨어있다가 나온 좌측의 벽화는 경수사의 쌍탑을 배경으로 음양루를 표현했고,

우측에는 담장과 아담한 정원, 그 속에 자리한 정자를 가파른 무령산에 어울리게 배치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눈을 갖추지 못한 이라도 단박에 알아볼 만큼 판이한 구도다.

정록이 이마를 문지르던 손으로 정교한 난간 부근을 가리켰다.

“아까는 오 소매가 저 난간에 기대어 연못을 구경하던 장면이었어. 그새 안으로 들어갔나 보네.”

그림이 살아있기라도 하단 건가.

어이없는 헛소리지만, 해원기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이 벽화들은 그냥 그림이 아니라,

“둔점(遁點)의 소재, 혹은 영기(靈基)를 연결한 그림이란 말인가.”

“맞아. 나도 난생처음 보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여겼던 게 정말 있긴 있구먼. 에, 화둔(畵遁)이라고, 정확하게는 영문도(靈門圖)라고 부르는데, 둔법과 은문진을 결계의 영기로 한데 묶어 왕래하게 만든 거라지. 뭐, 말로는 쉬어도. 쩝.”

정록이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흔든다.

고화문을 계승했기에 그나마 관련된 지식의 한 조각을 간신히 기억해냈으나. 설명하는 자신도 영 믿기 어렵다.

둔법 하나만도 제대로 익힌 이가 드물고, 그 갈래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거기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은문진을 더하는 건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일.

이 두 가지를 다시 결계의 영기로 묶어 그림을 통해 실재(實在)와 왕래하다니.

이 정도면 거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이나 사이부생(死而復生)과 마찬가지로 신화나 전설에 속할 내용이다.

해원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 형이니까 알아보았지. 단목 형님이라도 어려웠을걸.”

시선을 뒤쪽 벽에 던지며 손을 가볍게 밀었다.

휘릭.

부드러운 장력에 휘장이 들리며 뒤쪽의 마지막 벽화가 드러난다.

빈말이 아니었다. 과거의 천하제일지 천문노인을 사사한 단목정이라도 화둔이란 단어는 생소할 터.

고화문을 이은 정록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런 정록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었다.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은 셈인 정록이 고소를 지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두운 방. 상당히 넓지만 중당처럼 장방형이라서 좌우의 벽면이 훨씬 길다. 화폭으로 치면 전후의 벽면이 좌우의 절반 크기.

후면에는 양쪽의 기둥 사이로 내다보이는 바깥 경치를 그린 벽화.

탁 트인 긴 마루에는 앙증맞은 탁자와 작은 의자 몇 개가 놓였고, 바로 앞의 꽃밭으로 장식한 예쁜 연못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도록 난간이 없었다.

그리곤 빽빽한 나무가 담벼락처럼 늘어선 사이로 얼핏 보이는 날아갈 듯 추켜세운 처마 끝.

오소민이 보였다는 원근감이 무너진 그림과 비슷하게 뭔가 어색하고 답답한 벽화다.

“흐음, 이번엔 건물 안인가. 설마 저 건물이 이쪽 벽화에서 오 소매가 들어간. 아니지, 아냐.”

하나는 건물 귀퉁이, 또 하나는 건물 안.

건물이라는 것 때문에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던 정록이 금방 머리를 저었다.

전면과 후면의 벽화는 난간의 형태부터 달랐다.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동의했다.

“다른 건물일세. 저건 내가 마침 아는 곳이라서.”

“어, 아는 곳?”

“바로 현도관의 뒤에 붙은 저택이지.”

“흐으음.”

해원기의 눈썰미에 정록이 새삼스럽게 감탄하지만, 해원기는 미간을 찡그리며 바로 몸을 돌렸다.

후면의 벽화는 바로 경사에 와서 처음 녹명을 만났던 장소. 해원기가 어렸을 때 강유행에게 글을 배웠던 잠룡재를 고친 곳이었다.

이 방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의심과 의혹의 단서는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둔 채,

해원기의 눈이 신광을 뿜었다.

“조금 물러서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해원기의 전신에서 퍼지는 기세에 저절로 밀려난 정록이 눈을 크게 떴다.

해원기가 전면의 벽을 응시하며 두 손을 기이하게 엮어가자,

벽화가 마치 그 손짓에 놀란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절세검왕.

검으로는 세상에 견줄 자가 없고, 다른 무공이나 진법에도 두루 정통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고화문에서나 한 조각 기록으로 전해지는 영문도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놀라기만 할 때가 아니다.

“그림, 그림은 필묵(筆墨)의 유무(有無)야.”

정록이 급히 그림의 요결을 일러주었고,

해원기의 검왕수가 그 말에 맞추어 붓과 먹으로 바뀌었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해원기지만, 이치란 어디나 통하는 법. 일법통(一法通)이면 만법통(萬法通)이라고 한 가지 이치에 통달하면 다른 이치도 자연히 안다고 하지 않았나.

둔법이나 은문진을 강제로 열었던 방법. 검왕오형의 역상정위와 유야무야를 함께 펼치려다가 정록의 가르침이 딱 알맞게 깨우쳐주었다.

역상정위의 오의는 격물궁리요, 유야무야의 오의는 존멸자재다.

사물을 두드려 그 이치를 찾고, 존재와 소멸이 뜻대로 이루어진다.

필묵의 유무. 그림이란 어차피 붓과 먹으로 그리니 하나 마나 한 말 같지만.

붓과 먹이 다 칠해졌다고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

어떤 사물은 그저 가느다란 붓 선만으로, 또 어떤 경치는 뭉갠 먹물로만 드러나며, 때론 붓과 먹이 스치지 않은 공백조차 그림이다.

벽화를 억지로 비틀려던 검왕수가 삽시간에 필획(筆劃)이 되어 그림을 고스란히 다시 그려내고.

그 손을 눈으로 좇던 정록이 입을 딱 벌렸다.

딱 한 마디 했건만,

지금 해원기의 움직임이야말로 임모득의의 정수라고 할 만했으니.

그러나 이번에는 해원기의 빠른 말에,

“정 형, 내 요대자를 잡아.”

놀랄 겨를도 없이 급히 허리띠를 부여잡아야 했다.

스스스스.

낮은 소음과 함께 벽화가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해원기와 정록을 뒤덮더니,

순간적으로 원형으로 돌아가 버렸고.

방에는 이미 해원기와 정록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침내 영문도를 열고 그 그림이 실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높은 봉우리는 키보다 조금 위에, 깎아지른 절벽은 어깨에 닿고. 기암괴석은 손바닥에 올릴 크기며, 고목 몇 그루는 무릎에 스친다.

정록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거, 관상용의 가산(假山)이었네. 어쩐지 원근이…….”

원근감이 무너진 형편없는 그림이라고 생각한 건 실물을 그대로 영문도로 만든 벽화였기 때문이었다.

산수를 축소해서 관상용으로 만드는 건 부호들의 도락이라던데.

작은 연못 근처로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던 정록이 해원기의 요대자를 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기는 대체 어디야?”

사방을 둘러싼 아득하게 높은 담장. 전부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고, 그 뒤로 또 커다란 건축물의 지붕들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관상용의 가산과 그 앞의 아담한 누각 한 채. 아늑한 공간이지만, 주변의 구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름 명문 귀족이나 부호들의 크고 화려한 저택을 둘러본 적이 있는 정록조차 헷갈릴 장소니 해원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밤중에 경수사로 들어갔으니 이제 축시(丑時)쯤일까.

하늘이 어두워 별도 보이지 않는다.

해원기가 하늘을 살피고 인상을 굳히는데,

답은 바로 앞의 아담한 누각 안에서 나왔다.

“황궁의 외곽(外廓) 동쪽 끝. 동집사창이지. 에휴, 참 대단들 하시네.”

한숨과 감탄이 뒤섞인 익숙한 음성.

누각의 작은 문 한쪽이 열리고,

오소민이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으로 나섰다.

뒤로 틀어 올려 양 갈래로 곱게 늘어뜨린 머리칼엔 칠보 장식이 양쪽에 꽂혔고, 청색 나삼(羅衫)에 옥색 치마를 갖춰 입은 위에는 소매가 넓은 배자(褙子)를 늘어뜨렸다.

“어?”

정록이 눈을 껌뻑거릴 정도로 바뀐 모습.

경사에 올 때 묵소유에게 받은 소박한 백의는 어찌하고.

그러나 그 바뀐 차림새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해원기는 오소민의 얼굴만 볼 뿐.

입이 딱 붙어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다.

문 앞 댓돌 위에 선 오소민도 마찬가지.

묘한 표정 그대로 눈꼬리가 접힌 채 가만히 해원기를 응시해서.

아늑한 공간에 정적만이 흘렀다.

만나면 할 얘기가 태산일 줄 알았건만,

어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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