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87화 (387/410)

제97장 홍홍녹록(紅紅綠綠) (3)

오소민의 백일향 흔적을 찾았다고.

그래서 지나치게 마음을 놓았다.

경수사를 벗어날 때까지는 정록을 말렸어야 옳았다.

녹명과 홍작이 어떤 관계인지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경수사에 녹명이 나타났으니 홍작 역시 근처에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오소민과 정록은 어린 시절 함께 지내서 서로 별명으로 부르는 사이. 정록도 해원기 못잖게 서둘렀을 게 뻔하잖나.

누구의 명을 받들든 십이음형사나 현신장 같은 자들이. 적어도 동창의 수하들은 배치되었을 텐데.

결국은 정록까지 실종되었다.

‘내 잘못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두 손이 재단경위로 공간을 휘감는 동시에,

채애앵.

저절로 뽑힌 고검이 유성처럼 뻗었다.

하강하는 일곱 선녀를 좌우로 날려버리고 흉물스러운 반두를 단번에 꿰어버릴 검세.

그러나 녹의홍상과 홍의녹상이 재단경위를 타고 오히려 뒤섞이면서 반두의 모습까지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탕!

방문을 힘주어 닫는 소리와 함께 고검조차 맥없이 되돌아오니.

반두고 일곱 선녀고 죄다 어우러져 눈앞은 온통 홍홍녹록(紅紅綠綠), 울긋불긋해서 뭐가 뭔지 모를 지경.

해원기가 두 발을 엇갈리며 고검을 고쳐 쥐었다.

누각에 들어오자마자 느꼈던 이상함. 와실과 좌실에는 사람이 오간 흔적이 없고, 좌실 밖은 휑하니 빈 곳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거나 위층으로 올라갈 계단도 보이지 않았다.

정록의 표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해원기가 반드시 그 창문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거늘.

딱 그 방 한 칸만 와실과 좌실을 꾸며놓았을까.

‘그랬을 리 없지.’

어느 창문으로 들어왔어도 같은 결과였으리.

지금의 공격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양손의 검왕수로 재단경위, 등 뒤의 고검이 섬전추풍으로 뻗었건만 그저 방문 닫히는 소리뿐.

흉물스러운 반두와 그 반두가 불러 내린 일곱 명뿐 아니라 기둥까지 울긋불긋 물들이는 건 이미 옷자락이라고 할 수도 없다.

홍색과 녹색.

공간을 전부 먹어치우고 밀려든다.

해원기가 눈이 아린 듯 살짝 찡그렸다.

빙글 돌아가는 검극. 검은 어느새 고요한 자태로 바뀌었고 그 움직임에 얼핏 담담한 선향(禪香)이 풍긴다.

좌실과 와실을 갖춘 기방이 대여섯 개는 들어갈 넓이의 이 층. 울긋불긋 어지러운 색에 먹히던 공간을 적멸검이 가만히 감싸고.

무량대적(無量大寂)이 여덟 명의 내부를 무섭게 꾸짖었다.

퍽.

진흙을 친 듯 둔한 울림에 시야를 어지럽히던 홍색과 녹색이 와락 멈추더니.

마치 내던진 옷감처럼 여덟 뭉치가 되어 나뒹군다.

겉에다 경사를 두르고 노란 허리띠를 너울거려도 어차피 기본적으로 걸친 건 저고리와 치마. 그런데 지금은 명주 여덟 필(疋)을 끝까지 풀어낸 것보다 더 수북하다.

적멸검의 무량대적은 범위 안에 있는 자들의 내부를 파괴하는 결계검. 흉물스러운 반두와 나머지 일곱 모두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을 터.

다행히 수북한 옷감이 덮여 그 참혹한 주검을 가린 셈인데.

해원기는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찡그린 눈매를 풀지 않았다.

파파파팟.

새파란 빛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커다란 작두처럼 해원기의 양팔과 양다리를 끊으려고.

그게 철판처럼 펴진 녹색 천이란 걸 알아보기도 전에 또 시야를 가리며 덮쳐드는 붉은색 덩어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손톱만큼의 틈도 없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지만,

해원기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엇갈렸던 두 발을 틀어 반 바퀴 돌아가는 신형을 따라 고검이 폭발하듯 주위를 쪼갰다.

절세오검의 섬전에 오악검법의 기수검봉.

철판처럼 펴진 녹색 천과 덮쳐드는 붉은색 덩어리를 종횡으로 난자하는데.

그러면서 왼손에 어린 또 한 자루의 검형이 사방을 고루 짚어가는 건 눈에 띄지 않는다.

퍼퍼퍼펑!

연이은 폭음이 네 번이나 울리고서야, 확 바뀐 장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층에 방이 넷, 삼 층에 방이 넷.

해원기가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나왔던 방문은 멀찍이 우측 후면에 있고, 반두가 나왔던 맞은편은 비스듬히 좌측 전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나머지 두 개의 방문도 사선으로 이 층을 채웠으며 작달막한 여자들이 방문 앞에서 오만상을 쓰고.

삼 층은 또 이 층의 방보다 각도가 조금씩 틀어진 채, 열어젖힌 방문 앞에 선 여인 넷은 전부 산발한 머리에 십여 장이나 되는 긴 소매를 늘어뜨리고 귀신처럼 흔들거린다.

그리고 누각의 중심을 관통하는 기둥 하나에 판자를 나선형으로 붙인 특이한 계단. 이상한 구조다.

좌측 전면의 반두가 위아래를 훑고는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순역분도진(順逆分度陣)을…….”

그녀만 상황을 확인한 게 아니다.

해원기의 동시안도 벼락같이 주변을 살피다가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찡그렸던 눈을 껌뻑였다.

‘사마대가란 자의 손목에 있던 진도금환은 이 이치였군.’

순역분도진이란 명칭이 귀에 설지만, 깨뜨리고서 그 원리를 모를 리 없다.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를 서로 조금씩 어긋나게 배치한 후에 방향을 반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 은허에서 사마대가, 즉 어마태감이 몇 번이나 과시하던 건 바로 이 순역분도진을 응집한 기물이란 걸 문득 깨달았지만,

그걸 따질 여유는 없다.

누각 중심을 관통하는 나선형의 계단에서 삼 층의 우상방(右上方) 쪽에 희미하게 남은 할퀸 자국.

해원기가 왼손으로 검신을 문지르며 몸을 트는데.

“허 참, 설사 일영시반(日影時盤)이 없다고 해도 정우팔기(正隅八妓)가 금방 무너지진 않을 텐데? 그 왼손의 검, 자오간곤(子午艮坤)을 일거에 무찌른 그 검은 뭐야?”

철컥.

천장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열리면서 기괴한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구멍에 박힌 건 갓난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유리알. 멀리서 몰래 사물을 관찰하는 기관안(機關眼)의 일종이겠으나, 이렇게 크다니.

그래서 해원기가 왼손의 자재검으로 흑백연주오절검 중의 사우반고(四隅反顧)를 펼친 걸 알아챘을까.

해원기의 시선이 날카롭게 기관안을 노려보지만,

쇠를 긁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철컥거리는 기묘한 소음이 섞이면서,

“이러면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잖아. 뭐 하나라도 새로운 게 나오면 그게 뭔지는 알아야지. 에. 잠깐 기다렸다가, 그 검 또 한 번 써봐라.”

말이 끝나기 전에,

파앗.

돌연 천장이 환해지면서 기둥에 달린 불빛이 일시에 꺼져버렸다.

그러면서 이 층의 작달막한 넷과 삼 층의 귀신같은 넷이 펄쩍 뛰듯 위치를 바꾼다. 정우팔기라는 여덟이 또 순역분도진을 시작했는지.

아무 소리도 없는데 사방이 푸른 초원으로 펼쳐지고 그 위에 붉은 꽃이 헤아릴 수 없이 피어나는 광경.

그러나 기괴한 목소리는 해원기를 너무 가볍게 봤다.

진법의 이치를 이미 간파했고, 기관이 설치된 것도 노출됐거늘.

기척을 숨기고 눈을 현혹해도 이젠 소용이 없다.

검신을 문지르던 왼손이 바닥을 때리고 고검이 퉁겨지듯 천장을 무찔렀다.

우르릉.

누각을 통째로 무너뜨릴 풍뢰가 울어대는 건 조금 뒤. 검림소연의 수주개와가 누각 안에 또 한 채의 누각을 짓는다.

푸른 초원이 되었든, 붉은 꽃이 만발했든. 뭐든지 베어버리는 바람과 폭우가 되어 쏟아지는 검. 더구나 참풍검우(斬風劍雨)에 쇠라도 얼릴 냉기가 담겨서.

검왕오형으로 구현한 신령검이 무시무시한 천형검을 부르고,

그 가운데에 자재검은 또 흑백연주오절검의 삼음망세(三陰忘世)로 계단의 한 점을 찍었다.

콰콰앙!

정우팔기라는 여자들, 기관안 뒤에 숨어 같잖게 떠들던 목소리. 사방의 창문이 터져나가고, 천장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가운데 견딜 수 있을까.

그 결과를 볼 생각도 없다. 삼음망세로 찍은 계단의 한 점. 정록이 희미하게 남긴 표기 앞에서 해원기가 닫힌 은문진을 비틀어 열고 뛰어들었다.

계단의 우상방 쪽에 희미하게 남은 표기.

그것만으로는 정록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구나 반두라는 여인이 족제비 운운하면서 정록이 함정에 빠졌다고 조롱했으니.

그 표기를 자세히 살펴서 단서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불쑥 나타난 기관안의 목소리. 그게 의외의 실마리가 되었다.

기척 없이 기관안으로 구경만 했으니 역시 십이음형사 중의 하나일 터. 게다가 다른 음형사들처럼 자랑하듯 자신의 기예를 떠들었다.

일영시반. 한마디로 해시계다. 편편한 거울 면에 눈금을 새기고 가운데 막대를 세워 그림자로 시각을 알리는 장치.

거느리는 정우팔기라는 여자들이 기둥의 불빛으로 펼친 순역분도진이 허무하게 파해된 게 억울해서인지. 제대로 빛을 뿌려 천장을 환하게 만든 덕에 희미한 표기 바로 옆에 은문진의 닫힌 흔적을 발견했다.

둔법과 은문진이 모두 설치한 자의 의도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지만,

이미 몇 차례나 통과했던 해원기다.

삼음망세로 얼려 닫힌 문을 고정한 후에 자재검을 열쇠로 삼아 억지로 열었다. 검왕오형의 역상정위와 유야무야를 함께 운용했다는 자각도 없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검왕오형은 어느새 오형(五形)으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이치로 화했다.

전신이 휘청거리는 느낌.

숨겨진 진도(陣道)를 역행한다는 증거고, 곧이어 물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시야가 바뀌었다.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방. 부유한 집의 중당(中堂)보다 크지만, 사방의 벽을 휘장으로 가렸고 안에는 네모난 탁자가 몇 개나 놓여 좁아 보인다.

탁자마다 어지러이 펼쳐진 서책에, 흔치 않은 의기(儀器)와 희한한 잡동사니들이 잔뜩 흩어져서 마치 군기(軍機)를 논의하는 막부(幕府) 안에 들어선 듯.

‘아니, 그보다는 기계(器械)를 궁리하는 공방(工房)에 가까울까.’

어떻든 조금 전에 통과한 기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여기가 어딘지, 출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해원기가 고검을 등 뒤로 돌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데.

픽.

휘장 한쪽이 슬쩍 들리며 예리한 기세가 소리도 없이 목덜미를 찔러온다.

깜짝 놀랄 상황이지만, 미리 경각심을 일으켰던 해원기는 극히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검을 검집에 넣던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방어하면서 왼손이 기이하게 솟구쳐 단번에 상대의 팔을 꺾는 금나수(擒拿手).

상황을 파악하려면 누군가를 제압해야 하니 암습을 오히려 환영하는 판이다. 이 반격에 대뜸 놀란 소리가 나왔다.

“에? 종학금룡(縱鶴擒龍)?”

해원기가 팔을 잡은 손에서 급히 힘을 빼고 눈을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펼친 종학금룡의 금나수는 본래 해원기가 어렸을 때 녹림노조 방송서가 장난삼아 가르쳐준 수법.

한쪽 팔이 잡힌 정록의 얼굴이 불쑥 드러났다.

“아, 해 형이. 후우.”

해원기를 확인한 정록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비틀거린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창백한 안색이 그새 꽤 곤욕을 치른 모습.

“정 형!”

해원기가 붙잡은 팔을 부축하자 정록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다가,

“용케 찾아왔네. 해 형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 믿었지만, 하도 희한한 일을 당한지라. 기관과 진도에 술법을 그런 식으로 결합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부축하는 해원기의 소매를 거꾸로 잡아끌면서 자신이 숨어있던 휘장 한쪽을 제쳤다.

“음?”

그림. 창문도 없는 벽면 가득 정교한 그림이 그려졌는데, 그건 바로 경수사의 쌍탑을 배경으로 어깨를 나란히 한 세 개의 누각.

“해 형도 음양루에 들어갔다가 다른 곳을 거쳐 이리로 왔지? 난 왼쪽의 음각(陰閣)으로 굴러 떨어진 후에 저기로.”

정록이 서둘러 반대쪽 벽으로 달려가 휘장을 걷으니, 그곳에도 또 다른 그림. 높은 담장을 두른 아담한 정원, 가운데의 정자 아래에는 수십 개의 막대가 열주(列柱)처럼 빽빽하게 박혔고. 가파른 산기슭이 배경으로 덧붙었다.

정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정자 아래의 수십 개 막대에 해원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모를 수가 없다. 특이한 백포 복면인을 무찌르고 장전민, 노종련을 만나 조원록을 구했던 무령산 기슭의 뇌옥.

정록은 고생한 것도 잊은 채 또 부리나케 안쪽 벽으로 뛴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오 소매가 그림 구석에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정록을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

오소민이 그려진 그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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