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86화 (386/410)

제97장 홍홍녹록(紅紅綠綠) (2)

마지막에 나온 간질거리는 목소리. 오호 외에 또 다른 음형사가 있었는데 이 또한 감지하지 못했다.

엄청난 빛과 함께 여래보전이 열렸고, 다시 그 빛으로 녹명이 사라졌으니.

이번의 음형사는 녹명을 곁에서 수행하며 광둔을 펼쳤다는 의미.

그런데도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녹명의 수법이 힘을 쓰지 못하자 불쑥 튀어나와 녹명을 데리고 가버렸다.

녹명은 동창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고 했고, 십이음형사는 처음에 동창의 기초를 다졌다는 열두 명의 환관.

그렇다면 십이음형사는 녹명의 직속 수하일 텐데.

상전이 손을 쓰는 동안 그저 구경만 했단 말인가.

‘굳이 불가 절학만 쓰겠다면 차라리 국사에게 맡겨라.’

그렇게 떠든 말투도 그다지 아랫사람답지 못하다. 불가의 절학은 국사가 더 낫다고 투덜대는 듯해서.

‘삼신불존공(三身佛尊功)은 미륵제세심공을 초월하려고 원대에 라마들을 부려 시도했던 절학. 녹명이 비록 비슷하게 연성했으나 아직은.’

삼신불존공은 이름만 남았을 뿐, 완성된 적이 없다.

석가척상경, 미타금광인, 그리고 여래법화력. 각기 다른 유래를 지닌 세 가지 불문의 신공을 전부 극성으로 익혀야 대광명법신의 삼신불존공은 이루어진다.

녹명의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은 상당히 숙련되었으나. 요사스러운 녹광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세 가지 신공의 결합은 무너진 상태.

유래가 다르다 해도 이른바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는 불가 고유의 이치를 따라야만 한다.

요사스러운 녹광으로 삼신불존공은 무리.

해원기를 움켜쥐려던 보응여래수와 폭포처럼 쏟아지던 제불삼세현이 아무리 대단한 위력을 지녔다고 해도 결국은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의 변화에 불과하다.

한낱 화신불(化身佛)과 보신불(報身佛)의 능력일 뿐. 본신불(本身佛)을 구현하지 않고선 본래의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치를 벗어난 여래법화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녹광은 분명 사황령일 터.’

해원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머리를 깎고 고깔을 쓴다고, 가사를 걸치고 염주를 굴린다고 승려가 되는 게 아니다.

녹명이 현신한 후에 석가척상경으로 대우신장을 눌렀기에, 해원기의 상상지, 즉 풍뢰지결이 자연스레 불가의 무공을 제시했었다.

불가의 무공.

사부에게 배운 것은 오악검법 중 숭산의 수미전단검법뿐. 그러나 탁 소숙이 아낌없이 일러준 명왕진결(明王眞訣)은 밀교에서도 이미 그 진체를 잃은 비학(秘學)이어서.

물론 해원기는 그저 진결의 의미를 훑어본 정도였지만,

상상지가 제시한 대로 대지체, 즉 수정지력이 단숨에 필요한 공력을 일으켰고.

그건 바로 심중덕, 운혜덕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형사 오호를 꼼짝 못 하게 했을 때도 지유진에 섞여들더니,

석가척상경을 인지하자마자 위타과질(韋陀過疾)을 아예 금강부동신법으로 끌어올렸다.

상대를 공격하는 발 구름에도,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걸음걸이에도.

해원기가 쓰는 어떤 무공에도 운혜덕택이 더해지면 원하는 효과를 배가한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녹명이 궁금해 던진 질문에 단지 ‘운보’라고 대답한 그것이고,

보응여래수와 제불삼세현을 받아칠 때는 더욱 그 공능을 드러냈다.

요사스러운 사황령에 무너진 삼신불존공에 딱히 검을 뽑을 가치도 없었다.

검왕오형의 발검제형만으로 충분히 깨뜨릴 수 있다.

명왕진결이 이미 탁 소숙이 일러준 경지를 넘어 팔대명왕(八大明王)을 모조리 현현시켰고,

풍뢰지결과 수정지력이 운혜덕택에 의해 발검제형을 아예 밀적금강저(密迹金剛杵)로 승화시켰으니.

게다가 발검제형의 오의는 수발여의라.

밀적금강저를 왼손 한 번, 오른손 한 번. 연달아 두 번이나 날려버렸다.

팔엽(八葉)의 군다리명왕진까지 펼쳐진 바에야,

대일여래의 거대한 불상이 일격에 파괴될 수밖에 없다.

호법명왕의 힘이 여래의 불상을 부수는 기묘한 모순을 낳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의 싸움을 되새기면서 시선은 민첩하게 주변을 살핀다.

후원을 통과하면서 부신수영의 은밀한 경공이 더해졌지만, 속도는 신화검형에 버금갈 정도로 빨랐다.

정록이 전음으로 간단히 설명했듯이 스산한 후원. 깔끔하게 청소는 되었어도 오랫동안 사람이 들르지 않은 티가 난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건물 하나가 소사영당이겠지.

해원기의 눈이 재빠르게 정록이 남긴 흔적을 찾았고,

곧장 경수사의 담을 넘었다.

경수사에 잠입했을 때는 소사영당에 있으리라 추정되는 녹명을 찾는 게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오소민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공심의 계책이든 뭐든 일단 그녀를 만나서 왜 그랬는지 물어야 한다.

경수사를 벗어나면 더는 술법이나 진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

과연 담을 넘자 골목 건너편에 작은 들짐승이 지나간 듯 할퀸 흔적이 조그맣게 보였다.

정록의 별명은 화호초. 족제비 발톱 같은 자국을 표기로 남겼고,

해원기가 곧장 건너편으로 몸을 날렸다.

붉은 등이 다섯 개나 달린 좁은 문루(門樓). 그 뒤쪽은 또 상반되게 컴컴해서 굳이 편액을 확인하지 않아도 미리 들었던 대로 기루가 분명하다.

문루를 지나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과 여인의 교소성이 섞여 들렸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

유서 깊은 황사와 단지 골목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속세의 향락이 이렇게 질펀하게 벌어지는 곳이라니.

문루와 높은 담장, 그리고 줄지어 심어놓은 나무들이 소리도 밖으로 넘어가지 않게 한다.

문루 위에 웅크린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한겨울인데도 어울리지 않게 꽃과 나무가 가득해서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질 않고,

처마가 겹치게 바짝 붙은 삼 층짜리 누각이 세 개나 늘어섰다.

‘개봉과는 다르군.’

경사라서 그런지 회랑으로 공간을 엮은 낙양의 기루와 달리 답답할 정도로 밀집된 형태. 곳곳에 올린 분재와 조화(造花)가 등롱과 뒤섞여 어지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동시안이 그 속에서 족제비 발톱 자국을 찾아냈다.

가운데 누각, 이 층.

해원기의 좁아진 미간이 주름을 깊게 잡는다.

표기는 찾아냈으나 정록의 기척이 전혀 없다. 마지막 전음을 들은 시각과 자신의 속도를 고려하면 이쯤에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백일향이 여기서 또 다른 곳으로 이어졌을까?’

하긴 기루 누각에 오소민이 머무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은 정록이 남긴 표기를 따르는 수밖에.

그쯤 생각하고 문루에서 가운데 누각의 처마 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겨울이니만큼 누각의 창문은 단단히 닫힌 상태. 찬바람과 한기를 피하기 위해서겠지만, 겨울이 아니라도 굳이 창문을 열어서 남에게 보일 놀이는 아니잖나.

처마 위에서 다시 한번 확인.

정록이 표기를 남긴 곳은 손님을 받지 않은 듯, 다른 곳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조용하다.

대개 이런 곳의 일 층은 악기를 보관하는 창고와 기녀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의 처소요, 손님을 안내해 간단한 차를 내는 용도로도 쓰인다.

이 층과 삼 층이 소위 기방(妓房). 기녀들이 한 칸씩을 차지해 손님을 접대하고 이 정도 누각이면 기방이 총 여덟 개에서 열두 개. 한 누각의 기녀들이 한 반(班)을 이룬다.

해원기가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에 하북 남쪽에서 쾌체 일을 하며 기루에도 꽤 많은 심부름을 다녔기에 대강 기루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짐작하는데.

이렇게 왁자지껄한 곳에서 한 층이 조용한 건 드문 일.

소리 나지 않게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니 휘황한 바깥과 대조적으로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하다.

기방은 보통 좌실(坐室)과 와실(臥室)로 나뉘어, 좌실에는 술과 음식을 올린 탁자가, 와실에는 화려한 침상이 놓이게 마련. 창문을 통해 들어서자 은은한 향기와 함께 경사(輕紗)가 쳐진 침상이 보이니 와실이다.

어둠 속에서 동시안이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손님을 받은 흔적이 없다.’

침구가 단정하게 개켜진 침상뿐 아니라 와실 전체가 깨끗하다. 기루의 기방이 아니라 여염집의 규방으로 착각할 만큼.

묘하다.

기루라고 밤새 장사하는 건 아니라서, 지역의 단골이나 소위 기둥서방 같은 상객(上客)들은 일찍 찾아와 자정 전에 떠나지만.

그래도 손님을 끌기 위해선 밤새 불을 밝히고 기녀와 하녀들이 오가며 지분 내음을 퍼뜨려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꾸며야 한다.

불이 꺼진 썰렁한 기루를 누가 찾겠는가.

‘기반(妓班)을 이런 식으로 쉬게 할 리 없는데. 딱히 예기(藝妓)들의 숙소로 보이지도 않고.’

창기(娼妓)와 예기를 구분하는 아주 고급스러운 기루라면 이렇게 빽빽하게 누각이 이어졌을 리 없다.

여기는 거액이 드는 고급의 기루라기보단 거의 창루(娼樓)에 가까운 곳.

창문을 닫고 와실에 들자 외부의 잡음이 딱 차단되는 것도.

‘음?’

순간적으로 해원기가 눈을 치떴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바깥의 소음과 교성이 하나도 들리지 않다니.

수상하다는 느낌에 급히 좌실로 향하는 문을 여는데.

해원기의 몸이 굳어졌다.

누각의 가운데에 계단, 이 층에 올라서면 회랑처럼 꾸민 복도, 복도를 따라 기방이 배치되었을 터.

좌실에 들어 술 마시며 떠들다가 와실에서 기녀를 안고 잔다.

기루란 다 그런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해원기가 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휑하니 넓은 공간. 기둥이 곳곳을 받치고 바닥은 단단한 나무가 깔렸으나, 방문은커녕 의자 하나 놓이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삼 층 누각의 이 층이건만, 어디에도 계단이 없다.

텅 빈 곳.

아니, 저 반대쪽 구석에는 방이 하나 있는지 벌컥 방문이 열리고.

화려한 의상을 걸친 여인이 짧은 담뱃대를 흔들며 머리를 내민다.

팍.

기둥마다 매달린 정교한 촛대가 맞이하듯 한꺼번에 불꽃을 올리더니,

여인이 담뱃대로 해원기를 가리키며 깔깔대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어지간히 놀란 얼굴이네? 나도 좀 전에는 꽤 놀랐다구. 생각지도 않았던 족제비 한 마리가 기어들어 공들인 통로를 통째로 건드려서 말이야. 뭐, 이제라도 제대로 손님이 찾아주셨으니. 호호호.”

오십 대 후반의 나이. 반백의 머리칼을 높이 틀어 올려 갖가지 장식을 꽂았고, 늘어진 얼굴에는 분을 덕지덕지 발랐다. 짧은 녹색 저고리에 풍성한 붉은 치마, 노란 허리띠에 어깨 위에 두른 얇은 경사까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영락없이 기반(妓班)의 우두머리라 여길 꼬락서니지만.

족제비와 공들인 통로라는 말에 해원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 몇 차례나 이런 황당한 장면을 겪었었다.

휑하니 텅 빈 이곳에 뭔가 야료가 있었고, 정록은 발각되어 엉뚱한 곳으로 휘말려간 듯. 머릿속에 ‘통왕의 중지’라고 불렸던 장소가 떠오르면서,

“너는 누구냐?”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여래보전을 떠날 때 들었던 불쾌한 느낌이 되살아난다.

묻기를 기다린 것처럼 여인이 웃음을 딱 멈추고,

“나? 당연히 이 기반의 반두(班頭)지. 이 음양루(陰陽樓)엔 퇴물 기생 따위는 없거든. 아유, 얘들이 오랜만의 손님에 단장하느라 바쁜가. 뭣들 하니? 어여 내려오지 않고서.”

교태를 부리며 눈을 깜빡이는 통에 덕지덕지 바른 분이 우수수 떨어진다.

흉물스러운 모습에 하는 말도 가관.

기반의 우두머리는 흔히 퇴기(退妓)가 맡아 손님에 따라 거느리는 기녀를 배정한다. 이전의 만화원에서 처음에 나왔던 노파가 바로 그 역할로 어울리지 않게 영반(領班)이라고 불리는데.

반두는 기반의 첫째라는 의미라서 이 흉물스러운 여인이 아직 현역이라는 소리.

그 주제에 이 휑한 곳에서 다른 기녀를 부른다. 어디서 내려온단 말인가.

그런데 그 말 그대로.

돌연 공중에 노란 천이 너울대며 일곱 명이 날아 내린다.

절반은 흉물스러운 여인처럼 녹의홍상(綠衣紅裳), 나머지는 반대로 홍의녹상(紅衣綠裳). 너울거리는 노란 천은 허리띠이고, 춤추듯 가벼운 몸짓으로 흔들며 꽃잎처럼 내려앉는다.

계단이 없으니 삼 층에서 뛰어내렸을까? 아니, 삼 층이 아니라 하얀 구름이 천장 대신 위쪽을 가득 메웠으니.

선녀가 하강하는 환상적인 광경.

하지만,

해원기는 아예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성큼 앞으로 나서며 좌우로 펼치는 양손.

파팡.

떨치는 기세에 등 뒤의 방문이 박살나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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