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85화 (385/410)

제97장 홍홍녹록(紅紅綠綠) (1)

“홍작……?”

녹명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의혹이 새어 나온다.

둔법으로 대일여래의 배 위에 이른 후에는 잠시도 해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던 시선조차 초점이 흔들리고.

그러다가 눈썹이 바짝 일어섰다.

“약왕당의 단목 당주가 도착했다더니. 흠, 이 무슨 엉뚱한 힐문인가요? 조화부인은 화숙인을 부르는 칭호일 텐데, 그 아이를 부리는 게 어떻게 홍작과 연결되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의혹이 비웃음으로 바뀌어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다.

홍작을 거론한 게 단목정이라면서 무시하는 태도. 믿지 않는 걸 넘어서 어쭙잖은 술책으로 여긴다.

게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따라 여래보전을 채우는 기운.

해원기의 꾸짖음에 자존심이 상했나. 녹명이 곧장 오른손으로 해원기를 누르는 시늉을 취하고,

우웅.

가공할 경력이 쏟아졌다.

“어리석다?”

해원기의 눈에도 불꽃이 일었다.

원래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걸 극히 싫어하는 해원기다. 대우신장으로 바로 받아치려는데.

펑.

가벼운 폭음과 달리 해원기가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

우직, 우직.

그것도 바닥에 깔린 석판을 산산조각내면서.

“흥! 그깟 대우신장.”

녹명이 크게 흔들리는 해원기의 어깨를 보며 코웃음 친다.

단 한 수에 해원기를 밀어냈다는 자신감일까. 소매를 크게 휘저으며 오른손을 거두지만, 그 우아한 자세는 금세 무너졌다.

“그냥 여승 차림을 한 게 아니었군. 석가척상경(釋迦踢象勁)이 아직 전해질 줄은 몰랐다. 더구나 수법으로 바꿔서.”

해원기가 어깨를 한 번 흔들며 중얼거렸고,

또 한 번 어깨가 흔들릴 때는 이미 여래보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밀려나며 디딘 석판이 조각날 정도라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거늘, 오히려 본전 안으로 들어서는 해원기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

녹명이 손을 바꾸어 왼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우아한 자세고 뭐고 몸에 걸친 가사가 찢길 듯 격한 동작에,

콰콰콰콰콰.

폭우처럼 쏟아지는 찬란한 금광. 여래보전이 통째로 폭발할 것 같다.

해원기가 단숨에 금빛 폭우에 휘말려 휘청거린다.

그러나 그런 약세를 보자마자 녹명이 급하게 왼손을 잡아당기고,

파팍.

대전 바닥에서 흙먼지가 풀썩 날리면서 찬란한 금광이 씻은 듯 사라졌다.

휘청거리던 해원기는 어느새 본전의 가운데까지 이르러 좌우를 번갈아 보니.

바닥에 새겨진 선명한 장인(掌印) 두 개. 크기가 쟁반만 하고 깊이가 한 치를 넘어 커다란 망치로 내려쳤다고 여길 정도다.

무서운 위력인데도 해원기는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미타금광인(彌陀金光印)일까. 전부 백여 년 전에 사라져 이름만 남은 신공들이지. 혹시 다음에 펼치려는 게 여래법화력(如來法華力)이냐? 설마.”

미심쩍은 투로 말을 줄인다.

녹명이 이쯤에서 소리를 지를 줄 알았나 보다.

“고죽에 이런 무공이 있다고? 어떤 수작을 부린 거냐!”

석가척상경을 펼쳤던 오른손, 미타금광인을 휘둘렀다가 당긴 왼손. 양손을 가슴 앞에서 맞붙이려다 멈춘 채.

손바닥 두 개가 부르르 떨 정도로 고함을 지른 녹명.

그녀의 고깔 아래로 녹광(綠光)이 요사스럽게 피어올랐다.

무공이나 진법을 지나치게 파고드는 게 해원기의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 그리고 여래법화력이라니.

실전된 지 백여 년이 넘었고, 당대 소림의 방장선사라도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운 불가의 절학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타금광인과 여래법화력은 아예 라마교나 서역에서 유래하여 중원과는 뿌리가 다르고.

석가척상경도 일종의 각법(脚法)으로 알려졌기에.

불가의 최고 신공이라 불리는 미륵제세심공과는 또 다른 갈래. 이 경수사가 금대와 원대에 이루어진 절이라서일까.

더욱이 이 세 가지 절학은 한 가지 심오한 경지에 이르는 방편이라고 했다.

미륵제세심공이 십성에 다다르면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처럼.

과연.

녹명에게서 대광명법신(大光明法身)의 기미가 보이지만,

어째서 요사스러운 녹광이 일어나는 것인가.

사가(四家)의 절학이 다 그렇듯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고유의 심법을 오래도록 순수한 바탕으로 다져야만 한다.

라마교와 서역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기본은 불문의 심법이어야 옳고.

그랬다면 해원기가 무슨 방법으로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을 받아냈는지 충분히 알아볼 혜안(慧眼)도 갖추었을 것이다.

못 알아본 주제에 되레 ‘수작’이란 소리를 하고,

또 감히 ‘고죽’을 입에 담는다.

정록을 위해 시간을 충분히 끌어줄 참이었던 해원기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녹명의 고함을 칼로 자르는 듯 단호한 질타.

왼손이 오른손에 붙고, 오른손이 다시 왼손을 밀면서 불끈 앞으로 향한다.

활짝 펴진 손바닥.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벼락 치듯 빠르다.

녹명이 대뜸 냉소를 치며 손바닥을 합쳤다.

해원기가 무슨 수작으로 멀쩡한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고죽에 장법이라곤 대우신장 하나뿐.

그 잘난 검형수로 펼치지 않고, 등에 꽂은 검도 뽑지 않은 채 다시 대우신장이라니. 가소롭기 그지없다.

대광명법신을 이룬 후의 석가척상경과 미타금광인은 이미 구분할 필요가 없이 쓰일지니.

고오오.

대일여래의 조각에서 거대한 손 모양이 환하게 떠올랐다.

연화(蓮花)처럼 피어난 오지(五指). 손가락 하나하나가 여래보전의 기둥보다 커서 단숨에 해원기를 움켜쥘 것만 같다.

잡히기만 하면 곧장 으스러질 텐데.

꽈릉!

거대한 손 모양뿐 아니라 웅크리고 앉은 대일여래의 아랫도리를 단번에 꿰뚫는 무서운 굉음.

드드드드.

천장에 닿을 듯한 대일여래의 조각상이 마구 흔들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고,

조각상의 무릎 앞에 놓였던 위타천의 형상이 박살 나면서 그 위에 얹혔던 향로가 녹명의 머리 위까지 치솟는다.

“이잇.”

깜짝 놀란 녹명이 이를 악물며 힘을 주었다.

흔들리는 조각상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합장한 손이 뒤집히자,

돌연 뚝 떨어지는 향로를 따라 녹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

진짜 폭포처럼 본전 안을 휘감는 물보라. 무수한 포말이 삽시간에 공간을 채우는데.

해원기는 아예 본 척도 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왼손에 붙고, 왼손이 오른손을 밀면서 다시 한번 뻗는 동작.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에 담긴 오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꽈릉!

또 한 번의 뇌정일성(雷霆一聲).

향로가 순식간에 우그러져 녹광의 폭포를 가로로 쪼개며 되돌아간다.

그야말로 거꾸로 솟구친 번개처럼.

당장 미간으로 닥쳐드는 통에 녹명이 황급히 합장한 손을 풀어 막아야만 했다.

땅!

쇳소리와 함께 향로가 그대로 천장을 뚫고 날아가고.

그 바람에 앞으로 기울었던 대일여래의 머리 조각이 한 움큼이나 부서져 내렸다.

본래 본전 안을 굽어보는 형태로 안치된 조각상이 엉덩방아를 찧은 것처럼 뒤로 흔들리며, 배 위에 단정하게 앉았던 녹명은 가슴에 처박힌 꼬락서니. 머리에 쓴 고깔도 벗겨져서 동그란 머리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얼굴을 물들였던 녹광조차 창백한 안색을 감추지 못한 채.

해원기가 두 손을 거두어 양쪽을 겨누었다.

“불상을 부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끝까지 거기서 내려오지 않으면.”

그러고 보니 해원기는 처음에 대우신장으로 밀려난 후부터 단 한 번도 녹명을 보지 않았다.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양손을 번갈아 뻗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을 뿐.

묵직한 음성이 낮게 깔리며,

스스스스.

해원기를 중심으로 기이한 형상이 지면에 그려진다.

바람을 타고 구름이 몰려들 듯이.

“보응여래수(報應如來手)도, 제불삼세현(諸佛三世現)도…… 어, 어떻게? 검을 뽑지도 않고서. 으.”

녹명의 입술이 달싹거리고, 고깔이 사라진 이마를 더듬는 손끝이 바르르 떤다.

하마터면 대광명법신조차 우그러진 향로에 깨질 뻔했다.

제때 막지 못했다면 대일여래의 머리 조각처럼 이마가 부서졌을 터.

이 무슨 황당한 결과인지.

신왕공의 천손검법이라도 능히 상대할 대광명법신이라고 여겼거늘. 해원기의 장법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불신으로 흔들리는 시선이 간신히 아래를 향하고서야 지면에 그려진 형상을 발견했고,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단어.

광둔으로 이르렀을 때 오호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해원기의 보법.

‘운보라고 했었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바로 해원기를 중심으로 팔방에서 몰려드는 구름이다. 녹명 자신이 아직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건만, 해원기는 마치 구름을 밟고 떠 있는 듯.

게다가 구름 속에서 동심원을 이루며 서서히 일어서는 건 그토록(?) 기대했던 검형.

이제야 검을 쓰려는 것이냐.

자존심이 상해 이가 갈리고, 불상의 가슴팍에서 용을 쓰며 일어났다. 당장 뛰어내릴 셈.

그런데.

“에휴, 신니께선 그 무슨 고집이시람. 굳이 불가 절학만 쓰시겠다면 차라리 국사에게 맡기시지. 저는 아예 까맣게 잊으셨습니까요?”

간질거리는 음성이 울리면서 대일여래의 조각상이 돌연 엄청난 빛을 뿜는다.

번쩍.

지평선에서 불쑥 떠오른 아침 해를 직시한 듯한 착각.

해원기도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또 기척 없이 끼어든 자. 오호와는 다른 목소리지만 십이음형사가 분명하다.

여기서 주춤거릴 수는 없는 일. 양손이 거침없이 종횡을 가르고 상하를 아울렀다.

재단경위와 검림소연.

하지만, 운혜덕택을 머금은 팔풍팔뢰가 이미 군다리명왕진(軍茶利明王陣)을 이루었기에.

검왕수가 여래보전 전체를 단숨에 뒤덮는다.

콰쾅!

폭발하는 대일여래의 조각을 관통해서 후원으로 몸을 날린 해원기가 잠깐 뒤를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시각을 빼앗은 엄청난 빛. 그게 여래보전이 열릴 때 뿜어져 나왔던 금광과 같다는 걸 깨달았고, 녹명과 새로운 음형사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불쾌한 느낌.

[해 형, 오 소매를 찾았어.]

직전에 정록의 전음을 들었기에.

서둘러야 할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처럼 음형사가 끼어들어 녹명을 데리고 간 셈이잖나.

또 공교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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