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 현도삼보(玄道三寶) (4)
“소공자?”
고깔이 조금 들리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낸 녹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지만,
해원기는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는다.
녹명은 해원기에게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고, 해원기는 그런 녹명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말없이 흐르는 시간.
그러다가,
녹명이 돌연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머리에 쓴 하얀 고깔과 몸에 걸친 승복이 화라락 나부끼더니.
순식간에 화의(華衣)를 걸친 인물로 바뀌었다.
묶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그린 듯 고운 눈썹에 둥그런 눈매가 천진스럽고. 오뚝한 코에 조그만 입술 아래로는 각진 턱이라 여자인지 남자인지 얼핏 구분이 가지 않는 외모. 하얀 피부에 수염도 나지 않아서 나이조차 추측할 수 없다.
눈이 어릿할 정도로 신기하게 외모를 바꾼 인물이 여전히 머리를 까닥거린다.
“크큭, 어떻게 알았을까? 국사가 직접 봐도 분간하질 못했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을 섞기는 했어도 조금 어색해진 말투.
자신의 변용이 이렇게 쉽사리 간파된 게 영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해원기는 그저 바라볼 뿐. 신광이 맺힌 눈길이 더 압박감을 준다.
화의 인물이 할 수 없다는 듯 소리 내어 입맛을 다셨다.
“쩝, 까다롭게 구네. 그래, 난 오호(五號)다. 어떻게 눈치챈 거냐?”
어지간히 궁금한지 다시 묻는 말에 해원기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사람은 좌우 얼굴이 미묘하게 다르지. 혹초반영은 좌우가 바뀌는 약점이 있다. 녹명은 여기 없나 보군.”
답을 일러주면서 슬쩍 돌리는 시선.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허, 그걸 알아본다고…… 어, 어이!”
오호라고 밝힌 화의 인물이 해원기의 기색에 황망히 목소리를 높였다.
경수사에 잠입해 한바탕 야료를 부려놓고 나타난 녹명이 진짜가 아니란 걸 알자 미련 없이 떠날 것 같잖나.
십이음형사의 하나인 자신은 아예 눈에 두지도 않은 채.
괜히 급해진다.
“야밤에 황사에 함부로 침입하는 건 중죄라고. 더구나 감히 호법문전의 사천왕상을 부수고, 에, 또 향로에다 쌍탑에 걸린 등까지. 이건 난동이야, 난동. 당장 무릎을 꿇려 오라를 지워야 마땅할. 쳇.”
스스로 말이 구차해진 걸 깨닫고 혀를 차는데도.
해원기는 아예 대전 쪽으로 비스듬히 서버렸다. 구경이라도 할 것처럼.
여래보전(如來寶殿).
금대에 창건하고 원대에 쌍탑을 올렸다더니 본전의 이름도 독특하다. 그 편액을 훑어본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얘기를 조금 더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 너도 헛소리는 그만하고. 내가 온다는 건 어디서 들었느냐?”
말과 함께 한 걸음을 내디뎠다.
움찔.
오호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가 얼른 자세를 가다듬는다.
“어디서 듣긴. 신니(神尼)께서 너를 찾아간 게 얼마 전. 네가 결국은 찾아올 게 뻔하잖으냐. 때를 못 맞추긴 했다만.”
틀린 말은 아니다. 워낙 복잡한 일이 연달아 벌어지긴 했으나 실상 녹명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해원기가 또 끄덕끄덕.
“국사와 같이 입궁했나? 흠. 그래도 음형사 하나만 달랑 놔두고 절을 비운 건 좀 의외군. 황사가 아니라도 동창이나 금의위가 꽤 몰려있을 줄 알았더니.”
“음형사 하나? 허, 아주 우습게 보네. 쓸모없는 허수아비들을 일이 백 채워놓는 것보다야…….”
“그래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느냐? 쯧쯧.”
하나만 달랑,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지막에 혀까지 차는 통에 오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모습을 보이기 전에는 안목이 낮다느니, 고검협의 체신이니 하면서 조롱하던 오호지만.
일단 해원기가 말을 받아주기 시작하자 오히려 희롱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도발은 해원기도 능란하다. 탁 소숙에게 배웠으니까.
약이 오르는 걸 억지로 참느라 불룩거리는 양쪽 볼. 조금 지나고서야 겨우 말이 나온다.
“나 혼자라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저 쌍탑의 근거원묘와 사천왕을 구현한 게 정말 나 혼자일까?”
쓸모없는 허수아비라고 떠들더니 돌연 딴소리.
그러나 해원기는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가늘게 뜬 눈을 천천히 오호에게 되돌렸다.
“네 딴에는 희롱할 생각이었겠다만, 녹명의 모습으로 나온 건 실수지. 이 경수사가 텅 비었다고 가르쳐준 것과 다름없으니.”
“으음.”
말이 턱 막힌 오호. 이번엔 안색도 변했다.
해원기의 말이 정통으로 자신의 속내를 찔렀기 때문만이 아니다. 듣자마자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느낌. 해원기가 왜 딴청을 피우며 자신과 대화를 이어갔는지.
그리고.
오호의 둥그런 눈매가 찢어질 듯 커져 해원기의 좌우를 정신없이 살핀다.
“어, 어디 갔지?”
해원기에게 정신이 팔려 깜빡 잊었다. 해원기의 등 뒤에 숨었던 정록의 존재를.
어차피 해원기 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같이 왔으면서 나와서 싸우지도 않는 별 볼 일 없는 자라고 여겼다.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하는데.
해원기가 성큼 다가온다.
사아아아.
“이제는 내가 물어볼 게 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검기핍인의 기세. 갑자기 왜 기세를 일으키는가. 오호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황급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무인의 싸움에선 대개 같이 기세를 올리거나 아예 먼저 공격을 발동하지만,
시야가 언뜻 흔들리는 것 같더니 오호의 키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해원기의 발이 먼저 바닥을 힘차게 밟았다.
쿵.
여래보전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
“윽.”
오호가 짧은 신음을 토하면서 누가 잡아끈 것처럼 머리를 치켜들었다.
“어딜 가려고? 본뜰 게 없으면 그 잘난 거울 장난도 소용없나 보다.”
쿵, 쿵.
해원기가 거침없이 묵직한 걸음을 옮기고,
오호는 오만상을 쓴 채 들어 올린 손을 내리지도 못한다.
근거원묘. 가까우면 커 보이고 멀어지면 작아 보인다. 오호가 처음에 잘난 척하며 떠든 소리가 바로 그가 지닌 비결. 향로에 새겨진 문양과 호법문전 안의 사천왕상을 정괴처럼 움직였던 핵심이다.
해원기의 기세에 대뜸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지유진을 곁들인 기이한 보법이 놓아주질 않는다.
단번에 좁혀드는 거리.
술법은 발동하지 않고, 전신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라도 묶인 듯 움직일 생각을 않고.
“이, 이익.”
오호의 안색이 허옇게 질려 이마엔 진땀이 맺힐 지경인데.
덜컥, 덜컥.
여래보전의 문이 전부 안으로 접히면서 금광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왔다.
쌍탑에 가득 걸렸던 등불 때문에 한밤이 무색하게 밝았던 경내.
고검으로 그 등불을 끄면서 다시 어둑해졌는데.
여래보전에서 쏟아진 이 금광은 순간적으로 시야를 빼앗을 정도로 강렬했고, 쏟아지자마자 금방 사라졌다. 대신에 코끝을 스치는 진한 향내.
기이한 보법을 멈춘 해원기가 활짝 열린 여래보전으로 몸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 오호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는 건 뻔한 일.
거대한 기둥이 다섯 개니까 앞뒤의 간격을 생각하면 여덟 칸짜리 큰 건물. 좌우의 좁은 문과 가운데의 큰 문이 전부 사라져서 기둥만 남았고.
그 안에는 웅크리고 앉은 거대한 불상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높이가 삼 장은 될까. 지붕을 뚫을 것 같은 여래의 머리가 앞으로 약간 기울어서 누구든 압도되는 느낌. 사람 키보다 큰 손바닥 두 개가 병풍처럼 실내의 좌우를 꽉 채웠다.
나무로 짜 맞춘 바닥에는 흔한 불구(佛具)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두 개의 위타천(韋陀天)이 받든 향로 하나.
주먹만 한 두께의 향이 가득 꽂혀 향연이 자욱한데.
불상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던 해원기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 특이한 불상의 불룩한 배 위에 단정하게 앉은 녹명이 자욱한 향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에.
“쯧, 이건 광둔(光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암둔(暗遁)? 어쨌든 중이 부처 위에 올라앉는 건 보기 거북하구나.”
여래보전이 열리면서 쏟아진 금광. 그리고 실내를 자욱하게 채운 향연. 이 두 가지가 녹명이 둔법으로 출현했다는 증거다.
어디선가 급히 오려고 둔법을 썼다는 건데. 그 둔점(遁點)이 하필 불상의 배 위라니.
불편한 표정으로 눈길을 거두자,
녹명이 미소를 지었다.
“이건 대일여래(大日如來)니까 광둔이 어울리겠네요. 그리고 불법승(佛法僧)이 본래 하난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불가에서 말하는 삼보(三寶).
해원기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고깔 쓰고 가사 걸쳤다고 부처 행세라. 라마교의 불상이 화려하다지만, 이렇게 남의 잘난 체에 쓰일 줄은 몰랐을 거다. 뭐, 됐다. 음형사라는 겁쟁이들이라도 아끼는 마음에 급히 달려온 건 잘한 거니까. 그보다 궁금한 게 있다.”
활짝 열린 여래보전의 앞에.
팔짱을 끼고, 턱을 오연히 들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을 오히려 아래로 보는 듯. 말투가 딱딱하다.
녹명 역시 미소를 거두며 냉랭하게 받는다.
“부처 중에서도 최고위(最高位)인 대일여래라도 소공자에겐 하찮은가 보죠? 하여간 고죽의 후예랍시고. 나도 궁금해요, 조금 전에 오호를 꼼짝 못 하게 만든 그 보법은 또 뭔지.”
지지 않으려는 대응.
둔법으로 온 순간에 오호가 곤경에 처한 원인을 알아봤던가.
해원기가 선선히 답을 알려준다.
“운보(雲步)라고 한다.”
“운보? 채운보(彩雲步)도 아니고 승운결(乘雲訣)로도 보이지 않던데. 아니, 애초에 채운보나 승운결로 오호를 묶을 수가 없지. 언제 입무(立舞)가 변했을꼬? 지유진에 칠성둔형보 따위를 섞는다고 달라질 리가 없거늘…….”
단순한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녹명.
채운보나 승운결은 당세에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요결이요, 입무는 고죽의 기본공 중 하나. 게다가 거의 쓴 적 없는 칠성둔형보도 거론한다.
해원기의 무공을 상당히 세밀하게 조사했다.
그러든 말든.
해원기는 묵묵히 듣기만 한다. 궁금하나 게 있다는 말을 먼저 꺼내고도 질문을 양보한 채로.
시간을 끌기 위해서.
임모득의를 펼쳐 경수사에 녹아든 정록. 해원기가 수사영당을 강조한 뜻을 금방 알아채고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사천왕상을 정괴로 오인하게 한 건 혹초반영. 빛과 거울을 통해 사람을 홀린다. 어떤 비결로 운용하는지는 감도 잡을 수 없지만, 임모득의라면 경수사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본전을 지나 후원으로. 소사영당을 목표로 삼았는데.
눈을 감은 탓에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져서일까. 후원에 들어서자마자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백일향. 그것도 오소민에게 뿌린 백일향이다.
본전 뒤의 후원은 미리 살폈던 것보다 훨씬 좁았고, 위치와 방향도 훨씬 치우친 곳. 소사영당을 따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좁은 후원에 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집은 딱 한 채뿐이었으니까.
누가 경수사 주지의 거처라고 했나. 적어도 십 년은 사람의 왕래가 없었을 버려진 집이었다.
그리고 백일향이 점차 진하게 풍기는 쪽은 후원 담장 뒤의 바깥.
빈 승방에 이어진 암자가 아니라 담장 뒤는 불빛이 찬란하고 흥겨운 음악이 울리는 불야성이다.
제갈봉이 처음에 설명했던 기루들이 즐비한 골목.
해원기에게 작별을 고하고 현도관을 떠났다더니. 뚝 끊겼던 오소민의 백일향이 왜 경수사의 후원을 거쳐 기루 골목으로 이어질까.
오소민의 백일향을 확인하자마자 해원기에게 전음으로 알렸고.
해원기는 어떻게든 정록을 위해 시간을 끌었다.
녹명이 둔법으로 나타난 후에도.
그래서 녹명의 중얼거림이 끝나고 나서야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이젠 내가 물어보자. 동창을 네가 만든 장난감이라고 했었지. 그러면 조화부인도 네 수하냐? 아니, 차라리 이렇게 묻는 게 낫겠군. 처음부터 홍작을 데리고 시작했는지.”
“음?”
녹명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단정하던 자세까지 흐트러진다.
그 반응을 살피며 해원기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지고.
“현도(玄道)는 홍작에게 씌우고, 너는 삼보를 위장해서 사람들을 속인다라. 그 교활한 궁리를 과거의 사마에게 배웠으렷다? 고얀!”
꾸짖음에도 녹명이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꿈틀거리는 눈썹과 흔들리는 눈, 그리고 비틀린 입가가 꽤 당황한 눈치다.
절령제이십사(節令第二十四) 대한(大寒)
일 년의 마지막 절령.
대한은 소한과 마찬가지로 날씨가 춥다는 걸 표시하는 절령으로 그 추위가 극한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물론 북쪽 지역에선 대한이 소한보다 덜 춥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대한은 가장 추운 날이 된다.
동지에서부터 시작한 연말 행사는 더욱 빈번해져,
찹쌀밥과 납팔죽(臘八粥)을 지어먹고, 연회를 열어 마음껏 술을 들이켜며, 묵은 먼지를 털고 창호를 새로 붙인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함께 어울려 장을 보고 제사에 쓸 음식을 장만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니.
새해를 맞을 준비라.
겨우내 가라앉았던 생기를 다시 일으켜 사람들 사이에 활기와 기쁨이 샘솟는다.
비록 풍설천지(風雪天地)라도 혹독한 추위 끝에 온기가 슬며시 일어나 쇳덩이처럼 얼어붙은 세상이 마침내 부드럽게 풀려나갈 걸 알기에.
멀지 않아 다시 봄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