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83화 (383/410)

제96장 현도삼보(玄道三寶) (3)

눈에 보이는 거체는 실재가 아니다.

지국천왕의 형상이 일어서는 순간에 알아챈 것은 아마도 상상지. 풍뢰지결이 거침없이 원형을 찾아 뻗고, 수정지력이 힘을 북돋우면서 운혜덕택이 역상정위를 시전했다.

과연 지국천왕은 짓밟으려는 거창한 발보다 더 아래쪽에 원형이 있었다.

일단 원형이 파악되면 거체 따위에 눈이 팔릴 리 없다.

광목천왕이 달려들든, 좌우에서 또 슬그머니 두 개의 거체가 일어서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호법천왕이라고 떠들었으니 어차피 사천왕(四天王)이 나올 터.

계단 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이고 본전 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방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겠지.

지국천왕이 칼과 보주, 광목천왕이 보탑과 삼차극, 나머지 두 천왕도 양손에 신기(神器)를 든다던데.

그런 생각이 얼핏 들어서였을까.

역상정위가 돌연 팔풍팔뢰를 불러냈다.

칼과 보주라면 검과 도가, 보탑과 삼차극이라면 창과 도끼가. 곤봉과 채찍에 깃발과 방패 또한 이르르니.

사방(四方)이 아니라 팔방(八方)이 한꺼번에 으깨진다.

따앙!

쇠가 쪼개지는 굉음 한 번.

동시에 십여 장이나 되었던 평대의 폭이 절반으로 확 줄어들고, 그 위에 아담한 향로 네 개가 뒤집혀서 구르는 광경이 드러났다.

“에? 정괴(精怪)…….”

해원기의 뒤에서 잔뜩 긴장했던 정록이 얼이 빠져 말을 맺지 못한다.

웬만한 진세나 기관은 알아보고 피할 능력이 있는 그지만, 방금의 사천왕은 실물과 같았다. 그런데 겨우 아담한 향로 네 개.

이 어이없는 광경에 당황해버려서 그만 사물이 오래 묵으면 정괴로 화한다는 허황된 옛이야기까지 중얼거렸는데.

해원기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현출원형(現出原形)이라.”

오래 묵은 사물이 정괴가 되면 다른 사물, 혹은 사람으로 둔갑했다가 구축될 때는 원형을 드러내게 된다던가.

역시 옛이야기에 나오는 대목. 그대로 받아들이는 해원기의 대답에 정록이 얼떨떨했다가 눈을 부릅떴다.

평대의 석판 위를 구르는 네 개의 향로. 그 위에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바로 사천왕임을 비로소 발견했기에.

그 문양은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 일 장이 넘는 크기의 사천왕으로 화했다면 진짜 정괴란 건가.

장난스러운 음성이 또 끼어든다.

“원형은 따로 있지. 그것들은 향로잖아. 자기한테 올리는 향이 끊겼다고 사천왕이 노했겠는걸. 히히.”

향로는 향을 꽂는 그릇이요, 향을 사르는 건 믿는 신에게 공양을 올리는 뜻이다.

사천왕의 문양이 새겨진 향로라면.

정록이 부릅떴던 눈을 마구 껌뻑이며 중얼거리다가,

“경수사는 세속의 절이라 산문(山門)이 없어. 쌍탑도 고승들의 유해를 담은 부도니까. 이 평대부터가 본래 절의 입구, 사천왕을 모신 호법문전(護法門殿)이…… 윽.”

쿵, 쿵.

바닥이 크게 흔들리는 통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석판을 고르게 깐 평대가 무너질 듯한 진동. 그건 본전 쪽에서 툭 튀어나온 형상이 거칠게 달려들기 때문이었다.

평대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아득하게 멀어졌던 본전도 와락 가까워졌고,

본전 앞에 입구 역할을 하는 길쭉한 형태의 건물도 드러났다.

안에는 양쪽으로 두 개씩 네 개의 사천왕상을 놓은 호법문전일 테니 그 안에서 튀어나온 형상은 당연히.

몸을 바짝 낮춰 중심을 잡던 정록이 턱을 주억거린다.

“이건 또. 경수사가 아니라 난약사(蘭若寺)냐?”

옛날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귀신소굴이 된 절 이름. 기가 막혀서 또 입을 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면을 울리며 달려드는 형상은 모두 넷. 아까의 거체와는 달리 전부 오 척 정도 되는 크기지만, 영락없는 사천왕이다.

큰 정괴를 잡았더니 이번엔 작은 정괴가 나오나.

기막힌 광경이 이어지는데도 해원기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기척 없이 공중을 울리는 장난스러운 음성은 무시하고 되레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정록의 혼잣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

정록이 놀란 김에 마구 떠드는 게 아니다.

암자 지붕에서 절의 형태를 살핀 후에 들어왔으나 그때부터 착오가 있었다.

성곽처럼 사방으로 늘어선 승방과 쌍탑이 자리한 넓은 전원까지 거짓은 아닐 터. 그러나 경내에 들어오자 감각이 교란되었다.

‘쌍탑이 핵심이었겠지. 절에 들어서면 어느 곳에서든 시야가 쌍탑에 걸리니.’

대강 절의 구조를 파악했다고 여긴 게 실수였다. 쌍탑 위로 계단, 계단에 오르면 본전이 나온다는 평범한 생각도 착각. 평대와 평대 위에 늘어놓은 향로, 그리고 그 향로 뒤의 호법문전을 하나도 파악하지 못했잖나.

정록이 향로를 보고 정괴라는 허튼소리를 하고, 경수사의 구조를 혼자 중얼대는 이유가 있다.

세상에 드문 진도와 흉험하기 짝이 없는 기관이라도 능히 잠입할 수 있는 능력. 강호사괴 중의 주장선은 고화문(古畵門)의 전인이고, 정록도 틀림없이 그 능력을 이어받았을 터.

‘금기서화(琴棋書畵)의 고사사예(古士四藝). 고금문의 종 백부가 음률에 정통했듯이 정 형도 화예(畵藝)를. 흠, 그림이라.’

정록에 대한 믿음을 되새기다가 눈썹이 꿈틀했다.

‘혼암미식, 파경편조라고 했었지. 그리고 지금은 근거원묘에 원형은 따로 있다고.’

십이음형사라는 자들이 괜히 의미 없는 소리를 떠들며 잘난 척했을 리 없다.

검은 천으로 덮어씌우듯 공간을 캄캄하게 만들었던 게 혼암미식. 수백 가닥의 천 조각으로 흩어져 공간을 채우려던 게 파경편조.

무공인지 술법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던 기괴한 재주였었다.

글자 뜻을 깊이 살펴본 적이 없었구나.

어두컴컴하니 아직 닦지 않았고. 깨진 거울은 조각마다 전부 다르게 비친다고. 그러면 근거원묘는 가까우면 크고 멀면 작다는 뜻이다. 게다가 크든 작든 원형이 아니라고 했으니.

죄다 거울이다.

파앗.

두 눈의 신광이 번갯불처럼 일었다.

쿵쿵쿵쿵.

울긋불긋한 차림새에 오 척밖에 되지 않는 사천왕상이 발까지 맞추어 달려드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지만.

지면을 흔들며 덮쳐드는 기세는 산악이 무너지듯 무지막지하다. 채 십 장도 되지 않는 거리.

해원기가 양손의 검왕수를 빠르게 교차하며 나직하게 외쳤다.

“정 형, 소사영!당을!”

아직 본전에도 이르지 못했는데 후원에 있는 목적지를 왜 입에 올리나.

그러나,

치잉!

해원기의 등에서 검이 저절로 뽑혀 나오는 소리에 정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이 팽이처럼 맴돌아 선풍을 타고 치솟는데, 주인인 해원기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전면으로 손을 뻗는다.

그리고 소사영당에서 굳이 영(影)이란 글자를 힘주어 외친 건 뭔가 단서를 잡았기 때문.

바짝 낮춘 자세 그대로 게가 기듯이 슬금슬금 위치를 바꾼다.

어떠한 진법과 기관이라도 말단을 찾아 그 흐름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고화문의 비결, 임모득의(臨摹得意)를 펼치기 시작했다.

해원기는 정록의 움직임을 예상했던 것처럼,

교차한 양손이 손가락을 활짝 펴며 종횡으로 엇갈렸다.

검왕오형의 재단경위지만 열 손가락에서 쏟아지는 건 시퍼런 번개.

우르르릉.

사천왕의 바로 앞에 번개가 그물로 짜여 늘어선다. 이른바 뇌전검망(雷電劍網), 재단경위의 오의인 저사직금에 힘입어 사천왕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듯.

우렛소리에 쿵쿵거리던 진동까지 지워지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천왕.

번개의 그물 따위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지 손에 든 병기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무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해원기가 펄쩍 앞으로 뛰며 펼쳤던 열 손가락을 와락 움켜쥔다.

사천왕과의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며 오히려 뇌전검망을 자신이 뒤집어쓸 것만 같다.

이 무슨 성급한 반응. 자신의 검세에 자신이 뛰어들다니.

열 손가락에서 줄기줄기 뻗는 번개. 그 번개가 종횡으로 엮인 그물.

공간을 채우는 뇌전검망이 워낙 대단해서, 선풍을 타고 치솟은 고검의 행방을 순간적으로 잊게 했고.

동시에 풍뢰지결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도 감추었다.

풍뢰지결을 운용한 검왕오형은 본디 공격. 이전의 폭풍만뢰, 질풍치뢰, 백풍흑뢰가 모두 무섭게 휘몰아치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물이라. 달려드는 사천왕을 일단 멈추게 하려는 방벽(防壁)이다.

쇄애애액.

우렛소리에 숨어 고검이 공중을 치달리는 걸 아무도 몰랐다.

선풍이 표풍으로.

칠층탑과 구층탑의 뾰족한 탑찰을 그대로 꿰뚫는다. 아무런 폭음도 내지 않고.

임모득의를 펼치던 정록이 갑자기 시야가 흐릿한 느낌에 눈을 치켜떴다.

“음?”

대낮같이 훤했던 경수사 경내. 왜 갑자기 어두워지나.

팟팟팟팟.

그건 쌍탑에 걸린 무수한 등이 위에서부터 줄지어 꺼지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해원기가 양손을 한데 붙여 힘차게 내질렀다.

펼쳤던 열 손가락을 움켜쥐었으니 주먹. 뇌전검망이 잡아챈 그물처럼 그 주먹에 휘감기고.

주먹을 맞붙이자 그물은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다.

검왕오형의 발검제형이 마치 거대한 망치로 내지른 것 같다.

“그만! 멈추…….”

쾅!

날카로운 목소리가 황망히 나왔지만, 그전에 삼십 장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머리를 맞부딪칠 듯 달려들던 사천왕이었건만,

폭발하는 돌조각은 삼십 장 밖에서 치솟는다.

해원기가 내질렀던 두 주먹을 내리자 고검이 어느새 검집으로 돌아오고.

휘이이이.

잦아드는 바람에 주위의 경관이 씻겨나가듯 바뀌었다.

석판을 깐 평대는 어디로 가고 곱게 깔린 모래밭 위. 계단이었던 왼쪽에 슬그머니 장방형의 호법문전이 드러나고,

단청을 올린 본전이 바로 오른쪽 옆이다. 두세 걸음만 옮기면 곧바로 본전에 들어가는 위치라니.

호법문전 부근에 나뒹구는 건 산산이 부서진 사천왕상. 돌을 다듬어 만든 크기가 일 장이 넘어 부서진 팔다리가 웬만한 기둥만 하다.

호법문전을 지나 본전에 이르는 아담한 모래밭은 기껏해야 십 장 정도의 넓이.

삐꺽.

본전 구석의 작은 문이 열리며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 잠깐 놀려준다더니 이 무슨 소란인고? 그 바람에 사천왕상이 다 부서졌잖으냐. 국사가 돌아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쯧쯧.”

혀를 차면서 작은 문에서 나오는 하얀 고깔.

이미 귀에 익은 목소리라 해원기가 무심하게 시선을 보냈다.

과연 모래밭에 내려서는 이는 녹명이었다.

부서진 사천왕상을 안타깝게 보다가 비로소 고개를 돌리는 녹명의 눈이 반짝 빛나고.

“따로 채비를 갖추어 모시려고 했더니.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리도 이 녹명이 보고 싶으셨나요?”

희떠운 소리를 늘어놓는다.

해원기가 덤덤히 반문했다.

“십이음형사. 자부십이경을 흉내 냈느냐?”

“어머, 용케 알아차리셨네. 조금 전의 장난이 혹초반영(酷肖反映)이란 걸. 호호호…….”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대기 시작하는데.

해원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너는 몇 호냐?”

녹명의 웃음이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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