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 현도삼보(玄道三寶) (2)
인원을 둘로 나누었다.
암자에는 단목정과 악송령.
베풀어진 진법을 일단 정지시켰으나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려면 단목정이 필요하고,
은신 밀탐에 익숙지 않은 악송령에겐 단목정을 호위하는 역할이 맡겨졌다.
경수사를 탐색하는 일은 해원기와 정록.
암자의 지붕 위에 웅크린 정록이 해원기를 돌아보았다.
“역시 저 쌍탑이 거슬려. 어디로 들어가든 저 쌍탑을 피해서 후원으로 갈 수는 없겠는걸. 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없나?”
단목정만큼 진법에 통달하진 못했어도 본래 어떤 장소든 잠입하는 주장선의 기예를 이은 정록이다.
지형과 지세, 건축의 구도와 배치를 빠르게 훑어내고 파고들 지점을 정하긴 했지만.
진도와 기관보다 무서운 건 바로 사람.
해원기가 자신의 비췻빛 동시안을 신기하게 보는 정록에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없어. 지나치게 조용하군.”
황실이 봉양하는 절이다. 제갈봉의 말처럼 어명을 얻어내려고 국사가 입궁했다손 쳐도 남은 인원이 적지 않을 텐데.
암자와 잇닿은 경수사의 담장 안엔 인적이 전혀 없다.
조금 전 경수사 앞의 장안가에는 홍등가로 향하던 사람들이 그리 많더니만.
정록이 다시 쌍탑 쪽을 향하며 혀를 찼다.
“밀탐은 밤이 유리하다지만, 이렇게 불을 환하게 밝혀놓아서야. 어쩔 도리가 없지. 쳇.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세.”
절 주변뿐 아니라 쌍탑의 추녀마다 등롱이 매달렸다.
연등제(燃燈祭)가 무색할 정도로 밝아서 암자 지붕에서도 잔뜩 웅크려야만 했으니.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담장을 넘었다.
탁 소숙에게 배운 부신수영의 신법이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펼쳐지자, 정록이 입맛을 다시며 뒤를 따른다.
전신이 지붕과 담장에 딱 달라붙어 미끄러지는 기묘한 신법. 화려하진 않지만 빠르고 은밀한 벽호지주행(壁虎蜘蛛行)이어서, 때로는 도마뱀처럼 때로는 거미처럼 어떤 곳에도 소리 없이 스며들 수 있다.
담장을 넘으면 승방. 승방을 지나면 쌍탑이 나란히 놓인 넓은 전원(前院). 폭이 수백 장이나 되고, 다시 쌍탑의 중앙과 좌우의 계단을 올라야 본전과 부속 건물이 나온다.
둘이 담장을 넘은 곳은 경수사의 우측. 쌍탑 중 칠층가암탑이 가깝다.
정록이 택한 경로는 승방을 따라 칠층가암탑의 오른쪽 계단을 오르는 것.
승방 지붕을 다시 타고 넘어 전원으로 내려선 정록이 좌우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원기의 말대로 승방 내부에 전혀 인기척이 없고, 전원도 텅 비어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밀탐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바로 세운 해원기가 웅장한 칠층가암탑을 올려다본다.
웬만한 절에 흔히 보이는 작은 사리탑이 아니다.
처마마다 기와를 얹은 팔각형의 구조물이 일곱 개나 겹친 거대한 탑. 멀리서 보았던 탑 꼭대기의 뾰족한 탑찰(塔刹)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한 층마다 족히 수십 명은 수용할 공간을 갖추어서 탑보다는 차라리 누각에 어울리는 건물.
금(金)나라 때 만들어져 원대(元代)에 중수했다더니.
“장안의 대안탑, 소안탑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지?”
자은사에서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록이 속삭이지만,
해원기는 단지 탑의 형태에 관심을 보인 게 아니었다.
몸을 조금 틀어 뒤쪽의 구층운해탑을 살피며 미간을 좁힌다.
“불감(佛龕)에 초를 밝히고 향을 피웠어. 일 층만이 아니라. 그리고…….”
말을 끌면서 바닥을 내려다보는 눈에서 동시안이 더욱 빛난다.
시력과 청력이 해원기만 못하다는 걸 잘 아는 정록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칠층가암탑과 구층운해탑 전부인지는 해원기라고 해도 확인하기 어렵겠지만, 그 특이한 시선이 닿는 층에는 모두 초와 향이 보였다는 뜻.
예불 준비는 해놓고서 사람은 없다니. 더구나 해원기를 따라 지면을 살피자 더욱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넓은 전원에 빗자루 자국만. 발자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기척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오간 적이 없는 빈 절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쌍탑 층층이 초와 향을 갖추었을지.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을 마치기도 전에,
해원기가 정록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스슥.
몸이 바람에 올라탄 듯 홀연히 가벼워지고, 눈앞이 어찔하게 시야가 흔들린다.
무서운 속도로 정록을 끌고 날아가는 해원기의 일체경신(一體輕身).
공산 백운동에서 겪었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혀를 깨물었을 터. 순식간에 계단을 지나 본전으로 향하는데.
퍽.
벼락같이 날아가던 해원기가 억지로 몸을 세우며 바닥을 찍는 통에,
“에쿠. 어?”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한 정록이 기어이 놀란 소리를 토해야만 했고. 중심을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손끝에 걸리는 차가운 느낌.
정록이 어리둥절하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칠층가암탑 부근에선 분명히 계단 위에 바로 보이던 본전이 계단 위로 올라오자 십 리는 떨어진 것처럼 아득히 멀어졌고,
해원기가 몸을 세우면서 힘주어 밟은 곳은 폭이 십여 장이나 되는 돌바닥. 다듬은 석판을 짜 맞추고 계단 쪽에는 난간까지 세운 평대(平臺) 위에, 장정 서넛이 모여야 겨우 들 크기의 커다란 향로가 앞을 가로막았으니.
해원기가 급하게 멈추지 않았다면 정록과 함께 이 거대한 향로를 그대로 들이받았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정록이 황급히 주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환술? 장안법이라고?”
믿기 어렵다. 정록 혼자라도 여간해선 눈속임에 걸리지 않는데. 신기한 능력을 지닌 해원기까지 있거늘.
세상에 두 사람을 감쪽같이 속일 술수가 있을 줄이야.
해원기의 비췻빛 동시안이 신광을 머금기 시작한다.
쌍탑과 지면에서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위치를 바꾸려고 했다.
함정이라면 이미 상대에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물러나려 해도 암자의 방향 외에는 확실한 곳이 없으며.
자칫 단목정과 악송령이 휘말리게 된다.
아직 특별한 대응이 없는 틈에 차라리 본전을 거쳐 소사영당을 확인하는 게 낫다.
그래서 정록을 끌고 몸을 날렸는데.
일체경신은 운혜덕택으로 인해 깨달은 비결. 고유의 영역이 정록을 휘감으며 넓어진 덕분에 겨우 향로를 감지했으니.
동시안이 전혀 알아채지 못한 환술이라.
일체경신을 쓰지 않았다면, 해원기 혼자서 몸을 날렸다면 아마 향로를 들이박은 후에야 주위 경관이 바뀐 걸 알아챘을 터.
세상에 이런 술법은 오직 하나.
해원기의 입술이 비틀렸다.
“미진환혹대법(迷津幻惑大法).”
환술이나 장안법 따위의 저급한 사술이 아니다. 본디 사람의 본성을 깨우치기 위해 환상으로 인생의 참뜻을 깨우치게 하는 도가의 지고한 술법.
과거의 난세에서 옥황금단서(玉皇金丹書)를 얻은 혼천대제와 그 수하들만이 일부분을 무공으로 응용했었다던데.
혼천대제와 혼천구단(渾天九丹)이 전부 제거된 후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설사 옥황금단서가 다시 출현해도 아무나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니거늘.
답을 찾은 해원기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흐흥, 아닌데. 기껏 도가의 침중일생(枕中一生), 남가한단(南柯邯鄲)에 견주다니. 안목이 낮구나.”
남가일몽이니 한단지몽이니 하는 꿈속의 일생. 미진환혹대법에서 유래한 고사를 들먹이며 비웃는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전해진다.
어디인지, 누구인지 모르게 공중을 울리는 음성.
신왕공을 끌어올리던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이런 기묘한 일을 얼마 전에 겪었었다.
해원기가 입을 닫자 정록도 눈치 빠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당장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우선 해원기의 등 뒤로 숨어 주변을 관찰하려는 의도.
미진환혹대법이든 아니든 이 변화를 빨리 살펴야만 한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울리고.
“못 알아보나? 혼암미식도 버티고 파경편조는 아예 펼칠 틈도 주지 않았다던데. 흠, 미리 포설한 곳에선 그 잘난 검도 소용없나 보네.”
해원기의 눈이 번뜩였다.
혼암미식과 파경편조. 천외천 주루와 통왕의 중지라는 곳에서 들었던 단어다.
기척도 없이 떠드는 이 장난스러운 목소리 또한 십이음형사의 하나.
일부러 말을 받았다.
“동창을 만들었다는 내시들 중 하나로군. 이게 미진환혹이 아니란 거냐?”
당장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온다.
“응? 아, 상보감의 조공공이 떠들었다고 했었지. 그놈도 체신 주제에 별소리를 다 지껄였네. 우리 십이음형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하긴, 검왕이라고 설치는 주제에 미진환혹을 웅얼대는 꼬맹이도 똑같나? 히히히.”
안목이 낮다고 하더니 이제는 체신 취급.
그 조롱이 되는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걸 해원기는 민감하게 알아챘다.
체신은 본신(本身)의 가짜.
천외천 주루에 나타났던 자들은 천손검법과 유사한 힘을 구사했고, 통왕의 중지에 있던 백포 복면인은 고검지주라는 말을 입에 올렸었다.
절세검왕이라는 해원기도 결국은 고검협 묵세휘를 흉내 낸 가짜라는 거다.
비웃고 조롱하고.
상대를 업신여겨 도발하는 언사니 그 대상자는 당연히 모욕감에 벌겋게 달아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원기는 평소의 덤덤한 표정 그대로.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타고난 순후한 성품이나 신왕공의 수양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부의 체신이라 불리는 건 도리어 무한한 영예였으니까.
환정곡에서 모신 사부는 처음에 만났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해원기에게는 언제나 똑같았다.
머리엔 하늘을 이고 발로는 대지를 디딘다. 두 눈은 타오르는 불꽃을 깊이 감춘 심해요, 넓은 어깨는 아득히 이어진 산맥이었으며,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은 세상을 휘도는 바람이었다.
그 등에 걸린 한 자루 검으로 산과 바다를 잇고,
그 마음에 품은 따뜻한 정으로 사람과 삶을 엮어,
고독한 운명조차 이겨냈던 거인.
해원기의 영원한 자부(自負)이며 그리움이다.
사부를 떠올리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힘이 들어갔던 몸도 풀려나간다.
“고마운 칭찬이지만, 아직 멀었지. 사부님은 예의 없는 것들과는 말을 섞지 않으셨으니까. 얼굴도 보이지 못하고 이름도 댈 줄 모르니. 쯧쯧.”
양손을 가볍게 비비면서 안타깝게 혀를 찬다.
사부를 죄다 닮길 바라면서도 싸움에 임하면 어째 말투는 탁 소숙이 되는지.
그게 딱 적당하게 상대의 속을 긁었나 보다.
“뭐? 근거원묘(近巨遠渺)도 모르는 놈잇! 그래, 절에 함부로 기어들었으니 호법천왕(護法天王)에게 혼이 나는 거부터 시작하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울컥 높아지더니,
그그긍.
해원기의 앞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향로가 저절로 돌아가면서 일어섰다.
큰 절의 향로는 청동으로 빚은 세 발 솥. 그게 일 장이 넘는 키에 푸른빛이 도는 얼굴로 변하는데, 왼손에 작두 같은 큰 칼을 들었고 오른손에 영롱한 보주를 들었다.
몸에는 갑옷과 천의(天衣)를 걸치고 해원기를 짓밟으려고 들어 올리는 거창한 발.
호법천왕이라는 말이 없어도 절에 들어서면 흔히 보는 형상. 바로 동방을 수호한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의 형상이다.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이 기막힌 변화.
“허?”
등 뒤의 정록이 내는 헛바람 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해원기가 두 손을 나란히 뻗었다.
마치 거창한 발을 받아내려는 듯.
그러나 꼿꼿하게 펴진 두 손 사이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기운.
검왕오형의 네 번째인 역상정위가 거창한 발은 보이지도 않는지 전면으로만 밀려 나간다.
쩡!
상쾌한 쇳소리가 터지면서 거창한 발, 아니, 지국천왕의 형상 자체가 갑자기 사라지고.
쿵, 쿵.
지면이 울리면서 또 하나의 거체가 달려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찢어지게 부릅뜬 눈과 시뻘겋게 벌린 입. 흉한 얼굴 위에는 붉은 관을 얹고 보탑과 삼차극(三叉戟)을 휘두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지만,
해원기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가늘게 뜰 뿐. 역상정위를 펼쳤던 두 손이 구름 같은 기운 가운데를 들락거리며 현란하게 흔들린다.
그게 여덟 가지 병기의 움직임이고, 팔방에서 바람을 이끌며, 팔극을 채운다는 걸 바로 뒤의 정록도 알아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