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 현도삼보(玄道三寶) (1)
제갈봉. 그녀에겐 따로 뒤를 봐주는 자가 있다.
단목정의 결론에 해원기도 바로 동의했다.
‘봉대저’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왠지 쉽사리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고, 그 후로 여러 번 도움을 받았으나 항상 시기가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묘한 느낌. 굳이 표현하자면 요사스러움이었고, 그게 단지 제갈봉이 익힌 기환의 역용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사에 도착하고 나서 현도관을 찾아온 게 두 번. 그 요사스러운 느낌은 전보다 덜해진 대신 의혹은 더 짙어졌다.
동창의 배후를 탐색해 경수사와 현도관을 단서로 꼽았으면서 막상 국사와 태상의 정체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고,
상보태감이 한편이라고 하면서도 동창을 비롯한 대내의 상황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었다.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려는 제갈세가의 후손.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장안의 황가약포만 해도 간단히 꾸리기 어려운 규모. 경사에서는 황궁에 들어가 온갖 인물로 지냈다고 했잖나.
충분한 재물과 숙련된 인원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조건은 결코 단기간에 갖추어지지 않는다.
[상보태감? 말은 되지. 동창의 우두머리는 제독태감, 그와 경쟁하는 이십사아문의 다른 한쪽은 어마태감이랬으니까. 그러면서 미묘하게 아귀를 맞춘단 말이야.]
전음으로 들었던 단목정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제갈봉과 약속했던 천외천 주루에 상보태감이 먼저 해원기를 청했고, 그의 등장으로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형세. 보통 동창이라고 칭하는 대내의 상황이 실은 세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졌다는 것.
또 하나는 배후. 경수사의 국사 뒤에는 녹명이라는 여승, 현도관의 태상 뒤에는 홍작이라는 도고.
음형사의 습격으로 거꾸러진 상보태감이 진짜가 아니라 체신이라고 했으니 그가 떠들었던 내용의 신빙성도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제갈봉의 언행을 담보하는 의미는 된다.
‘마치 해답의 실마리를 살짝살짝 일러주는 수수께끼 같다.’
어린아이에게 처음으로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면 전혀 풀지 못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다. 그럴 때는 일부러 여러 개의 연관된 가벼운 수수께끼로 해답에 접근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소위 선과이십관(先過二十關), 게비시미어(揭秘猜謎語). 스무 개 관문을 먼저 넘으면 비밀이 드러나는 수수께끼, 즉 ‘스무고개’다.
[태상이 홍작, 그 밑에 있던 조화부인이 하극상을 벌였다고 했지. 춘매와 그 어머니로 오 장로에게 은혜를 팔아 강호를 떠나도록 했고. 그러면 국사의 배후인 녹명에게도 누군가 있어야 내막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잖으냐.]
악송령이 가지고 온 작은 솥에다 연둔과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이고서 술법이랍시고 불까지 피우던 단목정.
전음과 함께 눈짓을 보낸 의미를 해원기는 금방 알았다.
홍작은 조화부인. 사달이 나면서 오소민을 통해 태상 쪽의 상황이 알려졌으니.
녹명 쪽은 배후를 캐는 제갈봉이 적절한 배역이 될 터.
제갈봉의 뒤를 봐주는 자가 누구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일행을 경수사로 안내하는 게 바로 그런 역할이다.
그녀가 원해서일까, 아니면 그녀도 이용당하는 걸까.
번화가의 밤거리를 흔히 불야성(不夜城)이란 단어로 묘사하지만,
경사야말로 그 단어에 딱 맞는 곳이다.
더구나 경수사가 있는 지역은 경사의 장안가(長安街). 서쪽이라서 붙은 이름이 아니라 그만큼 화려하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의 겨울밤이건만 두 개의 탑이 가까워질수록 걸린 등롱이 늘어나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져서.
단목정과 해원기 뒤에 한 줄로 늘어서게 된 정록이 혀를 찼다.
“쳇, 이 추운 날씨에 뭐 볼 게 있다고 전부 나온 거야. 경사 사람들은 잠도 안 자나?”
대한(大寒)이 가깝다.
물론 소한, 대한이라고 가장 춥지는 않지만, 이미 한겨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모두 두툼한 면오(綿襖)를 단단히 여몄고, 털모자에 가죽 수투(手套)를 갖춘 이들도 보인다.
맨 앞의 제갈봉이 정록의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아까 거론한 장안의 자은사처럼 기본적으로 산중의 절이 아니라 시정의 절이니까요. 경사 사람들이 밤 생활을 즐기기에도 좋고.”
손을 들어 가리키는 쌍탑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불빛에 비쳐 아름답다.
확실히 자은사 주변과 비슷한 분위기. 작은 가게가 즐비하고 노점도 많아서 구경거리가 잔뜩이다.
정록이 제갈봉의 설명에 목을 길게 뽑았다.
“자은사와는 조금 다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안에서 꽃 파는 아가씨로 변장했었던 정록이다. 시정의 절이 어떤 형태인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말을 붙이고.
제갈봉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어차피 가면서 다들 눈치챌 테니까. 오가는 사람 중에 여인이 거의 없잖아요. 후후.”
그제야 악송령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해원기가 미간을 살짝 모으자.
단목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긴. 제갈 소저가 입에 올리기엔 민망했겠구먼.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둘러싸인 두 개의 부도(浮屠)라. 어쩌면 이런 절이 고승대덕(高僧大德)이 수행하기엔 더 좋을지도.”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들은 이는 정록.
“호오, 여기가 기루, 에, 그러니까 홍등가란 말이죠?”
“뭐, 과거(科擧)에 응시한 자들이 떠들썩하게 거리를 유행(遊行)하고 기루에서 숙창(宿娼)하는 건 오래된 전통이라잖아요. 당대에는 과거와 상관없이 공공연하게 들락거리지만.”
“어쩐지 구경나온 자들이 어지간히 거들먹거린다 했더니. 어, 그러면 부호나 귀족뿐 아니라 진짜 관인(官人)들도 있겠군요?”
“녹림장관에서 오셨으니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걸요. 호호.”
“이런. 여차하면 튀어야 할 테니 미리 지형을 잘 익혀둬야겠네. 쩝.”
정록이 제갈봉과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고받는 것도 일행에게 은근히 알려주려는 뜻.
기루라는 말에 악송령이 눈썹을 꿈틀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치와 향락인가.”
이환과 연을 맺은 악송령이라 자연히 장안의 기루를 떠올렸고,
해원기가 모았던 미간을 풀며 중얼거렸다.
“위장과 모의에 편하겠지.”
소림사에서 이환에게 듣지 않았다면 태상이라는 자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또다시 대도(大都)의 홍등가로. 기이한 우연의 반복이다.
경수사의 특징인 쌍탑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 승방에 이어진 암자.
이것도 산중의 한두 칸짜리 단출한 암자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작아도 입구에 문루(門樓)가 있고, 안에는 가운데 잘 다듬어진 정원을 갖춘 사합원의 구조.
일행의 기척에 법당에서 젊은 화상 하나가 나와 보더니 냉큼 입구로 달려가 문을 닫고 사라진다.
단목정이 문루와 정원 곳곳에 그득하게 쌓인 땔감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시목(柴木)을 쟁여두는 곳으로 쓰이는 암자. 제갈 소저의 준비가 아주 철저하군요.”
큰 절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가 많이 필요하고, 경수사는 시정의 절이니 산속에서처럼 쌓아둘 공터가 없다. 승방 가까운 곳에 창고를 두는 게 편하고, 때에 따라선 불사(佛事)에 쓸 수 있도록 암자로 삼는 게 옳다.
게다가 젊은 화상의 행동은 이미 제갈봉을 기다렸다는 의미. 절묘한 곳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일행을 안내한 것이다.
제갈봉이 몸을 돌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철저하긴요. 경수사의 열두 암자 중에서 그나마 여기 한 곳에 겨우 자리를 잡은걸요. 이렇게 쓰일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흐음, 망루(望樓)였단 말씀이군. 경수사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소이까?”
단순한 거점이 아니라 경수사를 염탐하기 위한 교두보. 제갈봉이 이미 동창의 배후로 경수사와 현도관을 지목했으니 이 암자도 목적을 위해 손에 넣었을 터.
“아무리 황사(皇寺)라고 해도 신도로 가장하면 들어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죠. 하지만 일반 신도나 향화객이 갈 수 있는 곳은 쌍탑과 본전(本殿)까지. 가장 중요한 후원의 소사영당(少師影堂)에는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답니다. 당대의 주지인 묘능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라서. 쯧.”
안타깝게 혀를 차는 모습에 악송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단목정이 경수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도연이 죽고 영락제가 기념으로 지은 법당이라네. 도연의 벼슬이 자선대부(資善大夫) 태자소사(太子少師)였거든.”
도연의 이름은 요광효(姚廣孝).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가 조카의 제위를 빼앗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신뢰와 총애를 아끼지 않았고. 죽은 후에는 법당을 지어 그 영정(影幀)을 걸어두고 자주 찾았다고 했다.
사실이 어떻든, 경수사에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중지(重地)가 바로 소사영당.
묘연의 뒤를 이어 국사로 받들어지는 묘능의 거처요, 배후인 녹명 또한 그곳에서 모든 일을 지휘했을 터.
그런데 혀를 차던 제갈봉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문이 닫힌 입구 쪽으로 향한다.
“잠시 쉬고 계세요. 어째 별다른 소식이 들어오지 않는지, 제가 잠시 나가보겠습니다.”
곤혹스러운 표정.
일행이 제갈봉의 제안을 받아들여 현도관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대내가 지금 혼란스럽다는 이유 때문이다.
경수사에서 동창과 이십사아문에 대한 감찰을 건의해서 어명이 떨어졌다고.
동창의 이목을 피하면서 녹명의 허실을 알아보기에는 절호의 기회.
당장에라도 소사영당으로 갈 것 같더니만.
제갈봉을 따라온 일행으로선 그저 맡길 수밖에 없다.
단목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자세한 상황을 알아내면 좋겠구려.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예. 그럼.”
제갈봉이 기민하게 암자를 떠나고.
닫힌 문을 보면서 단목정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반 각 정도 꼼짝도 하지 않던 단목정이 성큼 한 걸음 나섰다.
“정 형제와 악 형제는 내 호법을. 원기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점하고.”
낮고도 단호한 말투. 두 손이 기이하게 엇갈리며 수인(手印)을 맺는다.
“알겠습니다.”
정록과 악송령이 좌우에, 해원기가 앞에 서자마자 주위에 형언하기 어려운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간곤(艮坤)의 기둥! 건방(乾方)의 처마와 진방(辰方)의 마루턱! 계정(癸丁)과 임병(壬丙)은.”
파파파파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의 두 손이 벼락같이 움직이고,
단목정이 맺었던 수인을 풀면서 고소를 지었다.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구나. 미리 알아보았느냐?”
계방과 정방, 임방과 병방은 모두 정원을 꾸민 바위와 석등 따위. 무형의 검기가 단목정이 가리킨 방위를 이미 점해버렸다.
해원기가 몸을 돌려 딱딱해진 얼굴을 보였다.
“이전에 현도관을 찾아왔을 때 은문진을 마련해놓고 둔형류의 신법을 쓰더군요. 제 칠절둔형보를 바로 이용하면서. 형님의 예측대로, 음, 여기에 진법을 베푼 건 무슨 의도일까요?”
평범한 암자가 아니었다.
묘한 진법이 펼쳐진 암자에 일행을 놔두고 혼자 떠난 제갈봉.
단목정이 순순히 제갈봉을 따라 여기로 온 것은 그녀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기에.
“역시 현도관을 살필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구양금오의 마지막 비밀을 풀기 위한 열쇠라더니. 그러나 그녀가 그걸 찾는 배경은 아직 모른다.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아라.”
배신감으로 조금 거칠어진 해원기를 다독이듯 차분한 음성.
호법을 서던 정록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 하는 귀신놀음인지. 옆에서 듣기만 했어도 다른 꿍꿍이가 다 느껴지던데 이렇게 티를 내서야. 그렇지 않소? 악 형.”
악송령이 환도를 담은 자루를 다시 어깨에 메며 입을 꾹 다문다. 과묵하다고 둔하게 여기기 쉬우나, 둔하기는커녕 속마음까지 헤아리는 악송령이지만 딱히 말할 것이 없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한 단목정이 천색을 힐끗 살피고,
“여기에 포설된 진법은 두 가지. 하나는 우리의 동정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은문진. 은문진은 아마 처음에 현도관을 찾았을 때 마련해둔 곳과 통하겠지. 그러나 이미 연둔과로 문을 감추었으니 갈 때는 몰라도 돌아오긴 어려울 게다.”
악송령이 호응해주질 않아 코를 찡긋거리던 정록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끼어들었다.
그간 어지간히 입이 가려웠었는지.
“그 연둔과, 이름이 웃겨서 겨우 참았는데 어디에 쓴 겁니까?”
“내 삼매마려(三昧磨礪)로 넓적하게 펼쳐서 현도관 신감 아래에 박아두었네. 중간에 구멍을 파내어서 열쇠가 들어가는 모양을 만들었고.”
“호오, 해 형에게 열쇠가 있는 걸 아는 자라면 전부 이쪽으로 달려들겠군.”
단목정 대신 해원기가 말을 받자,
악송령도 꾹 다물었던 입을 연다.
“차라리 그게 낫소. 귀신놀음, 못 할 노릇이요.”
지혜로운 이들이 벌이는 심기(心機) 싸움.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허실을 섞어서 상대를 시험하는 게 악송령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듯.
단목정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고 싸움만 해서야 쓰나. 자, 진법을 정지시키고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으니 이 틈에 경수사를 조사해보세. 녹명이란 여승이 과연 어디에 있을지,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니까. 만약 내 추측이 옳다면…….”
말을 끌면서 웃는 얼굴이 슬그머니 어두워지고,
정록도 평소와 다르게 신중한 얼굴이 된다.
“오 소매의 백일향도 여기서 다시 찾을 수 있겠군요.”
해원기가 고개를 돌려 경수사의 쌍탑을 바라보았다.
단목정의 추측. 그건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기에 섣불리 입에 담기도 두렵지만, 지금은 오직 오소민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