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장 음차양착(陰差陽錯) (4)
“새파란 젊은이? 이 아가씨가…….”
단목정이 울컥하는 정록을 손짓으로 말렸다.
“그러지 않아도 원기에게 상황을 들으면서 은근히 걱정되던 판이었소. 그간 우리가 접했던 동창은 그저 겉모양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원기 자신도 제갈 소저에게 적잖은 내막을 들었다고 하더이다. 무지하다 탓하지 마시고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좋겠소.”
말고 함께 머리를 살짝 조아리니, 정중함을 넘어서 한껏 자신을 낮추는 언행.
얼음처럼 차갑게 탁자 주위를 둘러보던 제갈봉의 눈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해원기를 힐끗 살피더니 짧은 한숨이 나온다.
“후, 해 소제에게 들었다면 대강은 아시겠군요. 이런 식으로 제 신분이 밝혀지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둔갑삼가의 으뜸이라 불렸던 제갈세가.
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 오명을 쓰고 잊혔던 가문을 되살리려는 후예. 그러나 아직은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했다.
단목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과거는 과거. 어찌 한때의 공과(功過)로 누대 명문의 전통이 사라질 수 있을까. 무너진 집안을 세우는 일이야 나도…… 흐음, 이런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겠지. 지금 이렇게 제갈 소저가 찾아오게 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삼대신의(三大神醫)의 하나로 일컬어졌던 부친을 협마지쟁 중에 잃었던 단목정이다.
무너진 집안을 다시 세우는 일이라면 약왕당을 재건한 그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이가 있을까.
나름의 위로가 되었는지 제갈봉이 바로 표정을 고쳤다.
“맞습니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죠. 해 소제가 단목 당주의 추리를 따라 이 현도관을 찾았다고 했을 때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동창의 배후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해 소제와 헤어지고 난 후부터는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상황이 급변하는 바람에…… 천외천 주루에서의 약속까지 엉망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 본래 정오에 만날 약속을 했다고. 그렇지만 그보다 빨리 상보태감이 등장했다더군요. 혹시 그 상보태감은?”
“역시 금방 헤아리시네요. 자세한 경과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가 황궁 내부에서 동창의 배후를 살피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곳이 바로 상보태감 쪽. 당연히 동창의 정보도 그쪽에서 얻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호오, 서둘렀다라. 원기에게 들은 바로는 그 상보태감은 강호의 힘을 빌려서라도 동창의 변질을 바로잡으려는 충신이라던데. 금오혈석을 이용하는 계책까지 제안했다면서 어찌 그리 서둘렀을꼬?”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히 저와 상의한 후에 따로 해 소제를 만나겠다고 약조까지 했으면서. 저에겐 알리지도 않고 자신의 체신(替身)을 단독으로 보냈으니. 평소 조심에 조심을 더하던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요. 결국은. 에휴.”
“그 상보태감도 체신이었구먼. 허.”
“대내이십사아문의 우두머리들이 체신 하나둘 두는 건 이미 관례와 같답니다. 역심을 품었든 아니든 권세를 잡은 내시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자존망대(自尊妄大) 해져서. 하여간 동창이 설립된 후로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십이음형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해 소제와 오 장로의 행적이 돌연 사라졌고. 경수사 쪽에서는 또 황상을 움직여 동창을 비롯한 이십사아문 전체를 감찰하라는 어명을 내려서. 지금 대내는 온통 혼란스러운 분위기랍니다.”
“경수사 쪽에서? 누가 동창을 감찰한다고, 그럼 제독태감은 아무 반응이 없었소이까? 제갈 소저는 이 현도관의 도고를 동창의 배후 중 하나로 지목했다고 들었소만.”
“그게 좀 묘합니다. 진짜 제독태감은 지금 남경수비직(南京守備職)에 나가 있다가 어명을 받잡고 급거 경사로 달려오는 중이라니. 얼마 전까지 황궁에서 목격되었거늘, 그럼 경사에 체신을 놔두고 남경으로 갔다는 건데. 아, 그보다 단목 당주께선 이 현도관에 중년 문사와 호위무사가 거주한다고 하셨다면서요? 그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아, 그건 예전에 강호사괴의 한 사람이었던 철금선생으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소. 일종의 숨겨진 골동상(骨董商)이지만, 황궁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동창에서 따로 황궁 외부에 비밀스러운 장소로 삼기엔 딱 어울리는 곳인 데다가, 음, 어정쩡한 외호를 쓰는 자들의 입에서 들은 것도 있구려.”
한참 상황을 설명하다가 반문을 던진 제갈봉.
또 그 반문에 어렵사리 대답하는 단목정.
제갈봉이 어떻게 지금 현도관을 찾아오게 되었는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어서인지 정록과 악송령은 귀를 기울이는 데 집중하고,
해원기도 심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놀라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제갈봉이 밝힌 건 그간의 사정. 그러나 이전에 잠깐 현도관을 들렀을 때 했던 얘기보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단목정이 해원기에게 미리 들었던 부분으로 능숙하게 맞장구를 쳐주지만,
새로 드러난 건 제갈봉이 상보태감 쪽과 미리 연결되었다는 부분뿐.
감찰의 어명 때문에 대내가 온통 혼란스럽다는 것도 그저 상황을 알린 것이지, 그 배경은 밝히지 않았고.
제독태감 또한 체신이란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도리어 해원기가 현도관을 찾아오게 된 이유를 단목정에게서 확인하려는 의도는 뚜렷해서.
단목정이 아니었다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터.
뭔가 더 아는 게 있으면서도 밝히지 않으려 하고,
그 이유도 모르겠다.
해원기나 오소민에게라면 젊은 혈기가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삼간다고 억지로 이해하겠지만,
지금 그녀의 대화 상대는 당대 약왕당의 주인 아닌가.
난세를 이겨낸 영웅 중의 한 명이요, 정사를 막론하고 의술을 베푸는 덕망을 갖춘, 그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인정받는 인물이거늘.
실추한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것 외에 제갈봉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까.
해원기가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제갈봉이 머리를 갸웃하다가 다시 끄덕거렸다.
“태백종사와 책군의 실종이. 그래서 단목 당주의 추리가 가능했던 것이로군요. 확실히 그 둘은 소속이 불분명한.”
‘어정쩡한 외호를 쓰는 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챘고, 또 그러면서 해원기가 현도관을 찾아 경사에 온 배경을 이해한 듯.
단목정이 탄복한 표정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탕.
“대단하오! 그것까지 알아보다니. 과거에 제갈세가를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칭송했던 까닭을 비로소 알겠구먼.”
얘기에 열중하던 젊은이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감탄.
제갈봉이 어색하게 머리를 저었다.
“어찌 이런 과찬을. 감당키 어렵습니다.”
“아니요. 내 본래 과장이나 허풍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없는 칭찬을 만들어서 했겠소? 으음, 그러면 제갈 소저가 이렇게 원기를 찾아온 건.”
과장이나 허풍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필요하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게 지자다.
화제를 다시 되돌리자 제갈봉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탁자를 치는 감탄 한 번에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눈치챘는지.
“그건 단목 당주와 일행 덕분이랄까요. 경사에는 동창의 이목이 거미줄처럼 퍼져서 미세한 동정도 전부 보고된답니다. 세 분이 현도관을 찾으면서 자연스레 해 소제의 소재가 밝혀졌고, 지체할 겨를이 없어서.”
“이런. 그리 조심했건만 헛수고였었나. 면목이 없구려. 그렇다면 여기를 속히 떠나는 게 낫겠소?”
“뭐, 당장은 괜찮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대내는 어명이 내려와 크게 혼란스러운 판국…….”
“그래도 굳이 과녁이 될 일은 아니니. 태상으로 의심되는 도고도 없고, 그렇다고 예전에 들었던 골동상도 행방불명이라. 텅 빈 곳을 지켜봤자 되레 상시로 적습에 노출된 험지(險地)에 머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혹시 동창의 이목을 피할 안전한 장소가 없을지요?”
단목정이 병법(兵法)까지 인용하며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동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갈봉이 온 김에 상황을 바꿀 기회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
그 뜻도 금세 알아본 제갈봉이 입을 다물고 신중하게 생각에 잠긴다.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심각한 분위기에 물들어서일까.
악송령은 심각한 얼굴로 제갈봉을 주시하고, 정록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본 채 목을 긁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 끝을 문지르는 해원기.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이지만,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단목정은 처음부터 의심을 품고 대화하고 있었다.
공심의 계책.
그 계책을 쓴 자는 반드시 결과를 확인하러 온다. 사람의 본능일 뿐 아니라, 세 명의 원군이라는 변수가 생겼으니까.
그 얘기를 마치고 나자 나타난 제갈봉.
제갈봉이 비록 사라졌던 해원기의 소재를 파악했기에 황망히 달려왔다고 했으나.
오히려 ‘변수’의 가치를 확실히 일러주었다고 해야 할 터.
해원기를 염려했다고 볼 수는 없다. 천외천 주루 이후로 홀연히 사라진 해원기가 어디서 무얼 하고 돌아왔는지 전혀 묻질 않는다.
경사에 거미줄처럼 퍼진 동창의 이목이라더니. 이미 해원기가 무령산 기슭의 또 다른 현도관까지 갔다 온 걸 아는 건가.
아니, 상보태감이 천외천으로의 초청을 남긴 곳은 폐병방의 녹호로. 강유행을 데리고 훼병장을 찾은 일도 그 이목을 피하진 못했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왜 아는 걸 숨기는가.
상보태감과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어떤 관계인지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과연 상보태감은 동창의 배후를 제거하려는 충신이 맞는지.
단목정이 대화를 이끌긴 하지만, 제갈봉은 교묘하게 초점을 흐리고 있다.
오소민을 이상하게 만든 공심의 계책이 정말 제갈봉과 관계있는 걸까.
믿고 싶지 않지만, 자꾸 의심이 들게 한다.
생각에 잠겼던 제갈봉이 머리를 들었다.
“조금 지나친 책략일 수 있으나, 음, 경수사가 어떨까요?”
“음?”
천장을 보고 있던 정록이 단목정보다 먼저 놀란 소리를 냈다.
경수사는 국사가 머무는 황사(皇寺). 황궁 안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와 진배없다.
그러나 단목정은 눈썹을 살짝 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대화가 빠른 법.
“네. 본전(本殿) 하나만 있는 작은 절이 아니니까요. 저명한 쌍탑(雙塔)을 중심으로 승방(僧坊)이 사방으로 성곽처럼 둘러친 외에 적잖은 암자들도 주위에 산재해 있습니다. 몸을 숨기고자 하면 그럴 공간은 얼마든지 있고요.”
“들은 적이 있소. 원대(元代)에 지어진 구층해운탑(九層海雲塔)과 칠층가암탑(七層可庵塔). 장안의 자은사(慈恩寺) 같은 형태라면 절이나 암자뿐 아니라 마을도 충분히 크겠지.”
“자은사와는 조금 다르지만, 대로와 민가가 밀접한 건 맞습니다. 저들도 해 소제가 설마 현도관에서 경수사로 옮겼다고는 생각지 못할 테고. 또 마침 경수사가 감찰을 제안한 셈이니까…….”
“중요한 인물들은 전부 황궁에 들었겠구려. 그 행차만으로도 경황이 없겠지. 특히 동창의 이목이 미칠 이유가 없는 곳이니. 나쁘지 않소. 흐음, 문제는.”
“문제라고 하시면?”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던 단목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히자 제갈봉이 눈을 깜빡였다.
현도관에 와서 인사를 나눈 후,
오직 단목정과 제갈봉 둘만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답지 않게 깜찍한 용모의 녹림장관 대탐자나 석수장이 같은 거구의 도객 따위는 아예 끼지도 못했고,
해원기도 형님 앞에서 함부로 나서지 않는 모습.
단목정이 이 무리를 이끄는 어른이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결정이면 군소리 없이 따를 터.
그런데 뭔가 걸리는 듯 단목정이 인상을 구기다가,
“아, 다른 게 아니라 이쪽으로 연락하도록 해놓은 게 있어서. 피신은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에는 확인하러 돌아와야, 경수사가 가깝지도 않으니. 아니요, 아니요. 조금 번거롭더라도 적당한 술법을 써봅시다. 길 안내는 제갈 소저께 부탁해도 되겠소이까?”
띄엄띄엄.
누가 들어도 급조한 변명인 걸 알겠다.
그런 기색을 감추려는지 급히 길 안내를 언급하며 해원기에게 눈짓까지.
제갈봉이 모른 척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두십시오. 동창의 이목을 피하면서 경수사까지 모시지요. 결정을 내리셨으면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단목정이 그제야 탁자 주위로 시선을 돌리며 표정을 고친다.
“일단 경수사로 옮겨야겠군. 그전에 이곳에 술법을 걸어야 하니까 자리를 좀 피해 주고. 원기는 악 형제에게 맡겨놓은 연둔과(連遁鍋)를 받아서 우형을 도와야겠다.”
연둔과라니.
정록이 재빨리 구석에 둔 자루에서 작은 솥을 꺼내 해원기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이럴 때 쓰이는 거였구먼.”
악송령이 해원기의 판과를 흉내 낸답시고 챙겨온 작은 솥. 이름 따위 붙인 적도 없건만.
제갈봉의 시선이 쏠리자 단목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보탠다.
“진도지학에 뛰어난 제갈세가 앞에 내놓긴 부끄럽구려. 대강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있어야 하는 잡스러운 물건이라오.”
그래서 해원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
술법의 시전은 비밀 중의 비밀. 대강이나마 설명을 더한 건 제갈봉의 신분을 존중해서란다.
“아, 예. 그럼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제갈봉이 서슴없이 일어나 돌아서는데,
“그럼 국사와 태상, 여승과 도고는 지금 전부 황궁에 있겠지요?”
단목정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 질문에.
움찔.
“그럴 겁니다.”
역시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제갈봉의 등은 심중의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