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79화 (379/410)

제95장 음차양착(陰差陽錯) (3)

단목정이 예측했던 대로.

현도관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고, 동문대로 쪽은 갑자기 무너져 내린 천외천 주루 때문에 구경꾼이 몰리긴 했어도 특별히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단목정은 돌아온 악송령과 정록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탁자 위에 벌려놓은 술잔들을 국사와 태상으로 삼아 한바탕 정세를 논하기 시작하더니.

술시(戌時)가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엎어놓았던 술잔 하나를 다시 뒤집었다.

“후우, 목이 말라서 더는 못하겠네.”

해원기가 얼른 술을 따르고 친구들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탁자를 내려다보는 정록, 턱을 문지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악송령.

엎어놓은 술잔을 뒤집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내막. 상대해야 할 적은 그저 동창이라는 조직 하나가 아니다.

조정의 권세 따위야 어떻든 관심이 없지만, 그 힘으로 강호를 범하려고 하는 자가 둘.

구양금오로 일으킨 풍파나 무림을 재편하려는 음모는 이미 난세를 조장했던 과거의 사마와 다를 바 없다.

그 정체가 역사 속에서 잊혔던 둔갑삼가와 연관되었다니.

과거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지만, 이 국면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난세의 재현일 수도.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끼었던 정록이 무례를 깨닫고 얼른 손을 풀었다.

“복잡해서 잘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단목 당주께서 분석하신 대로라면, 천공사가의 사가삼미 중 둘이 동창의 배후요, 여기에 대조주가와 제갈세가가 뒤섞인 형태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움직이면 동창 자체가 혼란해질 터. 아니, 이 동창이란 건 대체 어떤 구성인지, 이런 식으로도 돌아갈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술 한 모금을 막 들이키던 단목정이 히죽 웃는 얼굴을 보였다.

“옳은 감상이야. 예전에 이런 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나도 정 형제와 같은 느낌으로 골치깨나 썩였을 걸세. 영 이치에 맞지 않거든.”

겸손을 떠는 게 아니다.

불합리를 이해할 수 있음은 지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과거의 난세를 겪었기 때문.

백 년을 넘게 세상을 희롱했던 사마의 모략은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었다.

악송령도 고개를 갸웃,

“무엇보다 적이 모호합니다. 누구랑 싸워야 할지.”

여전히 딱딱한 말투지만,

단목정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악 형제의 말은 간략해도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군. 그래, 복잡하게 따지기보다는 상대를 명확히 정하는 게 중요하지. 자, 그럼 적은 누군가?”

스스로 답을 내기 위한 물음.

“동창인가? 소위 제독태감이란 자가 이끄는 비밀감찰 조직? 으흠, 동창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있을지. 금의위를 수족으로 거느리고 친군(親軍)을 동원할 능력도 있는데. 어이쿠, 잘못하다간 역모죄로 잡혀가기에 십상이야.”

혼잣말이 빠르게 이어진다.

“그러면 동창이 세워지면서 대두된 대내(大內)라는 무리일까. 대내이십사아문을 주축으로 하는 내시들과 황궁의 무인들. 대내무림이랍시고 이름까지 붙였으니. 그런데 이게 또 세 조각으로 나뉜 것 같단 말이지. 흐흥.”

코웃음을 덧붙이는 건 같잖다는 의미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수염을 쓰다듬는 단목정의 눈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자,

정록과 악송령이 서로 마주 보았다.

악송령의 말에 이어진 단목정의 혼잣말은 실상 정록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단목정이 오랜 시간 이끌어가는 얘기는 일종의 정리.

정록과 악송령에게 국면을 일러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세 조각’이란 단어가 나오자 묵묵히 듣던 해원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사에 온 이후로 상황에 휘말리다 보니 국사와 태상, 녹명과 홍작이라는 둘에만 몰두하게 되었는데.

둘이 아니라 셋.

실제로 천외천에서 상보태감을 만났으면서도, 그 얘기를 단목정에게 털어놓았으면서도, 오소민 때문에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구양금오를 강호로 유출한 장본인.

조공공이란 자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십이음형사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그 의미를 새길 새가 없다가,

비로소 기억났다.

‘이십사아문을 사례태감이 절반, 어마태감이 절반씩 파벌을 이룬 가운데 상보태감이 나머지 사사와 함께 저울추 노릇을 했다고 떠들었었지.’

단목정은 해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쯧, 이쯤 되면 모방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어. 과거에 강호무림을 온통 불신으로 물들였던 벽세를 고스란히 흉내 냈다고. 원기는 알지? 벽세라고 간판을 붙여놓고 속에는 세 덩어리가 따로 놀았던 사실을.”

“아, 네.”

간단한 대답에 단목정이 슬쩍 눈짓을 보내고,

그제야 정록과 악송령의 시선을 느낀 해원기가 말을 보탰다.

“사흉의 힘을 합일해 세외지마(世外之魔)를 불러내려던 당시의 영황(靈皇), 옥황금단서를 바탕으로 신선지도(神仙之道)를 가장했던 혼천대제(渾天大帝), 그리고 녹판을 뒤집어 사황지력(邪皇之力)을 구현했던 환영주(幻影主). 저희끼리 정사마(正邪魔)를 맡아 세상을 농락했다고 들었습니다.”

단목정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간명하게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벽세가 꾸민 갖가지 음모와 그 곡절을 설명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부족할 터. 비록 해원기가 사부에게 들었다는 투로 말했지만,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거다.

“저희끼리 정사마라. 아주 적절한 표현이고. 지금의 동창이 그런 식이란 건 과거에서 배운 게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여간 조정의 기찰이라는 본래 임무에만 충실할 것이지, 쓸데없이 강호의 사정은 샅샅이 조사해서는. 뭐, 둔갑삼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단목정의 수염을 쓰다듬는 손끝에 안쓰러움이 깃들어서.

해원기가 다시금 처음에 들었던 ‘용호풍운’을 떠올렸다.

동창은 미증유의 정탐 조직. 처음부터 그 점에 주의했어야 한다고 자책하지 않았었나.

용호방과 풍운책. 무림의 지난 일을 모조리 수집하고 당세 강호의 정세를 샅샅이 훑은 기록.

그저 동창이 강호로 세력을 넓히기 위한 사전 조사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가치를 지녔을 수도.

정보란 때로는 두려운 무기가 된다.

단목정이 수염에서 손을 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으흠, 관(官)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지. 장평(長平)에 사십만의 대군이 묻혔으면, 사십만 군사가 지녔던 병갑(兵甲)은 누가 거두었을까? 비로소 난세의 잔재가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단서를 잡은 셈이야, 물론 그럴 안목을 미리 지녔을 거고.”

전국(戰國) 시대에 조(趙) 나라 군대가 몰살당한 고사를 들먹이자,

정록의 표정이 묘해졌다.

“에, 그 말씀은…….”

“벽세에 의해 흩어진 실전 절학과 지부 고유의 마공이 어떻게 동창에서 나타났느냐는 문제. 실전 절학도 그렇지만, 지부의 마공은 계통이 독특해서 안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흠, 둔갑삼가는 일찌감치 그쪽에 발을 담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지. 자의든 타의든.”

자의든 타의든.

기관건축의 대조주가, 진도지학의 제갈세가, 묘수위조의 천공사가.

그 능력은 정사마를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크게 쓰인다.

탁자 주위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국사와 태상이라는 동창의 배후 둘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새 여기까지 흘러오면서, 과거의 난세와 당금의 국면이 교차하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알아야 할 것과 생각해야 할 부분이 지나치게 많았다.

지자(智者)의 말은 흔히 우활(迂闊)하다더니.

이제는 듣는 이들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

그러다가 시선이 다시 단목정에게 모여들었다.

“뭐, 대강 이렇게 적을 규정해보세. 우리는 강호를 걷는 무인, 조정과 상대할 마음도, 상대할 이유도 없지만. 그게 세상을 어지럽히고 협의를 짓밟는다면 좌시해선 안 되지. 우물물과 강물이 서로 범하지 않는다는 오랜 묵계에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물’. 조정도 어차피 세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 윗물이 탁해지면 아랫물도 깨끗하지 않다는 속담도 있잖은가. 그렇다면.”

평소의 명랑한 음성.

단목정이 젊은이 셋을 차례로 보면서 일부러 하던 말을 끊었고.

당장 정록이 뒤를 이었다.

“괜스레 헷갈릴 필요가 없군요. 과거의 망령에 물든 자라면.”

악송령도 뒤지지 않는다.

“불의(不義)한 자는 누구든.”

장시간 공들여 입을 놀린 보람이랄까. 단목정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협의가 본래 신의, 우리는 단지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걸을 뿐이지. 왓하하하!”

굳게 입을 다문 해원기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가 없으면 협의도 없고,

정사가 모두 마음에 있으니 무도(武道)가 곧 인도(人道).

그건 사부가 예전에 세웠던 삶의 지표였다.

상대가 누군지 명확히 정하고, 새로이 의지를 굳게 다졌으나.

정록이 금세 머리를 경망스럽게 흔들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오 소매는 제멋대로 뛰쳐나갔고, 금오혈석이란 물건은 단지 미끼에 불과했던 모양인데요.”

밀각의 대부로 위장해 육신지궁까지 거쳤던 정록이다. 육악지력은 이미 다 풀려났고, 그걸 이용한 모종의 실험도 한참 진행된 상황.

경사에 동창과 그 배후가 다 있지만, 누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하나도 모른다.

당장 눈앞의 암담한 현실을 깨닫고 의기를 드높였던 자신이 조금 우스워진 건데,

단목정은 기다렸다는 듯 탁자 위를 가리켰다.

“우리가 초조할 필요는 없을 걸세. 상대가 알아서 먼저 움직여줄 테니까. 원기가 경사에 도착하자 잇달아 벌어진 일들을 들었잖은가.”

손가락이 양쪽으로 벌려놓은 잔들을 하나씩 짚어간다.

“국사라는 탈을 쓴 천공사가의 녹명과 그 녹명을 파헤치려는 제갈세가의 아가씨. 태상이라고 추정되는 천공사가의 홍작과 하극상으로 실권을 빼앗았다는 조화부인. 그리고 제삼의 세력인 상보태감의 등장과 함께 오 장로를 꾀어낸 옛 인연. 이들이 차례로 원기를 찾은 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하물며…….”

말을 끌면서 손가락이 옆으로 움직이니,

“계책을 썼으면 그 결과를 확인하려는 게 사람의 본능이거든.”

모두의 시선이 그 손가락을 따라 해원기에게 향했다.

오소민의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공심의 계라고 했었다.

해원기를 주마로 써서 오소민을 조종하고, 또 오소민을 주마로 써서 해원기의 마음을 뒤흔들려고.

누가 부린 수작이든 계책이 먹혔는지 알아보려는 시도가 있을 터.

기다리면 된다.

단목정이 손가락을 거두면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게다가 상대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더해졌잖나. 녹림에서 온 신출귀몰의 화호초와 오악지존(五岳至尊)이 마침내 낳은 희대의 환도객(環刀客)이.”

동행하면서 정록과 악송령에 대한 것도 자세히 알아두었나 보다.

동악태산은 흔히 오악지존이라 일컬어지고, 멸문한 태산검파가 끝까지 비장했던 도법을 완성한 악송령의 병기는 환도.

생소한 칭찬에 머쓱해진 악송령이 눈만 껌뻑거리는데,

신출귀몰의 화호초는 잽싸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거기에 당세에 지혜로 으뜸가는 약왕당의 주인까지죠.”

“엉? 그런 얘기 함부로 했다간 여의낭랑에게 밉보이게 될 텐데. 정 형제?”

“앗, 이런. 이 얘기는 비밀로, 응? 악 형, 해 형. 응?”

황급히 입을 막으려고 어쩔 줄 모르는 정록의 모습에.

해원기와 악송령도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현도관에 쾌활한 기운이 넘치고, 해원기도 잠시나마 울적했던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

자정(子正)에도 현도관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다시 현도관을 찾은 이는 그 불빛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부러 문을 두드렸고,

찾아올 이를 기대하던 현도관 안의 불빛도 뜻밖인 듯 주춤거리며 맞이해서.

소개를 마치고 자리를 나누어 앉은 후에도 어색한 분위기.

단목정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원기에게 듣지 않았다면 가문의 영예를 되찾으려는 그 고심을 어찌 알았겠소. 이렇게 만나니 참으로 기쁘구려, 제갈 소저.”

“아, 감당키 어려운 말씀을. 당대 약왕당의 주인이자 지자로 소문난 단목 당주께서, 흠, 겨우 새파란 젊은이 둘만 데리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의젓한 인사치레에 가시 돋친 응답이라서,

그러지 않아도 찾아올 이의 정체를 의심하던 악송령과 정록이 인상을 썼고,

해원기도 미심쩍은 시선을 감추기 어려웠다.

공심의 계책을 확인하러 온 사람이 설마 제갈봉일 줄이야.

그녀도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니.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은 이는 단목정 혼자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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