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78화 (378/410)

제95장 음차양착(陰差陽錯) (2)

단목정이 세세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해원기가 필요한 내용을 설명하고.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나 대화가 계속 이어져서,

탁자 위에 둔 간단한 음식이 쉬 없어지질 않았다.

한 시진쯤 흘렀을까.

단목정이 빈 술잔을 엎어 놓으면서 악송령과 정록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은 이 현도관 주위를 둘러본 후에 그 동문대로의 천외천이란 주루를 한번 살펴보는 게 좋겠군. 당분간 불청객이 찾아오진 않을 테니 특별한 점이 없으면 바로 돌아오고.”

함께 경사로 오는 내내 단목정의 지혜와 인품에 감복했던 터라,

악송령과 정록이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듬직한 체구에 환도를 드는 악송령과 상대적으로 왜소하면서도 기민한 정록.

묘하게 어울려 보이는 둘이 자리를 뜨자,

단목정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친구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던 해원기가 그 모습에 의자를 조금 끌어당겼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중간중간 거듭 확인을 해가면서 얘기가 너무 길었으니 지혜로운 단목정이라도 지쳤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 친구 둘에게 할 일을 일러준 걸 보면, 해원기에게도 따로 지시를 내릴 줄 알았는데.

“음.”

단목정은 가볍게 응대하며 눈까지 지그시 감는다.

뭔가에 집중해서 주름이 잡힌 미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워 기다릴 수밖에.

그것도 잠깐.

감겼던 단목정의 눈이 살짝 열리고,

“원기야.”

혼잣말처럼 조그만 음성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해원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 천교진인이란 분, 성이 사(謝)겠지?”

“엇?”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헛바람이 절로 나오고, 그 헛바람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단목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교도인이라고 부르는 천교진인. 현도관의 주인에 어울리게 도인이니 진인이니 하는 호칭을 붙였지만, 그 실제 이름이 바로 ‘사천교’.

그러나 단목정과 얘기를 나누면서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래, 밝히기 어려운 부분이었겠지. 되었다, 천공사가의 사가삼미란 점만 확인하면 그만이니까. 흐음, 참으로 질기디질긴…….”

하려던 말을 억지로 끊고 새삼스럽게 해원기를 보는 단목정.

과연 천하제일지의 후계자다웠다.

추리를 통해 이 현도관이 천공사가의 근거지며, 녹명과 홍작이 당대의 사가삼미라는 것까지 알아내다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해원기에게,

단목정이 고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천외의 죄업이로구나.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양곡현에서 청하현으로 달려갔을 때부터.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수습하지도 못했고, 이젠 그 여얼(餘孽)마저도 고죽(孤竹)에 의지해야만 하는 꼴이라……. 후후.”

이 또한 얼핏 알아듣기 어려운 자책.

그러나 ‘고죽’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해원기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야 했다.

단목정은 녹림장관 팔대탐자의 전갈을 듣자마자 청하현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바로 묵소유가 있다는 소식 때문.

고검협의 따님이요 해중천의 유일한 전인. 그녀의 출현이 무엇 때문인지 확인해야만 했었다.

방송서도 언명했듯이 천외가 벌인 일은 천외가 책임져야만 한다.

녹림장관으로 바뀐 대관원이 묵소유와 함께 천지보록을 비롯해 난세 후에 오용된 무공들을 처리하듯이,

비록 명맥은 끊겼어도 적성문은 해원기를 도와 사특한 간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결국, 또 고죽에 기대는 처지가 되었다는 민망함.

“그게 어찌 천외의 죄업이겠습니까? 사부님이 전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협의의 바탕이라고 하셨지요. 신주든 지부든 벽세든, 다 예전에 사라졌어야 마땅할 망령이요 잔재일 뿐. 이를 다시 되살리려는 행동은 이유가 어떻든 잘못입니다. 무도를 걷는 이라면 당연히 나서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요. 고죽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 성이 그대로 해(海)이고, 소유가 해중천을 이었듯이.”

해원기는 묵(墨)이란 성을 받지 않았다. 묵소유는 환정곡을 떠나 해중천을 사문으로 삼았다.

강림천손(降臨天孫)을 의미하는 고죽의 후대가 아니라는 의미.

천외니 고죽이니 했던 낡은 멍에를 언제까지 뒤집어쓸 것인가. 사부의 말을 빗대어 단목정을 위로하려다가 초점이 어긋나 버렸으나.

단목정은 도리어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옳은 말씀. 어리석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악 형제와 정 형제가 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하하하!”

훈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보통 도량은 아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은 웃음으로 날리고,

“두 사람이 금세 돌아올 터이니 앞으로의 방침은 조금 있다가 의논하자꾸나. 그전에…….”

악송령과 정록을 내보내기도 전에도 했던 말.

당분간 불청객은 찾아오지 않고, 특별한 점이 없으면 바로 돌아오라고 했었다.

근거가 무엇일까. 해원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말을 끌던 단목정이 가볍게 혀를 차며 화제를 바꾸었다.

“쯧, 저쪽은 이미 원하던 수순을 밟아 다음 단계로 넘어간 셈이거든. 맨 처음에 말했듯이 동창의 정보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던 것이 내 소홀한 점이었다. 그들은 네 행동을 계속 주시해 왔고, 언제쯤 경사에 들어오리란 것도 예측했을 거야. 그랬기에 현도관에 들자마자 차례로 일이 벌어진 거고.”

녹명의 등장, 그다음 조화부인의 기습,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

해원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렇군요. 제 반응을 보고 다음 단계를 조절할 시간이 필요해서.”

“뭐, 때마침 우리라는 변수가 생겼으니 여유가 더 있겠지. 그보다…….”

여유.

그 단어가 마음에 와닿아서 해원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악송령과 정록이 와준 것만 해도 힘이 솟을 판에, 단목정의 가세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이제부터는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겠구나.

하지만,

해원기의 풀렸던 표정은 곧장 어색하게 굳어졌다.

단목정이 본래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면서.

“한 가지 반드시 네가 인지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음, 너에게 오 장로는 어떤 사람이냐?”

“에?”

형님이 모를 리 없다.

몇 번이나 함께했었고, 가깝게 여기는 벗이란 걸.

똑같이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악송령과 정록처럼.

그러나 단목정의 진지한 얼굴을 보면서 해원기는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스스로 반드시 인지해야 할 문제.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있다.

머릿속에 벗이나 친구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떠오르지만, 그건 올바른 답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자기를 속이는 핑계일 뿐.

움찔거리던 입이 겨우 움직였다.

“마음이 쓰이는, 좋은 사람, 입니다.”

힘겹게 나오는 대답에 단목정이 해원기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더니.

“그 마음이 정(情)이더냐?”

다시 한 번 묻는다.

어째서 낯 간지러운 질문을 집요하게 하는가. 그러나 오소민을 떠올리자 뭉클해지는 가슴에 해원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고,

그제야 단목정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묵 대숙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좋은 사람과 어울려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평소의 바람이었다고. 그분이 이룬 업적보다 그분의 소박한 바람이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겠지. 자, 그러면 왜 내가 인지라는 표현까지 썼는지 말하마.”

굳이 사부를 들먹인 건 해원기가 쑥스러워할까 봐서겠지.

빠르게 말을 이어간다.

“미증유라고 해야 할 동창의 이목이 계속 주시했으니 세세한 감정까지 읽어 냈을 수 있다. 원기 네가 거친 여러 가지 사건은 잠시 젖혀두고, 오 장로의 갑작스러운 변화만 따졌을 때, 나는 공심계와 주마라는 단어를 떠올렸지. 내가 묵 대숙을 언급하고, 또 너와 오 장로가 서로 주마가 되었다고 말한 게 기억나니?”

화제가 바뀌어서 해원기의 대답도 냉큼 나왔다.

“네.”

“내 나름대로는 오 장로의 총명함에 높은 평가를 주었었다. 그렇게 총명한 친구가 엉성한 꼬임에 넘어가기는 어렵지. 그러나 아무리 총명해도 마음의 허점을 찔리고 또 피할 수 없는 구속이 걸리면 어쩔 수 없는 노릇. 게다가 그 구속이 가장 아끼는 이와 연관되면 차라리 스스로 자멸(自滅)을 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거다. 음, 공심의 계책이 무서운 건 당사자만을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이야. 당장 악 형제와 정 형제의 반응이 어땠는지.”

오소민에 대해서 한 사람은 산속에 홀로 지내다가 해원기를 통해 함께 일단의 시간을 보냈던 사이. 또 한 사람은 오랜만에 어울리게 된 어렸을 적의 친구.

악송령은 의혹을 금치 못했고, 정록은 분통을 터뜨렸었다.

“의혹이든 분노든 믿기 어렵다는 심정에서 비롯한다. 즉, 공심은 바로 불신(不信)을 낳는 가장 효과적인 계책이라고 할 수 있고, 일단 불신에 휩싸이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 따지지 않게 된다. 어떤 주마에 구속되었는지 살필 겨를이 없으니까. 이건 십이협사 때보다는 비봉황 이숙모(二叔母) 때가 더 적절한 예일지도. 아, 이건 내가 무례했구나. 미안하다.”

비봉황은 이사모의 명호.

감히 윗사람의 과거를 예로 들었다고 단목정이 서둘러 사과했으나,

해원기는 덕분에 공심의 계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고, 아울러 왜 단목정이 오소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완곡하게 ‘정’이라고 했지만,

그건 사랑.

이사모는 사부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세웠었다. 다만 그 사랑을 차마 드러내지 못했기에 불신을 초래했고, 하마터면 큰 불행을 만들 뻔했었다.

해원기의 손이 절로 요대자를 쥐었다.

요대자 속의 보명오석. 그 원형은 이사모의 전신을 구속했던 오행명공권이다. 그 구속이 깨지는 순간까지 얼마나 가슴 아픈 과정을 거쳐야 했던가.

해원기가 무겁게 숙이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저를 주마로 썼다면. 설마 제가 감당하지 못할 위험이라고 여겼을까요?”

지독한 난세에 사부가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기에 스스로 오행명공권을 전신에 채웠던 이사모. 그만큼 벽세와 지부는 가공할 세력이었고, 사부는 그저 외로운 검 한 자루에 불과했으니.

오소민도 똑같은 마음가짐이었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해원기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는데,

단목정이 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게 불신이다. 오 장로가 어떤 상황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잖으냐. 물론 오 장로도 그런 식으로 너를 위한다고 생각했을 테고. 이렇게 서로 오해하고 착각하다가 마침내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뜻과는 전혀 다른.”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부가 끝냈던 과거의 난세가 다시 도래한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다. 아니, 두렵지 않은 걸 넘어서 난세가 다시 시작된다면 용납하지 않을 각오도 세웠다.

신주, 지부, 벽세가 아니라 설사 당금 황실일지라도.

그럴 자신감도, 그러기 위한 능력도 갖추었는데. 오소민은 자신이 미덥지 않단 말인가.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을.

이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 생각인지.

오소민이 여자란 걸 안 이후로는 항상 보호할 마음뿐, 동료로 여기지 않았었고.

정을 품고서는 그런 감정이 더 심해져서 제멋대로 판단해 버렸구나.

독단(獨斷)은 편견(偏見)이다.

당장 공심의 계책이 불신을 낳는다는 걸 배웠으면서,

자신 또한 오소민을 믿지 못했다.

오해와 착각이 끝내 뜻과는 다른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해원기가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중얼거렸고.

“하아, 음차양착(陰差陽錯).”

“지금의 두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성어겠다. 이쯤이면, 그래, 두 사람이 돌아오나 보다.”

단목정이 빙긋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음은 모자라고 양은 어그러지고. 음양이 잘못 뒤섞인 것처럼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 채 이상한 결과를 맞이하는 상황.

이런 성어를 떠올리는 걸 보니 해원기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직시했고, 공심의 계책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깨달은 모양.

딱 적당한 때에 악송령과 정록이 돌아왔다.

그런데,

새로 상을 차리려는 듯이 먹다 남은 음식들을 밀어내고, 술잔을 두 개씩 양쪽으로 벌려 놓는 단목정의 동작이 상당히 신중하다.

“지금부터는 천교진인의 예언을 풀어봐야겠지. 삼(三)이라는 숫자를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듯한데. 어쩐지 중요한 부분을 슬그머니 감추어 둔 느낌이란 말이야. 흐흥.”

길바닥의 점쟁이처럼 가벼운 코웃음까지 덧붙여서,

해원기가 저절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친구를 마중하러 일어서는 것도 잊고.

이게 다 아우를 다독이려는 단목정의 마음 씀씀이였으나,

아직 거기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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