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77화 (377/410)

제95장 음차양착(陰差陽錯) (1)

목소리는 둘이었으나 찾아온 사람은 셋.

정록을 앞세우고 들어서는 단목정 뒤에 악송령의 모습까지 보이자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이 저절로 풀렸다.

위치 때문에 시각보다 훨씬 어두웠던 현도관이 도로 밝아진 듯, 살갗을 선뜻하게 만들던 삭풍이 봄바람으로 바뀐 듯.

외롭고 아플 때 형제보다 더 위로되는 건 없다.

더구나 그 형제가 술과 음식까지 챙겨온 바에야.

듬직한 악송령이 체구에 걸맞게 커다란 보퉁이를 탁자 위에 풀어놓는 동안, 정록은 바지런하게 현도관 내부를 둘러본다.

“신장(神將)도, 영관(靈官)도, 현무대제의 조상도 없으면서 감실을 올려놓는 좌대(座臺)는 어지간히 크구먼. 희한한 도관일세.”

중얼거리며 시선이 좌대 아래의 석판으로 향하자,

해원기가 손짓으로 부르며 미소를 지었다.

“이리 오게. 여기는 폐쇄된 곳이야. 주인이 올 때까지 우린 그저 손님일 뿐이고.”

주장선의 의발을 이은 정록이니 당연히 지하비고의 기관도 눈치챘을 터.

현도관의 기밀을 밝히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 과거의 교도인에게나 지금의 강유행에게 모두.

정록이 눈을 돌리며 묘한 표정을 짓고,

단목정이 웃음과 함께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하하, 원기가 엄한 곳에 우리를 들였겠나? 자, 일단 한 사람은 찾았으니 잠시 숨을 돌리자고. 아니면 정 형제는 계속 백일향 냄새를 쫓던가.”

지혜롭고 기미를 읽는 데 뛰어난 단목정.

정록이 얼른 손을 들면서 탁자로 돌아왔다.

“아이고, 사냥개 노릇도 쉬어가며 해야죠. 우선 끼니부터 때우고서, 악 형이 짊어지는 수고까지 했는데.”

큼지막한 만두가 한 꾸러미, 마른 육포와 볶은 콩 따위가 또 잔뜩. 여기에 작은 술 단지와 나무 잔이 몇 개요, 마지막엔 조그만 솥까지 나오는 통에,

해원기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게 웬 겁니까?”

탁자에 잔을 늘어놓던 악송령이 머쓱한 표정.

“해 대형 흉내를 내보려고.”

잽싸게 악송령 옆에 자리를 잡은 정록이 입맛을 다시며 해원기를 본다.

“해 형의 요리 솜씨가 대단하다며? 난 맛본 적이 없다니까 여기 악 형이 은근히 약을 올리더라고. 그렇다고 경사까지 솥을 메고 온 건 엉뚱하지만. 흐흐.”

어이없다는 웃음에 악송령이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갔다.

“항시 몸에 붙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요. 정 형도 백일향을 익힐 때 그랬다고 했잖소.”

“허, 기억력도 좋으셔. 그때만 생각하면 코가 문드러지는 것 같아서. 에취!”

일부러 코를 싸매는 시늉에 악송령도 빙긋 웃고.

해원기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신기해했다.

따로 사귀었던 친구들. 이 둘은 언제 이리 친해졌나.

미리 보낸 팔대탐자에게서 해원기의 소식을 듣자마자 단목정이 먼저 양곡현을 거쳐 청하현으로 달려왔고,

그곳에서 방온화와 상의한 후에 정록을 데리고 경사로 급행. 악송령이 약왕당주의 수행을 자원해 계속 동행하면서 정록과도 친분이 생겼나 보다.

단목정의 간단한 설명에 해원기가 정록을 보았다.

“정 형은 본래 황산으로 가는 거로 알았는데.”

코를 문지르던 정록이 심드렁하게 답하고,

“응, 그러다가 이쪽으로 왔지. 백일향의 추적술을 제대로 익힌 건 나뿐이니까, 우리 묵 소저를 도우려고 했더니.”

백일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표정. 묵소유와 헤어진 게 은근히 불만인 모양인데.

그러면서 ‘우리 묵 소저’는 또 뭔가.

해원기에게는 ‘해 형’이면서 여동생인 묵소유에게는 ‘소저’. 깍듯이도 호칭을 올려붙인다.

단목정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묵 소저 옆에는 노조를 비롯한 녹림장관의 정영이 모여 있잖은가. 그래도 노조께서 만일을 위해 백일향을 쓰셨으니. 흠, 역시 노련하셔.”

방송서가 언제 백일향을 사용했는지 해원기도 몰랐다.

해원기와 오소민 단둘이 경사로 가는 걸 선선히 배웅했던 게 이런 이유였었나.

“부처님 손바닥 안이로군요. 쩝.”

해원기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실 수밖에.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여도 필요할 때는 찾아낼 수 있었던 거구나.

“그리 불편해할 일은 아니다. 그만큼 노조가 네 상황을 존중하면서 어떻게든 보살피려고 궁리했다는 뜻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툭툭.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단목정의 손길에서 자상함이 전해진다.

해원기가 눈을 감았다가 뜨고서 한숨을 덧붙였다.

“후우, 예.”

현도관은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곳. 사부와 가까운 이들도 단지 먼 친척 정도로 알고 있다. 물론 그건 고검협을 존중해서일 뿐, 어찌 특별한 장소임을 모르겠는가.

그저 모호한 채로 두는 게 존중의 표현이었을 뿐.

그런데 해원기가 경사행을 고집했고,

방송서로서는 그 이유를 캐물을 수도, 동행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연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해서.

남모르게 백일향을 썼던 것이다.

만약의 사태에서 행방을 밝힐 실마리요, 아무 일도 없다면 백일 후에는 사라지니까.

존중하면서 보살피려는 마음 씀씀이 덕분에 이렇게 형님과 벗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단목정의 깨우침.

해원기는 자신이 아직 미숙하다는 걸 실감했다.

강호를 걷는 사람에게, 무공만이 전부는 아니다.

“자, 드시죠.”

악송령의 두툼한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였다.

그새 음식을 나누고 잔마다 술을 따라놓은 탁자.

단목정이 경쾌하게 잔을 들었다.

“악 형제가 수고했구먼. 먼저 목부터 축이자고.”

그러고 보니 악송령과 정록은 아직 아무것도 묻질 않았다.

오소민이 없다.

세 사람은 현도관으로 방향을 정했을 때부터 알았다.

같은 백일향이라도 해원기와 오소민에게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정록으로 하여금 경사를 헤매게 했던 백일향의 흔적, 그중 오소민의 백일향은 현도관에서 사라졌으니까.

과연 언제나 해원기의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오소민이 보이질 않는다.

무슨 일을 겪었을까. 낙담했다가 반기던 해원기도 심상치 않고.

악송령과 정록은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오면서 단목정이 고검협에 대한 존중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보다 벗에 대한 예의다.

해원기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느라 탁자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단목정은 형.

술잔을 두세 번 비울 때쯤 슬쩍 얘기를 시작했고, 채 한 식경도 되지 않아 해원기가 경사에서 겪은 일을 파악했다.

밝히기 어려운 부분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요점은 놓치지 않고.

지난 경과를 털어놓던 해원기뿐 아니라 옆에서 듣던 악송령과 정록까지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난 말솜씨.

‘과연 지혜로운 형님이다.’

새삼스레 감탄이 나오는데.

단목정이 빈 술잔을 내려다보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그래, 결국 핵심은 경사. 둔갑삼가가 연관되었던 거였구나.”

가만히 혼잣말로 되새기곤,

시선이 다시 해원기에게 돌아왔다.

“이 문제는 조금 더 따져본 후에 다시 하자꾸나. 지금은 우선 오 장로에게 집중해야겠지. 떠나올 때 개방 분들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으니. 흐음, 역시 동창은 미증유의 정탐 조직이로군. 처음부터 이 부분에 주의했어야 했다.”

미증유의 정탐 조직.

독특한 평가지만, 오소민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자 단목정이 미소를 머금었다.

“묵 대숙의 뜻에 따라 무림이 맺은 팔자의 언약. 그런데도 원기가 누구인지 생각보다 빨리 밝혀졌어. 전에 흥륭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지? 용호방과 풍운책이라는 기록. 그건 어지간히 강호를 샅샅이 뒤진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거다. 개방 내부에서도 몇 사람을 빼곤 알지 못하는 오 장로의 신분과 과거의 세세한 부분까지 찾아냈으니까. 언젠가 써먹을 주마(籌碼)였단 말이지. 아, 원기는 주마라는 단어를 아니?”

못 알아들은 이는 악송령 혼자. 정록이 간단히 설명해주는 소릴 들으며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마는 본래 수를 셀 때 쓰는 산가지였으나, 현재는 도박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다.

은자나 전표 대신에 화폐처럼 쓰는 표딱지. 크기에 따라 열 냥, 백 냥, 심지어 몇 천 냥짜리도 있어서 가치 있는 흥정거리를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지금 단목정은 이용가치라는 뜻으로 썼고,

또 흔한 속어를 덧붙였다.

“사람에겐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고, 총명한 이는 되레 자신의 총명에 당하는 경우가 많지. 이번엔 오 장로가 꼼짝없이 걸려든 모양인데. 흐음.”

어쩔 수 없는 약점, 총명에 당하는 경우.

춘매와 유모의 등장과 총명한 오소민이 불쑥 떠나버린 상황을 가리키면서 단목정의 미소가 굳어진다.

단목정이 말을 멈추자 정록이 인상을 썼고,

“이 꼬마 지렁이가. 뭘 하는 거야?”

악송령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형, 오 소저, 아니, 방 소저가. 떠났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것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

오소민이 똑똑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걸 알기에 더 곤혹스럽다.

구명지은을 내세운 조건도 이상하고.

톡톡.

단목정이 탁자를 살짝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오 장로라고 하세. 오 장로가 목숨을 빚진 두 사람의 등장은 지나치게 공교롭고, 그들이 밝힌 사연은 또 상당히 정교하고 복잡해.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러면서 요구 조건이 오 장로가 딱 받아들일 만한 정도로. 어쩐지 공심계(攻心計)의 냄새가 짙다.”

“마음을 공격하는 계책?”

정록이 의아한 듯 되뇌자,

탁자를 두드리던 단목정의 손가락이 해원기를 가리킨다.

“주마라고 했잖은가. 동시에 여기 원기를 또 주마로 썼겠지. 교활하고 영악해. 홍환이 이런 식으로 활용될 수도 있군. 자네 두 사람은 처음 접하겠지만, 과거에도 사마의 무리는 공심계를 즐겨 썼거든. 특히 원기의 사부님에게.”

과거 사마의 무리는 벽세와 지부. 원기의 사부님은 고검협.

악송령과 정록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고,

그 눈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은 해원기가 보였다.

십이협사(十二俠士)를 규합해 일백마령(一百魔令)과 싸웠던 협마지쟁(俠魔之爭) 때, 사부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은거했었다. 존경할 만한 벗이라고,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여겼던 남녀가 실은 사부를 음해하려는 간부와 음부.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해 동료를 잃었다는 자책에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어서.

다시 강호로 돌아왔을 때는 아예 사부가 가장 아끼는 아우를 노렸고,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사랑을 마로 물들였다.

천하제일검, 백년제일검사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정(情)이란 걸 파악했기에.

탁 소숙은 몇 번이나 죽을 위험을 헤쳐 나와야 했고, 이사모는 하마터면 사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뻔했었다.

그게 바로 공심의 계책.

사마의 무리에겐 우정과 애정 같은 사람의 고귀한 마음도 한낱 주마에 불과하다.

기민한 정록보다 무뚝뚝한 악송령이 오히려 더 빠르게 단목정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오…장로는 해 대형을 위해서라면. 또 해 대형은 오 장로 생각에 몰두해서. 비열한!”

표현은 서툴러도 감정은 절실해서.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정록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 멍텅구리. 잘난 체는 저 혼자 다 하더니. 조화부인? 그 요사스러운 계집은 어디 있는 거야?”

분통이 터질 노릇. 당장이라도 조화부인을 찾아내 물고를 내야 직성이 풀릴 심정인데.

드륵.

단목정이 술잔을 소리 나게 밀었다.

“그리 간단하진 않을걸. 자, 젊은 친구들, 다시 한잔하자고.”

사정을 알았다고 흥분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추정,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쪼르륵.

해원기가 술 단지를 들어 모두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더 따져보아야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 오소민을 되찾는 것부터.

공심의 계책이라고 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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