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장 숙연규전(宿緣糾纏) (4)
춘매와 유모가 오소민을 대신해 끌려갔으니 비록 천운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오소민은 그들에게 목숨을 빚진 셈이다.
구명지은(救命之恩).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가.
오소민이라면 은인이 원하는 어떤 요구라도 들어줄 것이다.
집안이 멸문당한 원한을 되새기느니 유모의 먼 친척이라도 찾으려고 했던 성품이었잖은가.
춘매의 소원은 바로 홍작을 구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홍작을 제압한 조화부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아니!”
해원기가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 옳지 않다.
춘매와 유모가 오소민을 찾은 게 보답을 받기 위해서였나. 그보다는 자신들의 은인을 구하고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을 터.
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오소민의 어깨를 덥석 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춘매와 유모, 그리고 홍작까지 구해내면 그만이잖아! 거기가 어디야? 당장.”
“안 돼.”
별안간 어깨를 잡힌 오소민이 급히 부정했다.
커다래진 눈. 놀라서가 아니다.
“그럴 순 없어.”
가라앉은 목소리조차 변하지 않은 채 입을 꼭 다무는 모습.
“왜, 왜 안 되는데? 자네의 말을 들으니 홍작만이 아니라 춘매 등도 조화부인에게 억류된 모양이니…….”
“손 쓸 도리가 없다고!”
해원기의 말을 뚝 자르며 고집스럽게 거절한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가는 시선에 해원기의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상하다.
제압당한 홍작, 영어의 몸이 된 춘매와 유모. 이들을 구해내기만 하면 되잖나.
춘매와 유모가 있는 곳은 오소민이 알 것이요, 홍작이 제압된 곳은 춘매와 유모가 알 터. 미처 방비할 틈을 주지 않고 신속하게 움직인다면 설사 적잖은 장애가 있을지라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 와중에 조화부인을 상대하느냐 마느냐는 다음 문제. 사람을 구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상황에 따라 도주나 굴욕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해원기의 능력을 잘 알고,
언제나 총명하게 사태를 판단하던 오소민이.
어째서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외면할까.
손 쓸 도리가 없다니.
“자세하게 말해보게. 무슨 곡절이 있는지.”
일그러진 인상을 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는 티가 확연히 드러나지만,
오소민은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
“자세하게 말하고 말고가 없어. 그런 상황이란 것밖에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술을 깨문다.
뭐 이리 답답한 대답이 있나.
불끈.
억지로 가다듬었던 속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그럼 모든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겠다는 말인가!”
호통이 터지고, 어깨를 힘주어 흔들어대는데.
오소민이 매몰차게 몸을 뒤틀어 뒤로 물러나며,
“다른 방도가 없다고 했잖아. 해 형은 귀가 먹었어? 이 정도 얘기하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냐. 대체 그 멍청함은 언제가 돼야 고쳐지려나. 그러니까 고구마 대장이란 소릴 듣는 거라고. 에이! 쳇!”
와르르 성질을 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해원기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혀까지 차고.
그러나 그게 일부러 하는 언행이란 걸,
모를 수가 없다.
해원기가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오소민이 뿌리친 자신의 손, 붙잡으려는 마음을 뻔히 알면서 이렇게 거리를 두다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혀를 차면서 아예 외면한 오소민의 옆얼굴이 유난히 하얗다.
이마, 콧날, 입술, 턱, 목.
해원기의 눈이 조심스럽게 붓으로 그리듯이 그 선을 따라가며,
“강호를 떠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스스로 자기 목소리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확 낮아진 음성. 오소민에게 묻는 건지 혼잣말로 웅얼거리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강호.
꼭 무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강호란 어차피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슬픔과 기쁨이 교차해서 울고 웃으며 삶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사람이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법.
힘들면 돕고, 지치면 부축하고.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 주고, 나쁜 일에는 함께 슬퍼하면서 정을 주고받는다.
거기를 떠난다는 건 곧 마음을 닫는다는 뜻.
복작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정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
힘들어도 혼자요, 지쳐도 혼자. 같이 기뻐해 줄 이도, 함께 슬퍼해 줄 사람도 없으니 좋고 나쁨을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다.
되는대로 나물 뜯어 끼니를 때우고, 적당한 풀밭에서 쓰러져 자면 그만.
누구를 만나도 희희낙락, 아무렇지 않은 척 명랑함을 가장한다.
그렇게 쾌체 일을 했었던 해원기다.
오소민은 듣지 못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 옆모습에.
해원기가 두 손을 내리며 물었다.
“모든 인연을 끊는다라……. 그렇다면 나도?”
이번에는 제대로 목소리를 냈다.
무림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서, 강호를 떠나려고 했던 지난 세월.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마침내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그건 오소민과 함께 어울리면서부터였다.
장거리 쾌체를 그만두고 무림에 정식으로 발을 들일 결심을 처음으로 밝힌 것도 대명호에서 오소민에게.
그 후로 지금까지.
마음을 다 전했다고 여겼거늘.
해원기와의 인연도 끊을 셈인가.
오소민의 속눈썹이 바르르 떠는 것 같았지만, 잘못 보았을지도.
바로 몸을 돌리면서 냉정한 대답만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해 형이 이해해 줘.”
휘리릭.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솟구친 신형이 꿈틀 휘어져 단번에 현도관을 넘어간다.
오소민의 외호는 유룡개. 팔선에게 배운 무공 중에서도 특히 유룡신법(游龍身法)에 뛰어나서 그렇게 붙였다고 했던가.
정말 헤엄치는 용처럼 하얀 옷자락이 공중을 누비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해원기가 다시 붙잡을 틈도 없이.
아니, 오소민의 대답에 해원기는 마치 발바닥이 땅에 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는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이 계속 맴돌고.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한겨울의 삭풍(朔風)이 이렇게 살을 에듯 차가웠었나.
해원기가 문득 느껴지는 한기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신왕공을 익힌 후론 특별히 한기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가슴 한쪽이 저릿할 정도의 추위라니.
호흡을 올바로 해야 해. 토납(吐納)으로 다스리지 않았다간 내상을 입겠어.
내상? 달리 공격을 받은 적이 없는데 무슨 내상이지?
그래, 잠심침령을 일으켜서 내부를 바로 잡자. 동시안을 자신에게 돌려 어디가 문제인지 알아보고. 혹시 탁기가 엉겼으면 바로 제탁지검을 쓰는 거야.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그게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엉터리라는 걸 훤히 알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한 건가, 어딘가 없어진 것처럼 휑한 기분인가. 그보다는 가슴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아픔.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럽다.
비틀.
해원기가 발을 내디디려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신공(神功)이라도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꼼짝달싹하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목석처럼 서 있던 해원기의 내디뎠던 발이 천천히 거두어지고,
창백한 얼굴에 표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게 사부에게 처음 배웠던 신왕공의 기초라는 걸 의식하지도 못했다.
행위지(行爲止)는 움직임이 그침과 같다는 의미. 사람은 움직여야 하지만, 움직이면 또한 쉬어야 살아간다.
구고문심(究叩問心)은 바로 잠심침령의 바탕. 궁리하고 또 두드려 스스로 마음에 물어야 하느니.
때 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가만히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자,
살을 에듯 추웠던 한기에 바짝 말라붙었던 몸에 생기가 올라온다. 보병의 감로가 조금씩 적시면서.
그러더니 삭풍이 어지럽던 머리를 스쳐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뻥 뚫린 것 같던 가슴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어난다.
필경 신왕공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축 처졌던 해원기의 손이 들리면서 자신의 뺨을 거쳐 눈썹 끝에 이르렀다.
‘조화부인은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을까? 그녀에게 무슨 이득이 있기에.’
아무리 삼전태의 경지라도 여전히 아픈 마음.
그래도 자신을 회복하자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조화부인이 거래랍시고 오소민에게 요구한 조건이.
모든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는 게 조화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홍작을 제압하고 그 힘을 빼앗았는데, 홍작을 찾는 춘매와 유모가 딱히 문제가 되었을 리 없다. 그런데 춘매를 시켜 오소민을 데려오라고.
‘언제부터 방효유의 딸인 걸 알았나. 또 그걸 춘매와 엮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고 아껴두었다?’
역시 믿기 어렵다.
조화부인이 홍작의 후계자고, 홍작이 춘매와 유모를 구했으니 조화부인은 일찍부터 춘매의 신상을 잘 알고 있었을 터.
오소민의 내력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의문이지만, 하필 상보태감과 만나는 곳에 십이음형사를 보냈다는 게 지나치게 공교롭다.
무엇보다 조화부인에게 오소민은 어떤 가치였을지.
방효유의 유일한 딸이요, 개방 순행장로라는 신분. 십족구멸을 당한 죄인의 가족이란 건 약점일 뿐이고, 개방 내에서도 신비하단 소릴 듣는 순행장로로선 개방을 위협할 인질로도 그리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팔선의 제자지만 현신장을 상대할 무공을 지닌 것도 아니다.
지혜가 뛰어나긴 해도 대국(大局)을 뒤집을 계책을 세운 적도 없다.
아니, 천하무적의 무공을 익히고 동창을 분쇄할 지모를 지녔다 쳐도,
‘그렇다면 차라리 제거할 음모를 꾸몄겠지.’
십이음형사로 유인했을 때, 춘매와 유모와 상봉했을 때.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홍작을 제압해서 춘매와 유모를 부리는 상황이었으니까 아예 함정에 빠뜨리는 게 손쉽잖은가.
그런데 그저 모든 인연을 끊고 강호를 떠나라는 간단한 요구만.
그리고 그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인 오소민.
생각할수록 의혹투성이다.
‘그러고 보니 홍작은 그간 뭘 획책했을까?’
장전민에게 들은 제독태감을 괴뢰로 삼은 태상과 무령산의 현도관에서 노파가 극진히 받들던 작약홍랑은 뭔가.
‘만상조화’의 신체를 밝히기 위해 절맥, 신맥, 산맥을 전부 연구하고. 심지어 인체실험도 감행했던 듯한데.
눈썹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현도관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해원기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에서 전해지는 인기척이 익숙하고,
“어지간히 헤맸는데 이번에는 맞을까? 정 형제.”
“단목 당주, 백일향(百日香)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이런 골목이 있는 줄도 몰랐을걸요. 냄새가 흩어지긴 했어도 해 형의 흔적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두런두런 나누는 음성에 당장 반가움이 일었다.
얽히고설킨 인연. 인연이란 쉽게 끊기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