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75화 (375/410)

제94장 숙연규전(宿緣糾纏) (3)

큰 저택들 가운데 숨은 듯 자리한 현도관이라 유시가 되지 않았는데도 어둡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오소민의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 해원기가 전에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십족구멸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은 방효유의 집안. 그 와중에 오소민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유모의 딸 덕분.

유모의 딸 춘매가 오소민을 가장해서 대신 형구를 쓰고 끌려갔다.

방효유의 딸이니 참형을 면치 못했을 터.

공부를 마친 오소민이 혹시 하는 마음에 유모의 먼 친척이라도 알아보려 했으나 끝내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춘매와 유모를 만났단다. 천외천 주루에서 음형사에 의해 실종되었던 오소민이.

그렇다면.

미간을 모은 해원기를 보면서 오소민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천외천 밖에 있었던 음형사, 처음부터 내가 목표였던 거였어. 몇 명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해 형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역할이었다더군.”

“유인이라.”

“응, 방해받지 않고 따로 만나고 싶었다나. 미안해서 적절한 보상을 준비했다고 했어. 조 아저씨를 찾았지?”

“음.”

“어떠셔? 고초를 겪긴 했어도 위험하지 않도록 애를 썼다던데.”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야기가 묘하게 흐른다.

독을 써서 상보태감을 중독 시키고 등장했던 음형사. 미끼니 낚시니 허튼소리야 어쨌든 해원기의 ‘제탁지검’을 아는 자들이었고,

오소민이 독을 이겨내는 걸 보곤 순음지체로 오해했었다.

주루 안팎에서 펼쳐졌던 술법과 공격. 마지막에는 눈속임으로 농락하면서 오소민을 빼돌렸던 게 전부 의도했던 진행이었나.

희미하던 보패지력의 기미까지 남겨가면서.

이어졌던 중중첩첩의 술법, 그리고 통왕의 중지라던 정자에 도착하자 또 ‘고검지주’라는 소릴 들었다.

그다음 이른 곳이 바로 무령산 아래의 뇌옥.

속이 타는 듯한 걱정 때문에 무려 수백 리에 이르는 거리를 쉬지 않고 뚫고 간 셈.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중간에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그 보상이 조원록이라.

위험하지 않도록 애써서 그런 꼴로 가두어두었던 말인가.

“이젠 괜찮.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보명오석을 써서 조원록을 회복시켰다고 대답하려다가 그만 목소리가 커졌다.

어째서 오소민이 그녀답지 않게 묘한 소리만 해대는지.

성큼 한 걸음 내딛는 해원기의 눈에 동시안의 비췻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혹시 고독이나 사술에 걸렸다면 즉각 풀어낼 요량.

그런데 오소민이 살짝 손을 들며 뒤로 물러나고,

“잠깐만. 먼저 내 말을 다 들어줘.”

애원하듯 청하는 것도 평소와는 다르다.

거리.

두 사람 사이는 겨우 몇 걸음.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지만,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자,

오소민이 들어 올린 자신의 손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해 형과 떨어지자마자 전음이 들렸어. 춘매와 유모가 나를 찾는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어쩐지 믿게 되더라고. 그래서 일단 이끄는 대로 소위 둔법이 설치된 곳으로 뛰어들었지. 자네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건…….”

흐려지는 말끝.

해원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민이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의 기억, 그것도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 속의 인물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움직인다.

어머니처럼 아껴주던 유모와 자신을 대신해 처형당했을 춘매. 다른 걸 돌볼 여유가 없었으리라.

오소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에, 잠깐 주위가 물속처럼 흐릿하더니 낯선 저택으로 나왔고. 마중한 사람이 바로 유모였어. 나이를 먹어서 늙긴 했어도 단번에 알아봤지. 나를 반기는 손길과 안아주는 품속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반면에 춘매는 정말 몰라보게 바뀌었더라고. 길에서 마주쳤으면 어느 귀한 집 규수라고 여길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서. 그래도 어렸을 때처럼 착하고 순한, 음, 한참을 울더구먼.”

춘매만 울었을까.

근 이십 년 만의 해후. 아니, 죽은 줄 알았던 친인(親人)을 다시 만났으니.

어머니처럼 대해주던 유모, 친자매와 다름없던 춘매. 서로가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오소민이 가만히 손을 내렸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어.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지금까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물론 유모와 춘매도 내가 어떻게 개방의 장로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더군. 뭐, 다행히 이 차림이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소박하지만 깔끔한 백의.

단삼육처럼 상거지 꼴이거나 평소의 방탕한 화화공자(花花公子) 모습이었다면 난감했겠지.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리다가 사라진다.

“십족구멸이라는 전대미문의 형벌. 당시에 조정뿐 아니라 강호에도 이 소식은 전해졌고, 적지 않은 기인이사들이 관심을 가졌었나 봐. 어떤 이는 안타까움으로, 어떤 이는 그저 흥미로. 그중에 요광효(姚光孝)와 거래가 있던 사람은 나름 선부(先父)를 구하려고 미리 손을 쓰기도 했다는데. 결국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결과를 확인하려고 시비 한 명을 보냈었대.”

충신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는 바로 오소민의 사부들인 팔선.

홀로 죽음을 면하고 거지꼴로 숨어 다니던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해 제자로 키워내면서, 어떻게든 그 신분을 숨기려고 애썼다.

오소민처럼 춘매와 유모도 기인이사에게 구해졌다는 건가.

오소민의 선부는 방효유. 방효유를 구하려고 미리 손을 썼다는 요광효. 그 이름이 경수사의 주지였던 도연의 속명(俗名)이란 걸 겨우 기억해내던 해원기가,

바로 다음 얘기에 눈을 부릅떴다.

“그 사람이 바로 현도관의 천교진인이고, 시비가 홍작이야. 홍작이 바로 유모와 춘매를 구한 사람이었어.”

어느 기인이사일까 했더니.

이렇게 얽힐 줄이야.

천교진인이 도연과 거래했다는 얘기는 믿을만하다.

고관대작이 소장한 진품을 보관하고 모조품을 제작해주는 현도관의 독특한 영업. 군비(軍費)를 넉넉히 갖추면서 세상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아내려 했던 도연에게 천교진인은 그야말로 귀중한 거래 상대였을 테니까.

천교진인 역시 세상의 흐름을 관조하며 즐기는 성격상, 제위(帝位)를 두고 다투는 숙질간의 싸움이 흥미로웠겠지.

막 안정되기 시작한 명(明) 왕조를 뒤흔든 내전은 어쩌면 명조운류의 또 다른 영향이었을 수도.

그 와중에 방효유를 구하려고 했던 것은 충신을 아끼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내란의 싹을 남겨두려는 의도였을까.

어떻든 도연은 확실히 영락제에게 방효유를 죽이지 말라고 권유했었고,

영락제 역시 방효유에게 살 기회를 주고자 했었다.

그러나 충신의 꼿꼿한 절개는 끝내 십족구멸이란 참혹한 결과를 낳았으며, 천교진인은 아마도 그 결과를 통해 명조운류를 거듭 확인했을지 모른다.

시비인 홍작을 보내서.

그 홍작이 오소민의 유모와 오소민으로 가장한 춘매를 구했다?

방효유를 구하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 메우려고?

어울리지 않는다.

죽었다고 여겼던 친인을 다시 만났다고 해도 총명한 오소민이 이런 어색함을 그냥 넘어갔을 리 없다.

눈도 깜빡이지 않는 해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오소민이 짧은 탄식을 덧붙였다.

“하아, 춘매를 선부의 딸로 착각해서는 아니야. 그럴 의리도 없었고. 단지 우연, 붙잡혀가던 춘매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나. 그럴 만도 한 게, 춘매는 희귀한 삼음절맥(三陰絶脈)의 체질이었으니까.”

삼음절맥. 경맥이 끊기거나 막혀서 보통사람보다 음기가 성하게 되는 일종의 선천적인 질병이다.

대부분 성인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는 절증(絶症)이지만, 적시에 제대로 치료하면 무공을 익히기엔 극히 적합한 상승의 재질로 바뀐다.

허나 희귀한 체질과 상승의 재질이 아까워서 구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현도관은 제자를 키우는 무림 문파가 아니거늘.

“홍작은 마침 그런 체질을 찾던 중이었거든. 신맥(神脈)과 산맥(散脈)에 관한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게 홍작이 계속 맡았던 일이었고 공교롭게도 춘매가 제때 나타났던 거야. 우연이지만, 춘매와 유모에겐 천운이었달까. 그 후로 춘매의 절맥을 고쳐주었고, 살갑게 어울려 살며 또 좋은 환경에서 학문과 무공을 배우게 해주었다니. 두 사람에겐 큰 은혜를 베푼 셈이지. 후우.”

천운, 은혜.

그러면서 왜 한숨이 나오나.

해원기가 양쪽 눈썹이 모일 정도로 미간을 찡그렸다.

신맥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경맥이 구성된 것, 산맥은 평범해 보이지만 경맥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

여기에 춘매의 절맥을 포함하면 그야말로 인세에 드문 진기한 체질을 전부 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홍작이 계속해서 맡은 일이 무엇이기에.

답이 바로 나왔다.

“유모와 춘매의 묘사에 따르면 홍작이라는 여인은, 음, 뭐랄까.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서치(書痴) 같은 성격. 쾌활하고 명랑해 보이지만, 한 가지에 몰두하면 오직 그것에 매달리는 기질인가 봐. 그래서 사람의 체질,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신체(身體)가 어째서 원만구족(圓滿俱足)하지 못한가에 대해 골몰했던 듯하고. 천교진인이 예전에 낸 문제를 풀려고 기를 썼다고 하더군. 만상조화(萬象造化)라는 문제.”

“응?”

해원기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저절로 비틀렸다.

만상조화는 조물(造物)을 형용하는 흔한 비유지만, 과거의 무림에선 특정한 한 인물을 가리켰었다.

바로 홍환의 소녀.

“그래. 춘매 이전에도 홍작은 이미 여러 체질을 실험했었고, 자기 연구를 계승할 다음 대의 홍작도 미리 정해놓았던 거지.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만났던.”

“조화부인!”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었고,

오소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녀의 이름은 주교화(周嬌華), 대조주가의 하나 남은 후손이야. 천교진인이라는 영감님, 정말 대단하더라고.”

이진원이 전해주었던 천기의 비밀.

천외의 삼가가 무너지고, 세상엔 삼가의 원한이 남았으니. 두 번 겹쳐 육악이 나온다고 했었다.

녹명의 뒤를 캐던 제갈봉은 신산제갈의 후대,

홍작의 뒤를 이을 조화부인은 대조주가의 후손.

천공사가의 둘에 둔갑삼가의 둘이 연관되는 상황을 가리켰던가.

해원기가 이를 악물다가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녹명이 녹판을, 홍작이 홍환을 되살리는 꼴이요, 마침내 둔갑삼가가 전부 화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이런 사실이 오소민에게 무슨 영향을 끼친 건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당장 달려들어 어깨를 쥐고 흔들며 다그치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참는데.

“그런데 그 조화부인이 거꾸로 홍작을 제압했다고 하더군. 자세한 내막은 춘매나 유모도 잘 모르고. 어떻든 홍작은 두 사람을 살려준 대은인(大恩人). 백방으로 생사를 확인하던 중에 조화부인이 거래를 제안했어. 방효유의 딸을 데려오라는.”

“거래라고?”

해원기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급변한 내용. 그러나 조화부인이 하극상의 반역을 일으킨 것보다, 춘매와 유모가 실은 영어(囹圄)의 상태란 것보다 더 귀에 걸리는 한 단어.

방효유의 딸은 바로 오소민. 그래서 십이음형사를 동원해 오소민을 데려갔다.

그리고선 이렇게 순순히 돌려보내는 게 거래일리 없다.

그럼 지금 눈앞에서 그늘진 얼굴로 얘기하는 오소민에게는 뭘 요구했을까.

“조화부인을 만났나?”

거듭 묻는 말에 오소민이 머리를 젓는다.

“아니. 춘매에게 이미 조건을 일러두었더라고. 은혜는 은혜로 갚는 법.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즉시 강호를 떠나면 홍작뿐 아니라 춘매와 유모도 살려준다는.”

“!”

다그치려던 해원기의 입이 풀칠한 듯 붙어버렸고,

대신 화등잔처럼 커진 눈.

머릿속엔 방금 들은 오소민의 말이 메아리친다.

은혜는 은혜로 갚는 법. 홍작은 춘매와 유모의 은인, 춘매와 유모는 오소민의 은인.

모든 인연을 끊고 즉시 강호를 떠나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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