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74화 (374/410)

제94장 숙연규전(宿緣糾纏) (2)

동창에서도 알아주는 요리사였다고 했나.

노종련이 예상보다 이르게 온 해원기를 뛸 듯이 반기며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다 부려보았지만.

반 시진이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데도 해원기가 조금도 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조원록에게 보명오석을 베풀어 회복을 돕고, 그다음에는 장전민과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동창의 행태와 숨겨진 음모. 이에 따른 강호무림의 상황.

하나같이 놀랄만한 내용이라 다른 데 정신을 팔 틈이 없었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는 조금 전 무령산의 경과가 언급되면서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동료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초점 없이 탁자를 보는 해원기의 모습에,

장전민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음식이 다 식었군요. 노 중랑, 술병을 좀.”

“아. 네.”

노종련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급히 술병을 들었지만.

해원기가 얼굴을 들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술 생각이 없군요. 배를 채우고 좀 쉬었으면 합니다.”

“그, 그렇죠. 그럼 어서…….”

노종련이 그저 어색하게 말을 받을 수밖에.

그간 자신이 어떻게 요리사 노릇을 했는지, 자신의 솜씨가 어떤지 같은 한가한 소릴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술병을 놓고 접시를 조금 밀어주고.

장전민이 조심스럽게 요리를 덜어 해원기 앞에 놓아주는 걸 보면서,

‘개방 순행장로와 어떤 사이기에 저리 걱정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괜히 입맛만 다셨다.

노종련이 탁자 위의 식은 음식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얼마 드시지도 않았군요.”

도읍이 시골보다 바쁘다 해도 점심은 상당히 풍성하게 먹는 편이고, 일찌감치 무령산으로 출발했던 노종련 자신이 꽤 배가 고팠기에 양을 넉넉히 차렸건만.

해원기가 든 것은 겨우 국수 한 그릇과 약간의 요리뿐.

그리고는 바로 조원록이 누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죽 피곤했으면.

그 지친 심신을 이해해서 장전민도 노종련도 말을 삼가는 바람에 극히 조용한, 별난 식사 시간이 되었었다.

평소에는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상을 치우던 노종련이 심드렁하게 식은 요리를 젓가락으로 뒤적일 만큼.

장전민이 찻잔을 손에 쥐며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그럴 만도 하잖나. 그간 해 대협이 겪은 일들, 동분서주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라. 우린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구먼. 허어!”

깊은 탄식이 더해진다.

과거의 난세가 마무리된 후, 본래 두 사람은 조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참의와 낭중 벼슬까지 올랐다가 난세를 바로잡으려는 의기로 강호에 뛰어들었던 처지였으니까.

그러나 친군지휘사사의 변모와 이진원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되는 등. 도저히 용납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충의지사가 어찌 자신의 안위만 따져 황실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잠시 위장으로 만들었던 회하방의 인연을 바탕으로 강호에 숨어들었다.

장전민은 경사 남쪽의 노학구(老學究)로, 노종련은 음식점의 요리사로.

어떻게든 황실과 조정 안에 흐르는 암류의 정체를 밝혀 저지할 결심. 그러나 영락제의 뒤로 잇달아 영명한 군주가 등장한 덕에 소위 인선지치(仁宣之治)라 불릴 정도로 흥성하면서,

어느덧 근 이십 년이 아무런 소득 없이 흘렀다.

하지만, 임금이 두 번이나 바뀌면서 이룬 흥성의 그늘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암류. 그것이 바로 동창이었고. 비로소 사태를 인지한 두 사람은 이를 크게 근심했다.

몇 번이나 일월표객과 연락해 조정의 충신들을 구하기는 했으나, 대세를 되돌릴 마땅한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함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대내의 일이요, 간사한 내시들 때문에 가려진 주상의 성총(聖聰)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신하 된 도리.

동창의 내부를 탐색해 원흉을 제거하여 황실의 생기를 보호하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어린 주상 곁에는 의지가 곧은 태후와 사내 못잖은 기질의 공주가 있으니.

암암리에 태후에게 선을 대고 동창의 행동을 주시해왔다.

그저 주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내시 따위. 금의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볍게 보고서.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상덕공주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갔다가 하마터면 큰 위험에 처할 뻔했다. 뇌옥을 지키는 이름도 모를 졸개들에 의해.

우물 안 개구리.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야 제독태감을 홀려 조정을 망친 요운(妖雲)의 정체가 태상이라 불린다는 걸 알았는데. 현도관의 작약홍랑 외에 또 경수사의 국사까지 연결되었다니. 아니, 해 대협은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노종련이 해원기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며 묻자,

장전민이 무거운 머리를 다시 흔들었다.

“그걸 따져 무엇 하겠나. 그분의 제자이니 당연히. 흠, 기질은 많이 달라 보였지만.”

“하긴.”

‘그분’이 거론되자 당장 긍정하는 노종련.

예전에 회화방에서 잠깐 마주친 인연이었지만, 뇌리에 각인된 강렬한 인상을 어찌 잊으랴.

산과 바다를 잇는 한 자루 검을 등에 지고,

어지러운 세상을 오연히 내려다보던 거인(巨人).

기억을 떠올리며 노종련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더 다정하고 신령한 느낌이…….”

장전민이 동감을 표한다.

“맞아. 그분에겐 감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무서움이 풍겼지만, 해 대협에겐 누구나 포용하는 넉넉함이랄까, 평범 속에 숨겨진 비범이랄까. 음, 하여간 앞으로가 문젤세.”

화제가 바뀌고, 노종련도 감상에서 벗어났다.

시간과 상황 탓에 해원기가 해주는 간단한 설명을 듣기만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했던 당금의 국면.

“그렇습니다. 설마 동창의 배후에 벽세와 지부의 흔적이 보일 줄은. 마치 과거의 난세를 재현하는 것 같잖습니까? 금의위의 설립부터 의심스럽긴 했지만.”

“과거는 과거. 다시 돌이킬 방도는 없지. 더구나 새로운 난세의 근원이 황궁이어서는, 으음, 절대로 안 될 일이네. 설사 그분의 후대라고 해도 해 대협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어. 강호와 조정은 강물과 우물물처럼 서로 범하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의 묵계였잖은가.”

“그렇지만, 해 대협이 아니고서야 어찌. 게다가 그분처럼 해 대협이 혼자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누가 감히 그 뜻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끄응.”

장전민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노종련이라고 황궁의 일을 강호의 검협에게 맡기는 게 달가울 리 있나. 그러나 힘은 부족하고, 백년제일검사가 정한 것은 누구도 뒤집을 수 없다.

“그래도 적절한 선에서. 황실의 체통을 어떻게든 지키는 쪽으로 해결되어야 하네. 잊지 말아야지, 비록 세상이 안정되고 나라가 흥성하긴 했으나 아직도 도처에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당장 북에는 몽고의 잔당이, 남에는 왜구의 침습이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으니. 자칫 천하가 뒤집힐 진짜 난리가 난단 말일세.”

가천하(家天下). 황실이 곧 천하라는 사상.

장전민의 주름진 얼굴엔 충신의 고심이 깊이 새겨지고,

노종련도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인상만 썼다.

무공을 익히고 한때 회하방으로 강호에 끼어들긴 했어도, 필경 두 사람은 조정의 신료(臣僚)였다.

탁자의 식은 음식 위로 하염없이 시간이 흐른다.

신시(申時)가 끝날 무렵, 사가호동 어귀에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해원기가 전립을 쓴 조원록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전립 아래 조원록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

“정말 괜찮겠습니까? 강 사부가 안전해졌으니 이 조원록이 비록 큰 힘이 되진 못하더라도 소공자 곁에서 모시는 게.”

“또 그러신다. 이미 다 정했잖습니까. 조 아저씨는 대량강문을 수호하기로 맹세하신 분. 당연히 강 사부 곁에 계셔야지요. 모든 일이 해결되면 다시 전처럼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사가호동을 나오면 조원록은 폐병방으로. 알려준 대로 훼병장 이진원을 찾아 강유행과 합류하면 된다.

해원기가 일부러 큰길을 통해 다시 현도관으로 향하면서 이목을 끌어주는 새에.

조원록이 짧은 한숨을 삼키며 두 손을 모았고,

“다시 뵐 수 있겠지요?”

기어이 아쉬움을 드러내는 인사에 해원기가 조원록의 모아 쥔 주먹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쌌다.

“그럼요. 꼭 다시 만날 겁니다.”

따뜻한 손.

조원록이 잠시 아련한 눈길을 보내다 전립을 눌러쓰며 몸을 돌렸다.

그 눈에 비친 건, 잠룡재에서 글공부하던 어린 소년 대신에 늠름한 검객이구나.

다른 골목을 찾아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조원록. 해원기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바로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큰길, 그곳부터는 황궁과 마주한 고관대작의 저택이 시작된다. 설명 들은 지리를 떠올리며 휘적휘적 여유만만한 걸음걸이.

경사의 유람객인 양 보일 생각이었으나.

이마를 훤히 드러낸 선명한 용모, 단정한 흑의경장에 비스듬히 멘 한 자루 검.

세상에 다시 없을 풍화(風華)가 넘치고,

당당한 보무(步武)에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가 담겼다.

번화한 거리와 화려한 건물들.

해원기가 오가는 인파 속을 걸으며 조원록과 나누었던 얘기를 되새겼다.

강유행이 현도관을 이어받은 후 몇 년간 왕래했던 홍작.

사가삼미 중에서 잠룡재에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홍작이었기에 강유행과 노태군, 조원록과는 스스럼없이 어울렸었다.

현도관의 사업과 경사에서의 일상생활까지 꼼꼼히 돌봐주었고,

조원록의 무공 수련에도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나.

그렇게 홍운백일품이 유출되었다.

‘홍작이라면 그 이치를 깨닫는 게 어렵지 않았겠지. 물론 내공심법의 구결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을 테고.’

비로소 태백종사라는 자가 어떻게 홍운백일품을 썼는지, 왜 원극순양공이 아닌 원양대진력을 바탕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원록이 실종된 배경 역시.

조원록이 어울렸던 같은 속가의 고수들이 전부 백가장 도자명과 관련이 있는 건 맞지만, 그들을 소개한 자가 바로 홍작이었다.

동문처럼 대하며 외부 소식을 가르쳐주던 속가 고수들이 미혼약으로 정신을 잃게 만드는 데에야.

‘이진원을 공격했던 금궁시위라는 자들이었겠지. 서문창도 홍작과 연결되었었나.’

조원록은 그렇게 뇌옥에 감금되었고, 처음에는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그 후론 거의 약물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딱히 요구하는 것도 없이.

그저 강유행을 고립시키는 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번화한 거리를 지나 조용한 저택들 사이로 접어드는 해원기의 입매가 단호해진다.

어떤 이유든 간에.

‘조 아저씨를 그렇게 대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인적이 사라진 저택 가의 골목에서 해원기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녹명이 등장했던 옛 잠룡재 건물을 지나 현도관 앞뜰로 들어서던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유시(酉時)가 되지 않은 이른 저녁인데,

그 앞뜰에 홀론 선 백의 여인.

“한참 기다렸잖아.”

미소를 지으며 투정하듯 인사를 건네는 오소민의 얼굴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어려서.

해원기가 언뜻 다가갈 수 없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 오소민이 아닌 것 같다.

“괜찮은…가?”

낯선 사람 대하듯 말투까지 꼬인다.

오소민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호호,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여? 그나저나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유시 무렵에나 도착할 거라고 하던데.”

스스로 이상하게 보이는 걸 아는구나. 그러나 해원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고.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가?”

해원기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현도관에 이른다고 누가 알려주었을까.

짧은 질문에 오소민의 표정이 또 기이하게 흔들린다.

“전에 얘기했었지. 나 대신 형구를 쓰고 끌려간 춘매. 그녀와 유모를 만났거든.”

진짜 오소민이 맞지만.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음?”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