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장 숙연규전(宿緣糾纏) (1)
뾰족한 봉우리들 사이로 얼핏 건물 지붕이 보였다고 벼락같이 날아들었으니 어쩌면 성급했을 수도.
그러나 해원기는 심상에 전해지는 기이한 느낌에 그곳이 바로 장전민이 소문으로 들었다는 현도관임을 확신했고,
동시에, 소위 태상이라는 이름으로 배후에서 온갖 일을 꾸며왔던 홍작의 본거지라면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으리라고 예상했다.
천외천에서 무령산까지. 해원기를 농락하듯 유인했던 음형십이사가 전부 모여있을 가능성도 있잖은가.
천외천 안에 나타나 인원수가 바뀌었던 검은 포대, 밖에서 들린 목소리와 막강한 장력, 그리고 통로를 지켰던 백포 복면인.
정확히 몇 명인지 확실치 않았으며 생전 처음 보는 괴이한 능력을 구사했다.
무공이라기보다는 술법에 속하지만, 그것조차 단정하기 어려운 자들.
그래서 전력을 기울였다.
수정지력이 해일처럼 일어나고, 풍뢰지결이 하늘 끝에 이어지며, 운혜덕택이 공간을 가득 메운 채.
해원기의 일신은 삼재(三才)를 관통하는 거대한 한 자루 검.
그대로 건물 앞으로 내리꽂혔다.
쾅!
한 자나 꺼진 지면이 사방으로 쩍쩍 갈라지고 바로 앞의 건물은 기둥이 흔들리면서 지붕이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 무령산에 난데없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다.
흙먼지가 뽀얗게 이는 가운데 해원기가 낮은 자세로 고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앞에 내민 왼손은 검왕오형, 검병을 쥔 오른손은 천손검법. 전신의 검왕법신은 은은히 투구와 전갑의 형상까지 드러내어.
천손회갑(天孫盔甲)을 걸친 검왕현신(劍王現身).
팔풍(八風)이 팔방(八方)으로 뻗고,
피어오르는 흙먼지는 뇌운(雷雲)인 양 짙어진다.
내리꽂히면서 바로 신령검역을 포설했으니, 설사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 음형십이사라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우르르르.
한 호흡 늦은 우레를 두르고 두 눈의 동시안이 벽뢰(碧雷)처럼 주위를 훑었다.
정면에는 삼 층짜리 커다란 전각, 좌우로 낮은 계단을 따라 회랑이 뒤쪽의 조그만 누각들과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로 기암괴석과 고목들을 운치 있게 배치해서.
사방 백 보 정도의 그리 넓지 않은 후원(後苑).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정교한 정대누각(亭臺樓閣)이 복잡하게 얽혔고, 전우회랑(殿宇回廊)이 들쑥날쑥 덧붙은 구조가,
진짜 현도관과는 판이하게 화려하다.
당연히 많은 인원이 거할 것이고, 기관이나 매복도 있을 터.
삼전태의 신왕공이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오소민의 흔적을 찾으려는데.
문득 귓가를 울리는 늙수그레한 음성.
정면의 전각 구석, 작은 문이 삐꺽 열린다.
“태상태성(太上台星), 응변무정(應變無停), 구사박매(驅邪縛魅), 보명호신(保命護身)…… 이런, 뇌신강림(雷神降臨)인 줄 알았더니.”
머리에 두툼한 청건(靑巾)을 쓰고 푸른 도복을 입은 노파.
구부정한 자세로 낡은 불진(拂塵)을 흔들며 중얼거리는 건 도사들이 흔히 외우는 태상본명연생주(太上本命延生呪)다.
눈썹도 거의 남지 않았고 주름으로 늘어진 얼굴에는 별반 놀란 기색도 없이,
노파가 짓무른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는 모습에 해원기의 눈매가 비틀렸다.
청천벽력 같은 검왕현신에 나타난 이는 이 노파 단 한 사람.
또 예상이 빗나갔다.
긴장을 풀진 않았다.
놀라지도 않고 주문을 중얼대며 나오는 노파가 일단 심상치 않고,
술법에 능한 음형십이사가 또 무슨 귀신놀음으로 희롱하려는 수작일지 모른다.
그러나 겨우 노파 한 사람.
아래쪽에 뇌옥을 만든 것도, 조원록을 가두어 괴롭힌 것도 다 이 현도관이 본거지이기 때문이잖나.
배후에서 제독태감을 조종하는 ‘태상’의 거처라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해원기가 자세를 바꾸지도 않고 말없이 시선을 보내자,
노파가 문 앞에 서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 무섭게 보면 이 노파가 어찌 견디겠소. 절세검왕은 함부로 인명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을 턱 놓고 있었더니만. 쯧쯧.”
누군지 알고 기다렸다는 뜻.
해원기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데,
노파가 도복 어깨에 불진을 척 걸치며 얼른 말투를 바꾼다.
“아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노신은 태상성신(太上聖神)을 모시는 현도관의 일개 도축(禱祝), 삼가 절세검왕 해 대협께 아뢸 전언을 지니고 기다리던 차였습니다.”
손을 모으고 읍하는 모습이 꽤 그럴듯하다.
도축은 부적을 사르고 기원을 대신 읊어주는 하찮은 직분. 태상성신이니 현도관이니 하는 소리보다 ‘전언’이란 단어가 귀에 들어온다.
해원기가 다시 한번 노파를 살피곤 천천히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주름이 늘어진 얼굴에서 특별한 표정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짓무른 눈까풀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켜서,
억지로 감정을 누른 티가 난다.
사방 백 보의 후원 주변엔 이 노파를 빼곤 아무도 없고,
일개 도축이라는 노파 또한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전력을 기울여 자세를 잡은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었다.
스스스.
뇌운 같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해원기의 모습이 똑똑히 드러나자 노파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그 작은 변화에 해원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외워서 하는 말에, 내가 이렇게 대할 것이라고 알았다?’
초조와 긴장을 가라앉히자 비로소 심상치 않았던 노파가 실은 대단히 평범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전언이라면.”
“건문충신(建文忠臣) 정학선생(正學先生)의 따님이자 현임 개방 순행장로이신 방 소저의 말씀이지요.”
“!”
막 열리던 말문이 턱 막혔다.
건문충신, 정학선생. 방효유를 높게 일컫는 관형사이니 전언을 남긴 이는 바로 오소민.
지금까지 찾으려고 속을 끓였는데,
그 오소민이 전언을 남겼다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헷갈릴 상황. 그러든 말든 노파는 계속 입을 놀려댄다. 외웠던 말을 얼른 다 쏟아내려는 듯.
“에, 돌연히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겨서 제때 알릴 틈도 없었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저녁 무렵까진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아무 염려하지 말고 경사 현도관에서 기다리게. 이 말을 들으면 바로 돌아가라고, 여기까지입니다. 후우.”
숨이 차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짓무른 눈이 조금 풀리는 건 맡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뻗었던 왼손도, 검병을 쥐었던 오른손도 어느새 아래로 쳐졌다.
이 무슨 엉뚱한 얘기인가.
갑작스레 전해진 오소민의 전언.
해원기가 맥이 풀리려는 자신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전언이 진짜 오소민의 말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해원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걸 신물로 삼는다고, 양곡현의 유룡생이라고 하면 해 대협은 알아볼 거라던데. 옜소!”
노파가 냉큼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던져준다.
받아든 해원기가 눈을 빛냈다.
녹슨 동전 하나.
바로 개방의 신물인 전령전이다. 해원기가 처음 오소민을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양곡현이라는 지명과 유룡생이라는 가명.
물론 이 전령전은 당시에 돌려줬던 그 동전이 아니다. 해원기가 사부에게 받았던 것은 취개 단삼육의 것. 지금 손바닥에 올린 전령전은 녹이 많이 슬었으니 본래 오소민이 지녔던 것일 터.
그보다 녹슨 동전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하화의 보패지력.
지명, 가명, 보패지력. 전부 오소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전언의 주인공은 진짜 오소민.
해원기가 전령전을 요대자에 넣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천외천 주루에서 무령산의 현도관. 온 힘을 다해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오소민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지금 어디 있소?”
“모릅니다.”
“누굴 만났단 거요?”
“들은 적 없습니다.”
척척 나오는 노파의 대답. 전하라는 말을 다 했으니 이젠 아무 상관없다는 투다.
어깨에 걸쳤던 불진을 도로 잡으며 당장이라도 몸을 돌이킬 모습.
해원기가 질문을 바꾸었다.
“여기 주인이 누구요?”
“당연히 태상성신…… 아, 관주를 묻는 게요?”
노파가 되는 대로 말을 받다가 짓무른 눈을 껌뻑거리더니. 주름투성이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드러난다.
“작약이라는 도명(道名)을 쓰시는 홍선랑(紅仙娘)이시지요. 지극 정성으로 태상성신을 받들어 성력신지(聖力神智)를 함께 받으신.”
“지금 어디 있소?”
“무시로 성신을 뵙는 분이라 언제 어디 나타나실 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더구나 근래에는 국조(國祚)의 바탕을 다지기에 바쁘셔서.”
“이 아래에 동창의 뇌옥이 있는 건 아오?”
“알지요. 홍선랑께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에게 성신의 교화를 베푸시려고 만들었으니까. 그 뜻을 기려 조정에서 물자와 사람을 아끼지 않고 대서, 참 기특하잖소이까!”
“허.”
대화를 거듭할수록 자랑스러워하는 노파.
더 들을 것도 없어서,
해원기가 짧게 탄식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노파는 좋게 말하면 독실한 신앙, 나쁘게 말하면 광신도. 그저 시키는 대로 이 자리에서 해원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성력신지를 받으신 홍선랑을 모시는데 뭐가 겁나겠는가. 게다가 국조의 바탕을 다지신 덕에 조정에서 보낸 자들이 와 있으니.
‘절세검왕 해 대협’이 누군지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허탈하기 그지없다.
비록 오소민이 남긴 전언을 듣긴 했어도.
하릴없이 몸을 돌릴 수밖에.
경사 동성구(東城區) 조양가(朝陽街)의 북변.
북쪽에서 끌어들인 물길을 따라 작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 어귀에 이른 해원기가 하늘을 보았다.
사시(巳時)쯤 되었나.
무령산 현도관에서 다시 헛간으로 가보았으나 장전민 등은 이미 떠난 후. 동창의 추적을 고려해서인지 깔끔하게 흔적을 지웠다.
조원록을 부탁한 터라 서둘러 뒤를 따르고자 했으나,
경사로 돌아가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한낮에 가까워 대놓고 경공을 쓰기 어려웠고, 자칫 장전민보다 먼저 도착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새벽까지 이어졌던 일들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 그리고 오소민이 남긴 전언.
차분히 정리하다 보니 장전민과 약속했던 장소에 가까워졌다.
‘여기가 사가호동(史家胡同)이라고 했으니까 마지막 집만 찾으면.’
호동은 큰길과 큰길 사이의 골목. 경사처럼 큰 성시(城市)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고, 그중에는 사호동(死胡同), 즉 끝이 막힌 골목도 많다.
들어간 길로 다시 나와야 하는 막힌 골목. 사가호동의 마지막 집이 바로 장전민과 약속한 장소.
지리를 몰라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은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허기를 느꼈다.
잠도 자지 못했고, 끼니도 때울 틈이 없었구나.
‘속이 비면 잡념이 는다고 하셨지만.’
사람은 쇠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지고한 경지에 들었다고 해도 쉬지 않으면 지치고 먹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법.
사부의 가르침을 떠올리자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드물게 격했던 감정, 지금도 오소민을 떠올리면 답답해지는 가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알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