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장 심정투로(深情透露) (4)
동창이 금의위를 수족으로 삼은 후에 길러낸 수하들은 열두 띠, 십이생초(十二生肖)로 조를 짠다. 한 조가 네 명이니 모두 마흔여덟이 한 대(隊), 대주(隊主)와 서기까지 합하면 총 오십 명이다.
이 뇌옥을 지키는 오십 명 중에 나가떨어진 자가 한 서른쯤 될까.
검을 거두고 검왕수를 썼기에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고, 아직도 스무 명 남짓 멀쩡한 자들이 남았겠지만.
더는 달려드는 자가 없다.
누가 감히 나서겠는가.
해원기가 장전민과 노종련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뇌옥을 뒤져보지요.”
비로소 정신이 든 두 사람이 서둘러 좌우로 나뉘다가,
“상덕공주는 계시지 않을 겁니다. 또 누가 갇혔는지, 일단 알아봅시다.”
“네?”
“어떻게…….”
뜻밖의 말에 또 놀라게 되었다.
해원기의 신분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방금 목격한 어마어마한 신위(神威). ‘그분’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여기에 무슨 경로로 오게 되었는지, 어찌 이렇게 딱 맞게 등장했는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지만,
상덕공주가 여기 없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나.
어리벙벙하면서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서둘러 뇌옥으로 향해야 했다.
상덕공주는 장전민을 통해 일월표객과 연락을 취했다고, 또 그때까지 노종련은 실종된 상태였다고 했었다.
그런 장전민과 노종련이 어떻게 함께 뇌옥에 상덕공주가 갇혀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까.
해원기에게도 묻고 싶은 게 적지 않았으나,
뇌옥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 혹시 오소민이 잡혔을지도 모른다.
건물 앞면이 모조리 뜯겨나가면서 훤히 드러난 쇠창살. 칸막이로 구분한 곳을 하나씩 뒤져보는데.
이번에는 해원기가 깜짝 놀랄 차례였다.
맨 안쪽 칸에 홀로 쓰러져 있는 인물. 손과 발에 쇠사슬을 차고 산발한 머리와 피투성이가 된 참혹한 모습이었으나, 본래 건장한 체구였을 사내.
헤어진 지 오래되었고, 모습도 바뀌었지만.
해원기는 단박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조 아저씨!”
와작.
쇠창살을 맨손으로 쪼개고 황급히 다가가자, 해원기의 목소리를 들은 장전민과 노종련도 차례로 돌아왔다.
“정말 공주마마는 계시지 않는군요.”
“이쪽도 비었습니다. 해 대협, 그 사람은……?”
채챙.
대답 대신 쇠사슬이 끊겨나가고,
피투성이 사내를 둘러업고 돌아서는 해원기의 얼굴이 심각하다.
“피신할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향전을 부수긴 했어도 이곳은 동창의 뇌옥.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해진다.
나이 많은 장전민이 눈을 껌뻑이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노 낭중, 서두르세.”
상덕공주를 구출하러 왔으니, 이 뇌옥을 벗어난 후에 몸을 숨길 곳을 미리 마련해두었을 터.
여기서 엉뚱한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바보짓이다.
노종련도 바로 알아듣고 황망히 앞장섰다.
뇌옥의 뒤에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 쪽으로, 세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무너진 중당을 뛰어넘는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비록 이진원을 만나 강유행을 부탁한 후엔 조원록을 찾을 방법에 집중했지만,
오소민을 찾으려고 서두른 끝에 다다른 뇌옥, 이 뇌옥에 조원록이 있을 줄이야.
어떻게 된 일일까.
반 시진 가깝게 달려 외진 헛간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그 생각뿐. 머릿속이 헝클어진 것 같았다.
이곳은 경사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 정도 떨어진 무령산(霧靈山) 기슭이란다. 그다지 높진 않지만, 상당히 험해서 초부목동도 보기 드물고, 시인묵객도 잘 찾지 않는 곳.
장전민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상덕공주가 불쑥 찾아와 하북으로 미행(微行)을 가겠다고 졸라댄 바람에 일월표객을 불러 부탁하고도 동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나.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노종련은 사실 일찍부터 신분을 속이고 동창 내부에 잠입해서, 나름 솜씨 좋은 요리사로 곳곳을 기웃거릴 수 있었고.
“……마침 태상의 명으로 공주마마를 이 무령산 뇌옥에 가두었다는 정보를 얻었던 것이죠. 손이 부족하긴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둘이 감연히 구출에 나섰다는 건데.
해원기가 조원록의 손목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상덕공주와 일월표객을 공산 백운동에서 만났습니다. 제독태감이 당금 황상인 줄 알고 함정을 마련해두었던. 지금은 녹림장관의 보호를 받으며 청하현에 도착했겠지요.”
참혹한 몰골의 조원록을 돌보느라 바빴지만, 상대방의 궁금증부터 푸는 게 먼저.
그러나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비로소 얼굴을 마주한 장전민과 노종련이 정중하게 예를 취한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영광, 감사.
두 사람이 사부를 떠올리며 인사하는 걸 모를 수 없다. 해원기가 얼른 답례하며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저도 두 분을 만나 기쁩니다만. 음, 지금 태상이라고 하셨죠? 혹시 그 뇌옥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지. 저와 헤어진 동료의 행방을 찾다가 그 뇌옥에 이르렀기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난다.
무수한 기둥이 늘어섰던 십자로에서 선택했던 문짝에 뭔가 술법이 걸렸다는 건 이제 짐작하지만, 쫓던 백포 복면인은 사라졌고, 오소민은 완전히 행방불명.
경사 동문대로의 천외천 주루에서 정자로, 정자에서 다시 십자로를 거쳐 이백 리나 떨어진 무령산 기슭까지 와버렸다.
당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다.
잠깐 노종련의 얼굴을 본 장전민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으흠, 공주마마께서 공교롭게도 해 대협에게 구해졌군요. 녹림장관의 보호를 받는다니 다행입니다. 하여간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은 뭔가 야료가 있다는 뜻인데. 에, 태상은 동창 제독태감을 뒤에서 조종해 역모를 꾀하는 자라고, 대강 그렇게 추측하고 있으며. 조금 전의 뇌옥은 바로 그 태상이 일 년 전에 외부에 따로 만든.”
해원기의 급한 기색에 서둘러 얘기를 뭉뚱그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학식이 뛰어난 장전민조차 말이 뚝뚝 끊기는 판.
노종련이 가세한다.
“사례감의 장인태감은 전대(前代)부터 모셔온 충신이었는데 감히 왕망(王莽)을 본받으려 한 것은 전부 그 태상이란 자 때문입니다. 정체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홀리는 데 뛰어난 좌도(左道)의 술사(術士)인 듯. 언제 궁중에 스며들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대략 십오 육 년 전에 등장했고, 그때는 작약홍랑(芍藥紅娘)이라 불렸다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 뭐, 동창이 워낙 불남불녀(不男不女)가 넘쳐나는 도깨비굴이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설명을 보탠다는 게 말이 길어지고,
장전민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머리를 되찾아왔다.
“뇌옥을 그곳에 따로 만든 이유가 그 태상의 본거지와 가까워서랍니다. 노 낭중의 말처럼 도깨비굴이라고 할 만한 곳이라서 동창뿐 아니라 이십사아문의 환관과 심지어 조정대신 들까지 그곳에서 기이한 힘을 부여받았다더군요. 소문은 진작 돌았으나, 그동안 설마 뇌옥의 파수병까지 그리 강해졌을 줄은…….”
“본거지요?”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태상의 정체가 작약홍랑이라 불렸던 여자. 여기서도 홍작이란 이름이 나왔지만, 지금 귀에 걸리는 내용은 오직 하나뿐.
기이한 힘을 부여하는 도깨비 굴.
고의든 실수든 천외천에서 여기까지 해원기를 유인한 백포 복면인과 선이 닿을 만한 장소다.
“네. 아까 우리가 빠져나온 반대 방향으로 무령산 중턱까지 오르면 숨겨진 도관(道觀)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 장전민과 노종련이 직접 확인한 정보가 아니다.
그래도 놓칠 수 없는 지푸라기.
“숨겨진 도관.”
해원기가 신중하게 되뇌자, 노종련이 얼른 말을 받는다.
“현도관이라고 한답니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해원기가 벌떡 일어나 손을 모았다.
조원록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장전민과 노종련에게 간단한 소개와 보호를 부탁한 후에, 다시 만날 곳을 정하자마자 곧장 무령산으로 향했다.
두 사람에게 들은 내용은 태반이 소문.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문에만 근거해서 찾아 나서는 건 경솔한 행동이지만, 해원기에겐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특히 도관의 이름을 들었을 때. 현도관을 고스란히 차용하지 않았나.
‘그래, 홍작이라면.’
걸리는 것을 모조리 꿰뚫는 신화검형의 속도에,
초상비, 육지비행술에 십삼요경공. 게다가 사천당가의 전궁유향까지 모조리 풍뢰지결로 아울렀다.
뇌옥을 거치지 않고 곧장 무령산을 넘어 반대로 내려갈 셈이다.
대낮에 공중을 가르는 유성처럼 날아가는 해원기의 얼굴은 드물게 무서운 표정.
결국, 홍작이 벌인 짓이었던가.
해원기에게 직접 찾아와 지하비고 열쇠의 소재를 탐지하려 했던 녹명. 동창을 자기 장난감인 양 떠들었지만, 그녀의 목적은 구양금오를 완전히 해석할 자부십이경의 진품이었다.
자존망대(自尊妄大). 고깔까지 쓴 의젓한 여승 차림으로 온갖 잘난 척을 다 했으나 사실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조차 몰랐을 수도.
강유행이 현도관을 이어받은 후 몇 년간 왕래하다 사라졌다는 홍작이 오히려 녹명을 뒤집어쓰고 동창을 주물렀던 모양이다.
영활간교(靈活奸巧). 태상이라는 이름만 내걸고 제독태감을 조종했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역모의 기치를 세우곤 야금야금 대내를 집어삼켰을 터.
간밤에 조화부인이 한 무리를 대동하고 싸움을 걸었던 것도 그저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원기를 압박해 움직이도록 했고, 동시에 상보태감의 반응까지 기대했던 교활한 계책이었다. 여태껏 숨겨왔던 십이음형사라는 자들까지 동원해서.
잠룡재에서 글공부했던 아련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해원기의 미간이 베인 것처럼 파인다.
홍작, 녹명, 백화.
진기(珍器), 명기(名器), 보기(寶器)라는 암호는 본래 교도인이 장난처럼 만들었다던가.
백화는 주로 교도인을 받드는 역할이었고, 현도관과 잠룡재를 오가는 일은 녹명이, 잠룡재의 생활 일체를 맡은 이가 홍작이었다.
해원기를 비롯해 잠룡재 식구들이 가장 많이 어울렸던 홍작. 쾌활하고 재치가 넘치며 늘 바쁘게 움직였던 그녀가.
이젠 영악(獰惡)한 요물이 되었구나.
조원록은 무공이 폐쇄되고 약물에 정신을 잃은 채 모진 고문에 시달려서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습이 자꾸 오소민과 겹쳐 보여서,
해원기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천성이 순후하여 살기가 거의 없다.
사부가 해원기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이유 중의 하나.
무(武)는 힘(力)이요, 검(劍)은 흉(凶)이건만 해원기에게 무엇을 기대해 무공과 검을 가르쳤을까.
공부를 마치고도 무림에는 아예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부는 그러리라는 것도 알았으면서 그저 뜻대로 행하도록 맡겨두기만.
그래서 무도(武道)랍시고 염정(恬靜)한 생활을 택했다. 장거리 쾌체로 급한 사람을 돕고, 황하의 수재를 남몰래 미리 막는 거로 만족하며.
히죽거리는 건 얼굴뿐. 남들에겐 혹여 답답한 바보로 여겨지더라도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오고, 즐거워하면 화낼 일이 생긴다.
그러면 기뻐하지 말자, 즐거워하지 말자. 그래야 가슴 깊이 저미는 슬픔과 견딜 수 없는 화를 피할 테니까.
그렇게 정을 깊숙하게 숨겼는데.
지금은 가슴이 타는 듯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고구마 대장’이라고, ‘바부탱이’라고 놀려댄 여인 때문에.
아무리 높지 않다고 해도 산. 무령산을 단숨에 넘고.
험하고 가팔라 찾는 이가 없다던데. 칼을 거꾸로 꽂은 듯 삐죽삐죽 솟구친 바위들 사이로 건물 지붕이 보이자,
해원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소미이이인!”
화산처럼 한꺼번에 터져 나온 감정. 무령산이 통째로 울리는 고함과 함께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내리꽂힌다.
우르르릉.
하늘도 놀랐는지 구름이 급하게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