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장 심정투로(深情透露) (3)
진도로 보호하는 통로라면 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검을 집어넣은 해원기는 평소답지 않게 지하통로를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상하좌우가 전부 구운 벽돌로 채워졌고, 일정한 거리마다 작은 유등(油燈)을 달은 일직선 길이다.
겨우 한두 사람이 다닐 좁은 통로지만, 어마어마한 재력이 투입되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내린 결정.
기관이나 매복이 없다.
백포 복면인이 말했던 것처럼 여기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통로. 기척을 숨기지 못했고, 또 입구부터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상당히 황급해서 도주하기에 바빴으며, 무너진 정자 바닥엔 따로 개폐의 간단한 장치조차 없었다는 의미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라 검왕법신으로 전신을 보호하는 걸 잊지 않았으나,
잠시 후엔 아예 풍뢰지결을 더한 신화검형으로 바꾸었다.
일 각, 또 일 각. 시간이 지날수록 더 초조해진다.
심상에 전해졌던 하화의 보패지력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남은 것이라곤 백포 복면인뿐. 이 지하통로에 함정이 있든 없든, 끝이 어디로 통하건 간에.
모조리 깨부수고라도 백포 복면인을 잡아야만 한다.
쇄애애애액.
지하통로가 귀를 찢는 파공성에 부서질 듯 흔들리고,
곧바로 눈앞에 문짝 같은 게 나타났다.
통로의 끝. 해원기가 힘주어 땅을 디디며 자세를 잡았고, 통로 안을 뒤흔들던 돌풍이 한꺼번에 앞으로 쏟아져 나가니.
펑!
산산이 조각나는 문짝 뒤로 얼핏 하얀 천이 보인다.
백포 복면인의 희한한 복장을 떠올린 해원기가 그대로 바닥을 차며 속도를 올렸다.
“으헤에엣.”
놀라서인지 괴상한 외침이 귓가를 스치고,
벼락같이 튀어나갔던 해원기가 눈앞으로 확 다가드는 형체에 급히 허리를 틀었다.
하마터면 머리를 들이박을 뻔했다.
그런데 또 옆을 막아서는 형체.
파라락.
선풍결이 전신을 회오리바람으로 감싸면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양손은 이미 검왕수, 비스듬히 기울인 어깨에선 당장이라도 고검이 뽑힐 것 같지만.
신속하게 주위를 훑는 시선에는 황당함이 어렸다.
여기 또 뭐 하는 곳이냐.
장정 두셋이 손을 맞잡아야 아우를 두께. 황궁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기둥 수십 개가 숲처럼 빽빽하게 섰다.
근엄한 예식의 전당(殿堂)에나 세울 열주(列柱)지만, 그렇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연하게 늘어선 것도 아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긴 해도 무질서하게 세워놓아서 시야가 금방 막히고, 사방 오십여 장은 통로와 같은 구운 벽돌로 촘촘히 쌓아 올린 벽. 더구나 천장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낮아 상당히 답답한 공간이다.
‘기관?’
지하통로로 뛰어들 때의 결정을 바꿔야 하나.
백포 복면인이 도주하는 척하며 함정으로 이끌었을 가능성.
조심스럽게 기둥을 피해 벽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눈썹이 꿈틀 일어선다.
벽면, 바닥, 천장, 기둥을 빠짐없이 살피던 시선이 갑자기 확 뚫리는 느낌.
바로 사선(斜線)이다.
가로와 세로는 기둥 두 개를 넘지 못하던 시야가 빗금을 그으면 다른 벽면까지 닿는다. 그리고 그 벽면에는 해원기가 부수고 들어온 것과 같은 문짝이 달려서.
해원기의 신형이 곧장 벽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마찬가지.
이쪽으로도 사선 끝의 벽면에 똑같은 문짝이 보인다. 살짝 덜 닫힌 모양으로.
‘사각형, 사방의 벽에 통로.’
이 답답한 공간은 십자로(十字路) 역할일까. 아직 용도를 밝히지 못했으나 기관이든 뭐든 살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른쪽의 덜 닫힌 문짝.
챙.
고검이 뽑히자마자 찬란한 금광이 폭발하듯 해원기의 전신을 휘감고,
군림검의 금광섬삭이 거침없이 사선을 갈랐다.
콰콰콰콰콰.
걸리는 기둥들을 쪼개며 단번에 오른쪽의 문짝을 꿰뚫는다.
펑.
어검을 손에 쥔 채. 흔히 어검비공(御劍飛空)이라고들 하지만, 지금 해원기는 검왕법신으로 군림어검대법을 전신에 부여하고 풍뢰지결의 경공까지 더한 상태. 소위 신강합일(身罡合一)의 질풍신뢰(疾風迅雷)다.
지나온 길과 같은 통로가 또 있다면 이대로 뚫고 갈 기세.
그런데.
곳곳에 유등이 걸렸던 지하통로가 아닌가.
문짝을 뚫자마자 잠깐 캄캄해졌다가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진다.
동시안이라도 순간적으로 초점을 놓칠 변화. 청각이 먼저 소리를 확인했고 눈이 급하게 방향을 따랐다.
펑, 퍼펑.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서 잡아!”
경력이 연달아 충돌하고 누군가 목청껏 부르짖는 외침에 발이 멈추었다.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한 무리가 거칠게 싸우는 광경이 보인다.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자리한 사합원. 웬만한 마을의 촌장 저택보다 훨씬 커서 오륙십 명은 수용할 크기라 단층 건물로 둘러싸인 가운데 뜰도 뜰이 아니라 연무장 같다.
어떻게 여기로 나왔을까. 쫓던 백포 복면인은 어디로 갔을까.
그보다 눈앞의 싸움.
칼과 단창 따위를 든 열댓 명이 두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간다. 열댓 명의 복장은 전부 새카만 경장, 몇 번이나 보았던 동창의 수하들인데.
그들에게 맞서는 둘은 바짝 마른 노인과 단단한 몸집의 중년 사내. 맨손으로 강하고 빠른 공세를 펼치지만, 상당히 지친 모습이라 연신 뒤로 물러나기만.
더구나 좌우의 건물에서 또 새카만 경장 차림이 줄줄이 뛰쳐나오는 판이다.
“어? 이놈은 또 어디서 나타났어?”
“뭐야, 뭐야?”
다짜고짜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 태세. 중당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또 나고,
“오조와 육조가 그놈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뇌옥 주위를 살펴!”
한 조가 네 명. 오조와 육조라는 여덟이 해원기를 향해 몰려들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당두와 번역으로 이루어지는 자들, 그리고 뇌옥이라는 단어.
해원기가 몰려드는 여덟은 눈에 두지도 않고 싸우는 무리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병기와 장력이 정신없이 오가는 권역이건만,
퍼엉!
폭음과 함께 열댓 명이 한꺼번에 뒤로 나동그라지자,
사합원 전체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든 말든 포위당했던 두 사람 앞에 선 해원기가 검을 등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은 누구고, 여기는 어딥니까?”
노인과 중년 사내가 입을 딱 벌린 채 눈만 껌뻑거린다.
나름 상당한 무공을 지녔다고 자부할 수준이다.
이름을 숨기고 은거한 근 이십 년, 한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대담하게 단둘이 이 뇌옥을 찾았다. 물론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기도 했기에.
뇌옥 전체를 부수진 못해도 사람 하나 구하는 것쯤은 가능하리라고.
그게 오산이라는 걸 발각 당하자마자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기껏해야 뇌옥이나 지키는 졸개라고 여겼던 자들이 금의위의 영반이나 동창의 당두들보다 더 강할 줄이야.
본래의 목적을 포기하고 몸을 뺄 궁리만 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는지 모를 젊은이.
불쑥 뛰어들면서 포위하던 자들의 병기에 곤죽이 될 것 같았다. 아니, 심지어 우리 두 사람의 장력까지 맞았잖나.
피하지도 않고, 검을 들어 막지도 않고.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병기를 휘둘렀던 열댓 명이 죄다 나가떨어지고, 장력은 허공을 친 것처럼 사라졌으니.
사람이 맞나?
신강합일의 여운이 남은 검왕법신을 알아볼 안목이 없어서.
노인과 중년 사내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
게다가 이 젊은이. 아직도 적이 무수한 장소에서 어째서 검을 도로 집어넣는지.
노인의 눈이 돌연 찢어질 듯 커졌다.
“그 검! 설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중년 사내가 깜짝 놀라 자신도 시선을 해원기의 어깨 위로 삐죽 솟은 고검의 손잡이로 돌리다가.
전신을 부르르 떤다.
“무, 묵 대협의, 고검?”
해원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세 개의 원이 겹친 호수(護手)와 손잡이 끝의 삼각형 운두(雲頭)가 독특하기는 해도, 그것만으로 고검을 알아보는 사람. 과거에 사부와 인연이 있었던 이들이다.
바로 몸을 돌려 두 사람 앞을 막으며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사부님을 아시는군요. 저는 해원기라고 합니다.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삐익, 삐익.
노인과 중년 사내만 정신을 차린 게 아니다. 사합원 중당에서 호각 소리가 울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던 자들이 급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사부님.
그 단어 하나에 노인과 중년 사내의 표정에 생기가 돌아왔다.
“노부는 예전에 회하방에서 영사(令師)를 뵈었던 장전민이라고, 이쪽은 같은, 노종련 낭중…….”
“여기는 동창의 비밀 뇌옥이오. 공주마마, 상덕공주께서 감금되었다는 소식에 구하러 왔다가.”
서두르는 말소리가 뒤섞여도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두 사람을 등진 해원기의 미간이 비틀렸다.
장전민과 노종련.
이름을 들은 게 얼마 전. 이런 상황에서 만날 줄은 몰랐으나.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사람이 바로 상덕공주거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백포 복면인이 도주한 곳에서.
퍼펑, 퍼펑.
“뇌옥의 위치가 어딥니까?”
장전민과 노종련이 해원기의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서로 마주 보아야 했다.
번갈아 내치는 양손.
손가락을 꼿꼿하게 폈으나 지법(指法)이 아니요, 수도처럼 보여도 수공(手功)이 아니며, 살짝 말아 쥐었다고 권(拳)이나 조(爪)일 리 없다.
동창의 수하들이 달려드는 족족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검이든 도든 단창이든 사슬이든 병기들이 죄다 두 쪽이 나서 날아가니.
꿈을 꾸는 것 같다.
잠깐 새에 서른이 넘게 쓰러진 자들이 넓은 정원을 뒤덮고,
피리리리리.
중당에서 치솟는 향전(響箭) 소리에 겨우 깨어난 노종련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저기, 왼쪽 건물이요.”
향전을 올린 건 원군을 불렀다는 의미.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장전민도 바로 노종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몸을 날릴 자세. 해원기가 이렇게 적들을 처리하는 동안 둘은 뇌옥에서 공주마마를 구해야 하잖나.
그렇지만, 자세를 잡은 채로 장전민과 노종련이 다시 넋을 잃었다.
쉬익.
해원기의 오른손에서 거센 바람 한 줄기가 뻗었다고 느끼는 순간, 공중으로 치솟던 향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그 오른손이 그리는 원을 뚫고 중당을 가리키는 왼손에,
콰앙.
지붕이 통째로 허물어져 내리는 중당. 그리고 교차했던 두 손이 왼쪽 건물을 향해 좌우로 찢는 시늉을 하자,
콰자자작.
난간이고 벽이고 창문이고 한꺼번에 뜯겨나간다.
“으웨엑.”
“케엑.”
거기에 휘말려 함께 파묻힌 자들의 비명보다 장전민과 노종련의 딸꾹질과 기침 소리가 더 크다.
“히끅.”
“컥, 콜록.”
목이 멨나, 침을 잘못 삼켰나. 뜯겨나간 건물 안으로 쇠창살이 드러났지만, 뛰쳐나갈 생각도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