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장 심정투로(深情透露) (2)
해가 뜨기 시작한다.
천외천에서 조공공에게 꽤 많은 얘기를 들어서 시각은 묘시 후반.
해원기가 밝아오는 동쪽을 등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동시안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오소민의 자취. 그러나 심상으로는 하화의 보패지력을 느낄 수 있다.
간신히 잡았던 오소민의 소매가 화살 같은 예기에 바스러지고, 눈앞에 검은 장막이 내려와 시야를 가렸다.
뒤이어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고, 자신은 지붕을 뚫고 솟구쳤으니 기껏해야 한 호흡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여덟이었다가 넷으로 줄었던 기괴한 음성, 주루 밖의 목소리, 두 줄기가 하나로 엮여 회오리치던 무지막지한 힘.
습격한 음형사의 수는 적게는 두셋에서 많게는 예닐곱일 터.
그런데 오소민뿐 아니라 음형사라는 작자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이 짧은 순간에 오소민을 제압할 수는 없다. 또 오소민이 제압되었다면 보패지력도 소실되어야 한다.
괴이한 일.
해원기가 눈을 번쩍 뜨면서 곧장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심상에 전해진 기미를 따르며 두 눈의 비췻빛이 더욱 진해진다. 티끌만 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골목 안쪽에서 조그맣게 꺼져가는 거품 하나를 발견했을 때,
문득 등에서 전해지는 기이한 감각.
애들이 대롱으로 불거나 뜰채로 뿌리며 노는 물방울 놀이. 그 놀이로 만든 거품으로 보이지만,
한겨울 해가 막 뜰 무렵에 물방울 놀이를 할 리 없고, 좁은 골목에는 애들은커녕 강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에 등 뒤에 매달린 검집이 저절로 떨어댔다. 뭔가를 알려주듯이.
해원기가 고검을 바로 검집에 넣고서 급히 검대를 끄른다.
누가 보았다면 뭘 하려는지 의아해할 희한한 행동.
검대 끝을 잡고는 대뜸 힘차게 휘둘렀으니.
화라라락.
풀리는 검대를 따라 질풍이 일고, 검집이 벼락같이 뻗는 제라섭풍(提羅攝風).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혼자 춤추는 미친 꼴인데.
쩍.
고검의 검집이 막 사라지려던 거품에 정통으로 꽂힌다. 텅 빈 공간에 보이지 않는 과녁이라도 있는 양 팽팽하게 당겨지는 검대.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검대에서부터 검집까지 한일자로 고정된 모습은 한 자루 창처럼 보인다.
해원기가 진짜 창을 다루듯 두 손으로 번갈아 검대를 쥐었고,
키이이잉.
맹렬하게 회전하는 나사관천이 검집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원으로 확장되었다. 꿰뚫으려는 나사관천에 더해진 검왕오형의 역상정위가 사그라들던 거품을 사람 크기만큼 벌리자,
해원기가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검이 아니라 손가락만 대도 터져버릴 거품. 그러나 고검의 검집, 불고초(不孤鞘)는 천하의 어떤 날카로움도 포용하고, 제라섭풍은 몰아치는 괄풍(颳風)이 아니라 펼친 그물을 오므리는 섭풍(攝風)이니.
역상정위가 기어이 꺼지려던 술법의 문을 도로 연 것이다.
은문진이라면 진도(陣圖)를 미리 설치해야 한다.
설사 진도를 찾았다 해도 진안(陣眼)을 파악하지 않고는 운용과 파해가 불가능하여, 억지로 숨겨진 문에 들어도 나갈 문을 찾지 못한다.
둔법은 더욱 복잡해서 영기(靈基)를 분별하는 게 극히 중요하다. 땅이 있다고 토둔(土遁)이 아니요, 물이 있다고 수둔(水遁)이 아니며, 빛이 있다고 광둔(光遁)이 아니기 때문.
둔(遁)은 달아나 숨는다는 뜻이라. 바위와 모래가 많으면 물이 숨고, 반면에 깊은 물이 빨리 흐르면 땅으로 달아난다. 심지어 빛이 깜빡일 때면 그사이에 어둠이 숨지 않나.
꺼져가는 작은 거품이 은문진인지 술법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술수인지.
느긋하게 따질 틈이 없었다.
오직 심상에 전해진 하화의 보패지력을 따르기에도 급급했고,
그 심정을 아는 듯 불고초가 나서주었다.
검대와 검집을 한데 말아 쥐고 거품 안으로 뛰어든 해원기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물속처럼 모호하던 것도 잠깐, 경물이 확 변했다.
‘음?’
바짝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성곽은 경사의 외성(外城)일까.
몸을 뒤로 젖히려는 순간에 주변이 또 일렁거리고,
답답한 기분이 들자마자 또 바뀌는 광경.
탁 트인 사방의 평지에 흙먼지가 뽀얗고, 잘 닦인 관도 위에 발이 닿았다.
여긴 어딘가. 햇빛이 정면으로 끼쳐 드니 방향은 동쪽.
천외천에서 골목으로 날아 내렸을 때는 분명히 해를 등지고 있었거늘.
떠오르는 태양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시야가 돌연 캄캄해져서.
음형사의 장막 같던 수법이 떠올라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지만,
이 또한 잠깐.
언제 캄캄했냐는 듯 사물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덤불 사이로 보이는 무너진 담장, 주춧돌 몇 개와 썩은 기둥 따위가 나뒹구는 아늑한 공터.
번화하던 동문대로의 좁은 골목에서 단숨에 엉뚱한 곳으로 나왔다.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을 보며 해원기가 검을 다시 등에 묶었다.
‘중중첩첩(重重疊疊), 술법이 연속으로 발동했다.’
처음엔 뛰어들었고, 다음엔 몸을 뒤로 젖혔고, 그다음엔 방향이 반대여서 고개만 쳐들었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까지 옮겨진 건 술법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단시간에 오소민과 음형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지만.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은문진이든 둔법이든 이동에 목적을 둔 술법은 반드시 개폐출입(開閉出入)의 도리를 따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 목적한 곳에 나오면 문은 닫히는 법. 닫힌 문이 다시 열릴 수는 없다.
‘과거에 온갖 술법에 정통했던 무당의 노신선(老神仙)도 거리를 늘리기만 했지 문을 연달아 설치할 순 없었다고.’
사부에게 그렇게 들었었다.
대체 무슨 술법이기에? 아니, 이런 술법이 가능하기나 한가.
다른 생각 할 때가 아니다.
해원기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고 서둘러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은 보패지력. 그 기미가 흐려지는 대신에 동시안이 몇 가지 단서를 찾아낸다.
어지럽게 찍힌 작은 발자국과 여기저기 뿌려진 경력의 흔적.
여기서 오소민이 한바탕 힘을 썼다는 걸 직감했다.
‘철적수와 옥판장, 항룡진기를 한껏 끌어올렸나…….’
오소민의 무공을 떠올리는데,
“호오! 과연 고검지주(孤劍之主)는 평범하지 않구나.”
펄럭.
주춧돌과 썩은 기둥이 나뒹구는 폐허 쪽에서 하얀 천이 나부낀다.
빳빳하게 풀 먹인 천 조각을 접어서 팔각형으로 만든 신기한 복면에,
목, 어깨, 가슴, 배, 그리고 팔과 다리에 각기 다른 천을 덧댄 옷차림.
그게 전부 백색이요, 체형에 맞게 재단하지 않아서 깃발처럼 날린다.
천외천에 등장했던 음형사가 시커먼 포대를 뒤집어쓴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
하지만, 오 장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이 복면인 또한 기척 없이 나타났고.
‘고검지주’라는 호칭.
해원기가 자세를 고치면서 왼손을 천천히 세웠다.
스윽.
번뜩이는 눈빛을 따라 단번에 기세가 펼쳐지며,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무거운 목소리가 지면을 울리는데.
백포 복면인이 두 손을 가볍게 흔들자 하얀 천이 좌우로 너울거리고.
“어지간히 급하구먼. 역시 유룡개는 남다른 사이였나 보네. 아, 여기는 통왕(通往)의 중지(重地)에 해당하는 곳이라서 꽤 신경 쓴 진도를 베풀어놓았거든. 자네의 계역(界域)으로도 쉽사리 제어하기 어려울 거야.”
맑고 밝은 말투가 친근하게까지 느껴진다.
해원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차림새가 상반되어도 중첩한 술법 끝에 기척 없이 나타난 자. 십이음형사의 하나로 의심할 수밖에 없고, 놓쳐서는 안 되기에 당장 신령검역을 펼쳤거늘.
백포 복면인의 말대로.
좌우로 너울거리는 하얀 천처럼 검역이 흩어져간다.
‘꽤 신경 쓴 진도.’ 이 공터의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해원기는 지금 진법에 갇혔다는 얘기. 신령검역이 힘을 잃는다.
그러나.
해원기는 미동도 없이 왼손을 앞에 세운 채,
다시 묻는다.
“어디 있느냐?”
치이이이잉.
지면을 울리는 단호한 음성보다 등 뒤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고검의 검명이,
소름 끼치게 공간을 울린다.
통왕의 중지라고 했으니 이곳은 중첩된 술법이 다시 다른 곳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역참.
열리고 닫히는 문이 아니라 항상 오갈 수 있는 통로란 뜻이다.
그렇기에 통로를 보호하는 진도를 신경 써서 설치했을 터.
진도를 깨면 통로가 드러난다.
어떤 진도인지 신령검역조차 힘을 잃고, 진안이 어디인지 찾을 수도 없으나.
진법을 깨뜨리는 데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진을 통째로 흔들어 뒤엎어버리는 것.
자칫하면 자신의 힘에 자신이 크게 상할 위험이 있는 무작스러운 방법이지만,
뜻을 정하자 신왕공이 홍수처럼 넘실대면서 검왕법신이 은은한 풍뢰를 머금었다.
그리고 저절로 뽑힌 군림검.
용틀임하듯 흔들리는 검신은 이미 찬란한 광채로 화했고,
머리 뒤에 후광을 두른 해원기의 왼손은 짙은 그림자로 물든다.
고오오오오.
소름 끼치던 검명이 아득하게 메아리치자,
백포 복면인이 움찔하며 황급히 양손을 겹쳤다.
“어디 감히!”
화락, 화락, 화라라라.
미친 듯이 휘날리는 하얀 천. 그리고 그 하얀 천을 따라 삽시간에 흩어지는 백포 복면인의 신형. 복면인이 수백 가닥의 천으로 바뀌어 공간을 채우는데,
해원기가 눈을 부릅뜨며 오른손을 떨쳤다.
“차앗!”
번쩍.
뻗는 건 발검제형, 베는 건 재단경위, 뚫는 건 검림소연.
수발여의, 저사직금, 수주개와의 오의가 한꺼번에 이루어졌고.
찬란한 검광과 짙은 그림자가 역상정위로 갈마든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번갯불로 뒤덮여 하얗게 지워지고,
팔방에서 몰아치는 광풍이 그 여백을 새까맣게 채워버렸다.
공간을 채우던 수백 가닥의 하얀 천이 아니라 아예 공간 자체를 소멸시키는 엄청난 광경.
어디선가 백포 복면인의 다급한 외침이 끼어들지만,
“파경편조(破鏡片照)!”
명멸하는 백뢰흑풍(白雷黑風)이 어느새 여덟 군데로 나뉘어 펼쳐진다. 마치 꽃잎이 열리듯.
흑풍이 이루는 은은한 형상은 명왕(明王)을 닮았나. 명왕이 휘두르는 백뢰는 야차(夜叉)처럼 흉맹하니.
세상에 없던 만다라(曼茶羅)다.
일정한 공간에 베풀어진 진도 따위로 어찌 우주(宇宙)를 감당하랴.
콰앙!
높다란 담장이 폭삭 주저앉고, 아담한 여섯 칸 정자가 바짝 마른 연못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런 건축물이 어디 있었던가.
그것도 해원기의 오른쪽으로 십여 장이나 떨어져서.
검을 지면에 겨눈 해원기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후, 대단한 술법에.”
말을 맺지 않고 시선이 무너진 정자 쪽을 향한다.
주춧돌과 썩은 기둥은 조경(造景)으로 놓인 커다란 바위들이었고. 허물어진 담장은 오래된 거목들이 운치 있게 심어진 곳이었다.
공터로 보였던 오른쪽에 오히려 제대로 담장을 두른 정자와 연못이 있었으니.
동시안으로도 알아채지 못했다.
멋모르고 들어섰다간 한없이 헤매게 하는 진도. 백포 복면인이 몰래 손을 썼다면 한 걸음마다 경관이 조금씩 바뀌어 동서남북조차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깨진 거울 조각이 비추는 무수한 광경에 홀려.
파경편조가 그런 효과란 걸 짐작했으나 진도가 깨지기도 전에 백포 복면인은 도주해버렸다. 기척을 감추지 못하고.
정자 바닥이었던 곳에 뚫린 구멍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백포 복면인이 황망히 도주한 지하가 바로 통로.
해원기가 잠깐 고검을 보다가 바로 움직였다.
뒤를 쫓아 오소민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 급하지만, 굳은 얼굴에 드러나는 곤혹스러움.
음형사라는 자들의 술법과 대응이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