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장 심정투로(深情透露) (1)
팍.
환하게 밝았던 실내가 졸지에 암흑천지.
등롱뿐 아니라 구석의 촛불까지 일시에 꺼졌다. 대신에 사방의 탁자 위에 요물처럼 서리는 검은 그림자들.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 기척도 없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환하던 실내가 갑자기 캄캄해지면 순간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
그러나 해원기의 동시안은 단숨에 검은 그림자들을 확인했다.
‘여덟. 전부 추측하기 어려운 능력을 지녔다.’
해원기를 가운데 놓고 사방에 두 명씩. 하나같이 시커먼 포대를 뒤집어써서 용모는 물론이요 체격도 알아볼 수 없다.
“흐흐, 누구라고 밝힌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 그래도 알고 싶다면 그냥 낚시꾼이라고 하자꾸나.”
기괴한 음성이 놀리듯 웃는데.
해원기가 오소민의 어깨를 붙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잔뜩 억눌러서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고, 한 마디 한 마디가 공간을 울려서 마치 여덟 명이 동시에 말한 듯.
“독을 쓰는 주제에 낚시꾼이라.”
같잖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굳이 부정하지 않았으니 소위 십이음형사라는 자들일 터. 절대로 만만할 리 없다.
조공공의 말이 맞다면 이들이야말로 동창의 기반을 다진 인물, 각기 하나씩 독특한 재주를 지녔다더니.
요물 같은 등장과 달리 어떤 기세도 드러내지 않아서 경계심이 더 높아졌다.
“미끼만 갖고 대어를 잡을 수 있나? 떡밥도 뿌려놓아야지. 어차피 너에겐 듣지 않으니까. 그 뭐라더라, 그래, 제탁(除濁)의 검이란 걸 한번 보고 싶어서 말이다.”
음형사 여덟의 실력을 재보려던 해원기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제탁지검을 알다니.
남의 무공을 알아내는 건 어렵다.
널리 알려진 기예라도 쓰는 이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 애들 손짓 같은 동작도 고수가 하면 기특한 절학으로 오해받는데, 독보적인 무공을 어찌 딱 짚어 알아낼 수 있겠는가.
독문(獨門)의 절학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는 게 아니다.
제탁지검은 신왕공의 청정력(淸正力)을 검으로 구현한 것. 사부가 창안하여 해원기에게 전해졌고, 사부가 강호에서 행도할 때도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었다.
하물며 ‘팔자의 언약’으로 행적을 다 지웠음에야.
정확한 명칭까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하나뿐.’
해원기가 얼굴을 굳히며 살짝 웅크렸다.
따지는 건 나중, 지금은 오소민을 구하는 게 먼저다.
어깨를 잡은 해원기의 손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맥없이 넘어가던 오소민의 머리가 왈칵 앞으로 쏟아졌다.
음형사가 기대한 대로 제탁지검을 쓰는가.
그러나,
번쩍.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오소민보다 더 빠르게 실내를 휘감는 한 줄기 검광.
어느새 뽑힌 고검이 공간을 횡단하고 해원기의 손으로 돌아왔다.
투둑, 투둑.
넓은 실내를 지탱하는 두툼한 기둥도, 양쪽 계단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짝도 가운데가 쩍 벌어지니.
탁자 위에서 해원기를 포위한 여덟 음형사가 예외일 수 없다.
시커먼 포대 가운데가 접힌 것처럼 뒤로 넘어가는데,
퍼퍼퍼퍽.
허리를 베였다고 여겼던 음형사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연기로 흩어진다.
요물처럼 등장하더니, 진짜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가.
중독되지 않았었나.
바닥에 고꾸라지던 오소민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주위를 훑었다.
“장안법(障眼法)?”
눈을 속이는 사술. 하지만, 하찮은 사술로는 해원기와 오소민을 속일 수 없거늘.
해원기가 검을 횡으로 뻗은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고명한 술법이고, 아직 풀리지 않았네.”
두 눈에는 신광이 번뜩이고, 고검에는 기세가 맺히고.
과연 흩어지던 연기가 저절로 뭉치더니 사방의 탁자 위에 다시 시커먼 포대로 일어선다.
이번엔 넷.
“섬전추풍(閃電追風)에 단홍기수(丹紅奇秀)까지. 검왕이라는 이름에 손색없는, 아, 그것보다 이쪽이 더 신기한걸. 어떻게 멀쩡한 거야?”
역시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오소민이 중독된 척했다는 게 상당히 놀라운 듯.
“흥, 신기하긴. 또 당할 줄 알았나? 사람을 어지간히 바보로 여기는군.”
오소민이 아예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냉소를 쳤다.
장안 화청궁에서 한 번, 은허로 가던 도중에 또 한 번. 두 번이나 당해서 해원기가 보명오석으로 회복시켰었다.
경사에 오기 전에 단단한 준비가 필요했고, 마침 녹림노조 방송서에게 알맞은 환약도 있었기에. 천외천 주루에 오르면서 미리 그 환약을 복용하고 하화의 보패지력을 발동시켜놓았다.
과거 벽세의 사독(邪毒)을 깨뜨렸던 성심환(省心丸)을 바탕으로 한 호심환(護心丸)에 보패지력을 더했으니 어떠한 독이라도 반 시진은 범하지 못한다.
조공공이 정신을 잃고 엎어지는 걸 보자마자 중독된 척 가장해서 배후를 끌어내려 했으나,
나타난 음형사 또한 간단치 않다.
한데.
주루 밖에서 홀연히 전해지는 목소리.
“음침지독(陰沈至毒)과 음령포화(陰靈飽和)를 다 견뎌낸 이유가 있었구나. 유룡개가 귀하디귀한 순음지체(純陰之體)일 줄이야. 의외의 소득이야.”
조금 높아진 기괴한 음성은 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해원기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천외천 계단을 오를 때부터 잠심침령을 운용해서 하다못해 서까래 아래 쥐새끼라도 기척을 숨길 수 없거늘.
여덟에서 넷으로 줄어든 시커먼 포대도, 주루 밖에서 전해지는 목소리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현도관 앞뜰에서야 은문진과 둔법 때문에 미리 알아차릴 수 없었으나, 이 주루에는 딱히 그런 흔적도 없었건만.
이건 대체 어떤 술수인지.
해원기에게 집중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오소민이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입을 놀린다.
“이런 파렴치한 작자들이. 감히 이 아가씨의 체질을 이러쿵저러쿵 논해? 하긴, 그러니까 얼굴도 내밀지 못하겠지.”
화청궁에서 당한 독이 음침지독, 은허로 가던 중에 정신을 잃게 했던 게 음령포화인 거 같지만.
순음지체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자신의 체질을 모를 리 없잖나.
[내 허리를 붙잡고 바짝 따르게.]
해원기의 전음이 먼저 귓가에 울리고,
괴이한 음성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래? 그럼 빨리 잡아야지.”
괴이한 음성도 오소민을 무시한 채 주루 밖의 목소리에 답한 것.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커먼 포대가 돌연 장막처럼 확 퍼져서 덮쳐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실내, 사방의 음형사가 거대한 장막으로 화해 공간 전체를 뒤덮는다. 해원기와 오소민만이 아니라 탁자와 의자까지 전부 집어삼킬 듯이.
막 해원기의 요대자를 붙잡던 오소민이 눈을 홉떴다.
뭐가 뭔지 모를 암흑. 순간적으로 상하좌우를 분간할 수 없고 숨까지 턱 막혀서 멀미가 날 지경인데.
해원기가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들썩거리기 시작하고, 옆으로 눕혔던 고검이 이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아간다.
‘응?’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앞에서 뒤로. 심지어 오소민의 등과 발꿈치까지 오락가락하는 고검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양.
해원기의 두 손은 놀려대는 고검을 잡으려고 헛손질만 거듭한다.
오소민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우스운 모습이었으나,
파진운보(破陣運步)를 곁들인 검왕오형의 유야무야. 진법이든 술법이든 전부 뚫고 나갈 작정이다.
말로는 길지만, 오소민이 눈 한 번 깜짝할 시간이었고.
화아아악.
일진 돌풍에 암흑이 열리면서 절반이 쪼개진 문짝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음형사가 펼친 거대한 장막을 언제 빠져나왔는지.
그러나 놀랄 겨를도 없었다.
위이이이잉!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무지막지한 힘줄기가 밀려든다.
퍼펑.
박살난 문짝이 미친 듯이 회오리쳐 시야를 가리고, 오 층이 죄다 휩쓸려 나갈 기세.
해원기가 급히 고검을 쥐고 정면을 힘차게 무찔렀다.
유야무야에서 발검제형으로.
오소민을 지키기 위해 확장했던 검왕법신의 기운이 하나로 모여든다.
펑!
문틀과 양쪽의 창문, 기둥까지 짓이기는 충격. 그러나 해원기는 막대한 압력을 풀어낼 새도 없이 급히 왼팔을 뻗어야 했다.
“어어?”
해원기를 눌러대는 압력과 반대로 공중에 거꾸로 치솟는 오소민. 충격의 여파가 여전히 회오리치면서 붙잡았던 요대자를 놓치고 중심을 잃었다.
흐트러진 자세에서도 겨우 소매를 잡아챘고,
얼핏 해원기의 눈에 오소민의 당황한 얼굴이 들어오는데.
그 순간.
핏.
화살처럼 중간을 꿰뚫는 예기. 소매 끝이 가루가 되면서 오소민이 확 멀어지고.
해원기의 눈앞에 다시 장막이 내려왔다.
오소민이 호심환을 복용하고 보패의 힘을 발동했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반 시진. 이를 고려해서 우선 천외천을 벗어나려고 했다.
상대가 쓰는 기독(奇毒)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포했는지 파악하지 못한 이상. 장소를 바꾸는 게 옳은 선택.
주루 밖에 목소리의 주인 외에 다른 매복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독과 술법 다음에 닥친 건 무지막지한 힘. 그것도 두 줄기가 하나도 엮여 기이하게 회오리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자세가 흐트러졌든, 무지막지한 힘이 또 날아들든.
해원기가 황망히 전신을 뒤틀었다. 눈앞에 내리는 암흑을 찢어내야 한다는 본능.
파진운보건 유야무야건 따질 틈이 없다. 폭풍이 몰아치고 번개가 뻗는다.
번쩍.
풍뢰결을 더한 검기가 공간을 갈기갈기 찢는데,
해원기가 내친 검을 거두지 않고 바닥을 힘껏 박찼다.
와르르르.
뇌전 뒤의 우레가 아니라 천외천이 통째로 무너지는 소리. 괴이한 음성의 웃음은 그 속에 묻혀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흐흐, 또 혼암미식(昏暗未拭)일 줄 알았느냐? 흐흐흐.”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려던 처음의 술법이 아니라 이번엔 그저 단순한 눈속임. 희롱 당했다.
그대로 지붕을 뚫고 공중으로 치솟은 해원기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짧은 틈에 오소민의 기척이 사라지다니.
희롱당한 분노보다 다급함이 앞서는데.
두 눈에 맺힌 신광이 문득 한쪽으로 향한다.
무너져 내리는 천외천의 맞은편, 동문대로의 골목으로 얼핏 사라지는 미약한 기미(機微). 기척도 없고 형태도 보이지 않지만, 그건 해원기에게도 익숙한 하화의 보패지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