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장 둔갑삼가(遁甲三家) (4)
강호 속담에 총명반피총명오(聰明反被聰明誤)라는 게 있다.
똑똑한 사람은 오히려 그 똑똑함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는 말이다. 총명한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그건 지나친 자기 과신(自己過信) 때문이다.
오소민은 총명하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함은 어려서 배운 학문만이 아니라 개방에 거두어져 팔선을 사부로 모신 세월과 순행장로랍시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린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다.
단순히 뛰어난 머리만 믿고 잘난 체하는 얄팍한 지자(智者)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해원기와 처음 만났을 때도 기루 골목에서 음식을 챙기던(?) 중이었잖나.
그런 오소민이라서,
조공공의 말이 진행될수록 본능적으로 일종의 거부감 같은 걸 느꼈다.
번화가의 특이한 주루에 홀로 등장한 인물. 기막히게도 상보감의 장인태감이었고.
하는 말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황궁이니 대내니, 이십사아문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할 사람이 강호에 얼마나 될까.
세속의 권력에 별반 관심이 없는 무림인에게는 어차피 그게 그거.
설사 개방 방주 금정령이라도 전부를 동창이라고 싸잡아 부를 것이다.
그런 내용을 조리 있게, 또 객관적으로 설명하면서 환관의 전횡에 대한 안타까움과 흔들리는 황실에 대한 충정을 드러냈고.
이를 해결하고자 강호의 협사를 끌어들인다는 참으로 대담한 계획을 세웠단다.
아홉 개의 금오혈석을 강호로 내보내면서 그중 하나가 노출되도록.
권력과 무력을 함께 얻은 자들이 역모와 미신으로 나뉜 데에는 그렇게 만든 배후가 있기 때문이요, 이 배후를 치려면 절세고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절세검왕 같은.
그리고 그 배후는 둘. 하나가 경수사에 숨은 여승이고, 또 하나가 현도관을 앞세운 여도사라는데.
녹명 외에 홍작이라는 이름까지 나왔다.
그야말로 머리가 쭈뼛하고 등골이 서늘할 얘기들.
그러나.
얘기가 충격적일수록 의심이 더 짙어지는 건 왜일까.
‘시기와 화제가 지나치게 딱 맞아떨어져. 마치 우리가 뭘 고민하는지 안다는 듯이. 둔갑삼가의 셋을 따지다가 막 네 번째를 대조주가라고 추측하자마자 틀렸다고 하면서 정답을 가르쳐 주는 격이잖아. 게다가…….’
조공공에 대한 의심을 정리하던 오소민의 시선이 해원기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칼끝처럼 날카롭게 세운 해원기의 두 눈썹 아래,
눈동자만은 되레 심연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다.
겉으로만 놀란 척, 미리 알았던 것처럼 침착하다니. 이 ‘고구마 대장’이.
해원기가 날카롭게 일어선 눈썹을 진정시키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몇 가지 물어도 되겠소?”
조공공이 이마를 훔치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지 물으시오.”
황궁의 태감답게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티는 있지만, 상당히 정성스러운 표정.
해원기의 시선이 힐끗 오소민을 스친다.
“사례태감의 일파, 어마태감의 일파. 여승 녹명과 여도사 홍작이라는 배후. 상보감의 태감으로 좌고우면이 가능했소?”
조공공이 썼던 성어를 인용했다. 대내의 세력이 이미 둘로 나뉘었다고 했으니 상보감만이 독야청청할 수는 없었을 터.
질문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조공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환관이라면 누구나 배 두 척에 발 하나씩 올려놓는 재주가 있지요. 나만이 아니라 이십사아문을 맡은 자 중에 절반은 아마.”
답상양척선(踏上兩隻船). 소위 양다리를 걸친다는 속어.
남의 눈치를 살펴 비위를 맞추는 데 이골이 난 내시다. 어떤 때는 사례태감 쪽에, 또 어떤 때는 어마태감 쪽에 붙어 살아왔다는 대답인데.
오소민이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그게 말처럼 쉬울까?”
속어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게 탐탁지 않아서였고,
조공공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저분하고 자질구레한 얘기를 굳이 하라는 거요? 어차피 표면적으로는 동창이 전권을 쥐고 있으니 누가 대놓고 반대하겠소이까. 그저 암암리에 손을 잡고 뜻을 모으는 수밖에. 굳이 따지자면, 어마태감 쪽은 내설십이아문 중의 다섯에 팔국의 서넛쯤이 될게요. 나머지는 사례태감 쪽이라고 봐야…….”
“상보감 하나만이 이쪽저쪽 오가면 눈에 확 띌 텐데?”
이제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오소민이다.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실히 하려고 캐묻는 표정이 암팡지고,
조공공의 얼굴이 조금 뒤틀렸다.
“허 참, 이렇게까지…… 후우! 알겠소.”
어쩔 수 없다는 한숨과 함께 말소리가 훌쩍 작아진다.
“나처럼 환관의 본분을 잊지 않은 이가, 에, 사사(四司)가 때마다 힘이 돼 주었구려. 쩝.”
그러면 그렇지.
오소민이 해원기에게 눈짓을 했다.
동창의 제독을 맡은 사례태감이 주류긴 해도 어마태감 쪽도 적지 않은 수. 그 가운데에서 이십사아문의 다섯이 모인 상보태감은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로 버틴 것이다.
해원기가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금오혈석이 뭔지 아오?”
속내를 털어놓은 조공공의 불만스러운 표정이 좀 더 일그러진다.
“허, 이젠 뻔한 것도 물으시는구먼. 이름 그대로 십일병출(十日竝出) 신화에 나오는 아홉 개의 태양석(太陽石)이잖소. 그 안에서 봉인되었던 육악의 힘도 찾아냈고. 진정한 사일신력(射日神力)을 회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어느 정도 성과도 있답디다. 해 대협을 여기로 모신 가장 큰 이유일 텐데…… 이거, 내가 입 아프게 떠든 게 우리 사이의 신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나 보오?”
신화를 간직한 보물.
천하무쌍의 힘이야말로 무림인을 낚기에 가장 좋은 미끼일 터. 절세검왕도 여기에 혹해 계획대로 끌려온 것이잖은가.
장안 고력사의 무덤, 낙양 용문의 빙이, 은허의 운해신조경, 그리고 계택의 육신지궁. 해원기가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을 전부 다 알고 있거늘.
일부러 사람을 시험한다고 여긴 조공공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가득한데.
해원기는 무표정하게 입만 움직인다.
“그러면 장풍보가 훔친 한 개는 어떻게 정했고, 누가 회수하도록 했소?”
금오혈석을 거론한 것은 사실 이걸 묻기 위함.
조공공의 목소리가 작아져서인지 해원기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천외천 오 층 바닥이 은은히 울릴 정도로.
오소민이 이번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오직 조공공을 쳐다볼 뿐.
조공공이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아니, 어째 시답지 않은 것만 계속 묻는지. 비록 잠시 감시하는 눈을 피했다곤 해도 우리가 얘기를 나눌 시간이 그리 넉넉한 게 아니외다. 가장 중요한 배후를 따져 보기에도 부족한. 흐으음.”
대내의 상황과 그간의 사정에다 핵심인 배후까지 다 밝혔으니.
당연히 다음 화제는 여승 녹명과 여도사 홍작이어야 한다.
예상했던 초점이 자꾸 빗나가서 절로 투덜거리게 되었으나 앞에 앉은 해원기와 오소민을 거스르기도 곤란한 일.
“장풍보는 내가 계획 속에서 비튼 부분이지만, 금오혈석은 원래 무작위로 나눈 거라. 아홉 개의 소재를 파악하고 언제 회수할지는 십이음형사(十二蔭形使)가 책임을 지는.”
“십이음형사?”
해원기의 반문이 말을 자르고 들어오자 조공공이 움찔했다.
“그, 그렇소. 동창이 막 세워졌을 때 제독태감의 일을 대행했던 열두 명의 첩형(貼刑). 환관이 판관(判官)이라는 직함을 쓸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음형(陰刑)이라고 불렀다가, 사례태감이 정식으로 독주(督主)가 되면서 음형사로 명칭을 정했지요.”
“그들은 누가 정했소?”
“당연히 선제(先帝)께서. 당시에 각기 한 가지에 뛰어난 젊은 환관을 뽑았다고 들었고, 그 바람에 그들은 태감에 오르질 못했지. 내 동기도 있었을 법한데, 그 열두 명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더이다. 몇 년 전부터는 동창 밀각에서 그들의 후임을 선발했다는 소식도 있지만…….”
“장풍무명 진자현을 열두 명이 쫓았다는 거요?”
해원기가 바짝 다그치는 기세에 눌렸는지.
조공공이 얼떨떨한 채로 눈을 껌뻑거리다가.
“그럴 리가. 본래 칠호(七號)가 담당이었지만, 일이 꼬이는 통에 십호(十號)가 나가서 정리했고. 진주언가(晋州彦家)에 약조한 금오혈석은 결국 넘겨주지 못했지요. 그 한 개는 아마 그쪽에 있을…… 그렇죠?”
불쑥 손가락 하나를 세워 해원기를 가리켰다.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고,
“으음?”
억지로 말을 참느라 억누른 목에서 묘한 소리가 난다.
닦달하던 조공공에게 의외의 반격을 당했다.
처음부터 예측했던 일이었다.
해원기에게 금오혈석이 하나 있다는 게 언젠가는 드러날 것을.
오소민과 함께 덕주의 겁표 현장을 살피면서부터 동창과 충돌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로부터 계속 해원기는 중요한 장면에 등장해 싸워온 셈이니,
안목과 지혜를 갖춘 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
진자현의 동선과 이후의 상황을 참고하기만 해도 해원기에게 혐의를 두게 된다. 진작에.
그러나 그로부터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되찾으려고 달려든 적이 없었다.
소재를 파악하고 회수를 책임진다고? 음형사라고 나타난 자가 있었던가. 당장 십이음형사라는 말도 조공공에게 들어서 알았잖나.
‘왜? 그토록 중요한 물건을 내버린 것처럼.’
오소민이 아가씨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턱을 주억거렸다.
중요한 걸 놓쳤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소재를 파악하고도 회수하지 않은 이유. 조공공이 말했듯이 해원기가 경사에 오게 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금오혈석 때문이다.
녹명도 어째서 이리 늦게 왔냐고 타박했던 기억이 겹치면서,
‘진짜 미끼!’
오소민의 손이 팔선탁의 한 귀퉁이를 부서져라 쥔다.
천하무쌍의 힘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 조공공이 이미 그런 의도로 계획을 세웠다고 했잖은가.
뭐가 남다르다는 거냐. 그녀 또한 얄팍한 지자와 마찬가지로 똑똑한 척하면서 끝내 미끼를 덥석 문 꼴.
다시금 눈앞의 조공공을 만나 떠들었던 얘기들이 번갯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상보감의 장인태감이라고. 환관 중에 여전히 충정을 품은 자라고. 동창과 이십사아문의 변질 속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다 마침내 배후를 밝혀냈다고.
그래서 강호의 도움을 받으려고 계책을 써서 이렇게 절세검왕을 경사로 끌어들였다고.
이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이 전부가 함정이라면?
해원기의 요대자에 있는 구양금오 하나가 이 함정으로 유인하기 위해 단단히 공을 들인 미끼라면?
막혔던 문제를 모조리 술술 풀어낸 조공공에게 왜 거부감과 의심이 들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이런 바부탱이!”
해원기를 부른 게 아니다. 참괴와 자책으로 스스로 욕하는 말이 기어이 입 밖으로 나왔고,
다급히 해원기를 찾는데.
파삭. 쨍그랑.
희한한 소리에 오소민의 시선이 도로 조공공에게 돌아갔다.
방금 해원기를 가리켰던 조공공의 손이 툭 떨어져,
앞에 놓인 작은 접시며 공기를 깨뜨리고,
“이, 이런! 설마, 여기를…… 윽!”
아까부터 다그치는 질문에 땀 흘리던 이마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다.
쿵.
요리 접시에 머리를 박는 어이없는 광경. 음식이 뒤범벅되고 국물이 튀고.
갑작스러운 괴변에 놀랄 새도 없이,
오소민의 홉뜨려던 눈이 확 풀어지면서 고개가 맥없이 넘어간다.
“오 형!”
해원기가 황망히 오소민을 붙잡을 때,
껌뻑, 껌뻑.
실내를 환히 밝혔던 등롱들이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기괴한 음성이 울렸다.
“마침 어울리는 얘기를 하더구나. 어찌 소재를 몰라 회수하지 못했겠나? 일을 줄여 효율을 높이려고 미루었을 뿐이지. 그물질 한 번에 싹 다 잡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흐흐흐.”
일망타진(一網打盡).
해원기와 오소민만이 아니라 조공공까지 물고기 취급하는 음성이 웃음을 흘린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잡은 손에 제탁지검을 운용하면서 팔선탁을 노려보았다.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댄 사람이 없다. 요리상을 차려 놓은 조공공 역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거늘.
중독되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냄새. 팔선탁 위에 가득 올려진 갖가지 요리에서 풍기는 향기.
펑!
팔선탁이 요리를 얹은 채 통째로 뒤집혀 날아가고, 엎어졌던 조공공이 의자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앉은 채로 탁자를 차 버린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일어섰다.
“십이음형사라는 것들이냐?”
기괴한 음성이 했던 말에서 그 정체를 파악했다.
절령제이십삼(節令第二十三) 소한(小寒)
소한이란 이름은 날씨가 한랭하나 아직 극점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의미.
동지가 지나면 차가운 기운이 빈번히 엄습해서 기온이 계속 떨어지니, 한해 중에 소한과 대한 때가 가장 춥다.
특히 북방에선 소한이 대한보다 더 추운 경우도 많아 “소한시처이삼구(小寒時處二三九), 천한지동냉도두(天寒地凍冷到抖)”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무슨 말인가? 옛사람들은 동지 후에 9일을 한 단위로 묶어 계산했기에, 10일부터 18일까지가 이구(二九)요, 19일부터 27일까지가 삼구(三九)가 된다. 즉, 소한은 바로 이구와 삼구 사이라, 천지가 얼어붙어 그 추위가 벌벌 떨게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여름의 더위는 삼복(三伏)에 있고, 한겨울의 추위는 삼구(三九)에 있다고도 한다.
모든 것이 옴츠러들고 생기를 잘 갈무리해야 하지만,
그러나 음기가 극성할수록 양기가 고개를 쳐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