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장 둔갑삼가(遁甲三家) (3)
가까운 오른쪽 계단을 택했다. 한 층, 또 한 층. 일 층부터 사 층까지는 전부 잠겼고,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혹시 매복이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던 오소민이 사 층에선 잠긴 문을 일부러 소란스럽게 흔들어보기도 했으나.
누가 내다보지도 않는다.
오 층에 들어서면서 그 까닭을 알았다.
사방 곳곳에 내걸린 등, 네 귀퉁이의 탁자마다 올려진 귀한 촛불. 그러나 중앙의 커다란 팔선탁에만 단 한 사람이 앉아있다.
백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건만 요리가 가득 올려진 유일한 팔선탁에 혼자 앉은 인물.
눈처럼 흰 백발을 곱게 늘어뜨리고, 분을 바른 것처럼 흰 얼굴에 가느다란 눈매, 동그란 콧방울 밑에는 수염 한 올 없어서 두툼한 입술이 고스란히 보인다. 불빛에 번쩍이는 화려한 금의(錦衣) 때문인지 더욱 돋보이는 풍채.
해원기와 오소민을 보자 손을 들어 반긴다.
“오오, 이제 오셨구먼. 그러지 않아도 준비한 요리가 식을까 조바심이 나던 참이라. 어서, 어서 이리 앉으시오.”
나이가 꽤 많은데도 맑은 목소리.
생면부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다니.
대장간에 천 조각을 남겨 청한 장본인이 틀림없다.
백발노인이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해원기와 오소민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본래 손님은 주인의 좌우에 번갈아 앉는 법이고. 주인의 맞은편은 밥값을 내는 자리거늘. 이래서야 내온 요리를 소개하기도 어렵구려. 쯧.”
팔선탁은 여덟에서 열 명까지 앉는 큰 탁자. 백발노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앉았다고 혀를 차지만,
오소민이 탁자 위를 훑으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서로 인사를 한 적도 없으니 주인과 손님으로 대할 사이도 아니요, 밥값 한두 푼에 놀랄 담량도 아니고, 대체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거한 한 상 차림을 든답니까?”
어이없다는 표정까지.
까칠하게 되돌려주는 반응에 백발노인이 껄껄 웃어젖혔고,
“허허허, 개방 순행장로의 입이 아주 날카롭구먼. 허허허허.”
오소민이 힐끔 해원기를 보았다.
여장한 오소민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백발노인. 역시 다른 뜻을 품고 초청했다. 더구나,
“때는 아침이지만, 어제저녁부터 제대로 식사할 틈이 없었잖소. 많이 지쳤을 거라 짐작해 나름 신경을 써서…….”
현도관에서 벌어진 일도 훤히 아는 티를 내는데.
“환관이요?”
해원기가 무뚝뚝하게 묻는 말에 웃음이 그쳤다.
백발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더니,
“흠, 하긴 요리보다 내 소개가 먼저였군. 이거 실례했소이다, 마침내 만났다는 반가움이 앞서서 말이요.”
여유를 부리고서야 두 손을 모으는 시늉.
“두 분과는 처음부터 인연이 있었건만 통성명은 이리 늦었구려. 절세검왕 해 대협과 유룡개 오 장로.”
시선만 보내는 겉치레 인사지만, 그 내용이 영 수상해서 탓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인연이라. 대체 무슨 소린지.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소개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나는 상보감(尙寶監)을 맡은 조공공(曹公公)이라 하오.”
공공(公公)은 태감을 높여 부르는 호칭.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이 백발노인이 대내 이십사아문 중 상보감의 태감일 줄이야.
조정에서 물러나 낙향하는 상보감의 태감. 그 소문을 듣고 모인 아홉 도적. 그리고 다른 재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오직 상자 안의 물건만 강탈했던 겁표 사건.
상보태감 조공공이라 자칭하는 이 백발노인이 어째서 ‘처음부터 인연이 있었다’라는 소리를 지껄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겁표 사건으로 해원기는 강호에 나서게 되었고, 현장을 조사하고자 오소민과 동행하게 되었으니까.
해원기가 눈썹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조공공.”
방온화의 조사에 따르면 그 낙향하는 표행은 완전한 허구. 눈앞에 앉은 백발노인이 제독태감보다 신비한, ‘태상’으로 의심되는 자라니.
예기치 못한 신분에 오소민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공공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많이 놀라셨나 보오. 흐음, 나는 강호의 예절을 모르고, 그쪽은 황궁의 법도에 어두울 테니. 뭐, 인사는 이쯤 합시다. 우선 차려진 음식이나 들면서.”
“어떻게 알았소?”
다시 말을 끊는 해원기. 시선이 심해처럼 깊다.
조공공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본다.
“허, 역시 신뢰가 먼저겠지. 해 대협이 어디까지 아는지 확실하진 않소만, 내가 상보감의 장인태감이니 동창을 비롯한 여러 경로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 짐작할 거요. 그래도 어느 정도 시차가 있기 마련이라, 현도관의 소란을 알고 나서야 두 분이 경사에 들어왔음을 알았소이다. 부랴부랴 숨겨놓았던 이목을 동원하고서야 겨우 행방을 찾았기에. 이 정도면 대답이 되겠소이까.”
오소민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부랴부랴? 겨우?”
믿기 어렵다는 되새김.
그러나 조공공은 여전히 착실하게 말을 이으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오. 처지가 처지이니만큼 이쪽도 살피고 저쪽도 조심해야 하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이란 거지요. 뭐, 지금은 좌우 모두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로 생각하오만. 후우.”
의미를 알기 어려운 한숨까지 덧붙인다.
뭔가 묘한 느낌.
해원기가 가만히 조공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적대하는 태도도, 도발하는 말투도 없다.
큰 주루를 싹 비우고 혼자서 기다렸으며, 습관인지 거만스러운 자세는 있어도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한다.
그 대답도 다 이치에 맞는 설명. 그러나 무엇 때문에 초청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거한 요리나 대접하려는 건 아닐 텐데.
오소민이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설마 상보감의 태감 나리께선 동창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반응을 보려고 슬쩍 비꼬아도 조공공은 개의치 않는 표정.
“동창이라. 외부에서 어떻게 보는지야 알지만, 사실 상당히 복잡한 얘기라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에, 이십사아문이 전부 동창에 속한 건 아니외다. 내설십이감(內設十二監)과 사사팔국(四司八局) 중에 자신이 누굴 섬기는지 제대로 아는 자가 몇이나 될지. 쯧쯧.”
안타깝게 혀를 차곤 얼른 말을 잇는다.
“따져볼 것도 없는 문제. 환관이란 본래 황상을 섬기는 직분이잖소. 그런데 동창이 생긴 이후로 이상하게 변해서. 누구는 동창이 조정이라도 된 듯 헛된 망상을 품지 않나, 누구는 동창에 질 수 없다고 엉뚱한 짓을 하지 않나, 또 누구는…… 이거 창피해서 더 말할 수가 없구려. 하여간 전부 크게 혼이 나야 마땅한데, 그전에 이십사아문을 엉망으로 만든 원흉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라오.”
“원흉이라면.”
“먼저 들어보시오. 이십사아문은 지금 크게 둘로 나눠진 셈. 하나는 동창의 제독인 사례태감을 받드는 쪽이고, 또 하나는 어마태감을 중심으로 은근히 동창을 미워하는 쪽이요. 뭐, 내설십이감의 으뜸인 사례태감이 남경수비직뿐 아니라 동창의 제독까지 겸임하는 바람에 질투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해도 근 이십 년 동안 이 구도는 심각해져만 갔지요. 간단히 말하면 한쪽은 아예 역모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미신에 홀렸달까. 이 때문에 황궁에는 불온한 기운이 만연해서 아슬아슬한 나날의 연속이었소.”
“역모와 미신.”
“그렇소. 겉으로야 모두가 동창, 황상의 신임을 받아 불측한 자들을 살피는 소임이오만. 속으로는 오히려 더욱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는 거외다. 오직 황상을 받들고 오직 황상께만 충성을 다해야 하는 자들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이제야 친정(親政)에 드신 황상, 그간 황상을 위해 노심초사하신 태후마마와 공주마마의 신뢰를 저버리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미력하나마 그 원인을 찾고자 무진 애를 썼지요.”
“원인은 결국 동창일 텐데.”
오소민은 추임새만 넣을 뿐,
조공공은 말하면서 흥분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열변을 계속한다.
“동집사창은 본래 황궁 내부의 기찰(機察)을 맡는 정도. 이른바 기둥의 눈과 벽의 귀 역할에 불과했거늘. 차츰 이십사아문을 휘하에 집어넣더니 금의위를 수족으로 삼아 조정의 기강까지 뒤흔드는 권력을 손에 넣었소. 한낱 내시들이 어찌 그런 야심을 품게 되었겠소? 게다가 황궁에 비장한 갖가지 무공과 유래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절학들까지. 권력과 무력을 동시에 얻은 후에는 그야말로 종심소욕(從心所欲)에 무소불위(無所不爲). 하아! 대내를 장악한 후에 강호를 직접 다스리고자 마음먹은 것도 무리가 아니지. 이렇게 어리석은!”
한탄과 자조가 뒤섞였다.
오소민이 해원기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속내를 알아보려고 장단을 맞춘 건데, 이야기가 기묘하게 흘러간다.
대체 조공공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목적이 뭘까. 정말 상보감을 맡은 장인태감일까.
말이 많으면 반드시 파탄이 나는 법.
오소민이 의혹과 의심을 드러내지 않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원흉을 찾았나요?”
원인이 권력의 야심과 무력의 획득이라고 했었다. 탄식하던 조공공이 굳은 얼굴을 들었다.
“찾았소. 그래서 이삿짐의 표행이란 계획을 세웠던 것이오. 지극히 가냘픈 희망을 담아.”
“엥!?”
추임새 대신에 나온 이상한 소리.
오소민이 눈을 깜빡이며 해원기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조공공을 본다.
얘기가 여기서 이렇게 이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러나 해원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희망을 담았다?”
오소민이 잊은 반문을 되뇌었다.
조공공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소. 강호를 재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홉 개의 금오혈석을 세상에 내보냈지요. 어차피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몇 개를 빼곤 도로 회수한다니까 꽤 흥미를 보이더이다. 덕분에 계획 일부를 살짝 어긋나게 한 것도 들키지 않았고. 과연 이렇게 해 대협을 경사에서 만나게 되었잖소. 가냘픈 희망이 기어이 이어져서. 후우우.”
마지막의 긴 한숨이 큰 짐을 내려놓고 안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고.
이번에는 해원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동창의 배후 중 하나인 ‘태상’이라 의심했던 상보감의 태감.
하지만, 조공공은 진짜 배후인 원흉을 상대하고자 자신이 겁표 사건을 꾸몄다고 말한다.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인지.
오소민이 참지 못하고 와락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가만! 지금 당신이 겁표 사건의 계획을 짰다고, 그 이유가 뭔데?”
말투가 확 거칠어졌고,
“강호에는 남의 곤란을 돕는 협사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지요. 절세검왕 같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쏟아진다.
“목적은?”
“도움을 얻어 대내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요.”
“어떻게?”
“그게, 음, 낯부끄럽지만 나로서는 원흉을 상대할 능력이 없…….”
“그래서 남에게 처리를 맡긴다. 허.”
문초하듯 몰아세우는 데도 바로바로 답이 나온다.
조공공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질문을 퍼붓던 오소민이 머리를 돌려 해원기를 보며 헛바람 소리를 내었다.
상세한 부분까지 당장 따지긴 어려우나,
조공공의 말에는 전혀 파탄이 드러나지 않았다.
대내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강호에 구원을 청한다는 계획.
동창이 이미 강호에 손을 뻗쳐 반룡령 같은 주구와 하북팽가 등의 괴뢰를 만든 상황이다. 아무나 골라서 함부로 연락할 수 없었을 터. 그렇다면 보물을 내보내 도적을 끌어들인다. 그것도 엄청난 보물과 그에 걸맞은 대단한 도적을.
아홉 개의 보물과 아홉 도적이니 어디선가 소문이 샐 가능성이 크고,
엄청난 보물과 대단한 도적이니 이 겁표 사건에 뛰어든 이 또한 놀라운 능력을 지녔을 것이다.
마침 아홉 도적 중의 하나를 눈에 뜨일 자로 슬쩍 바꾸어놓았다. 몽고와 연결된 앞잡이 냄새가 풀풀 나는 자로.
협사라면 분명히 좌시하지 않고 나선다.
그렇게 아홉 개의 보물을 되찾고 도적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단서가 드러나고,
그다음은 소위 순등모과(順藤摸瓜), 줄기를 따라가면 마침내 호박 덩어리를 찾게 된다.
적잖이 억지가 섞인 거친 계획이지만,
그 결과로 이렇게 절세검왕이 경사까지 왔잖은가.
총명한 오소민이라 조공공의 대답에 더욱 수긍할 수밖에 없는데.
“원흉이 누구요?”
해원기가 묻기를 기다렸었나. 조공공이 소매로 이마를 훔치다가 얼른 입을 연다.
“원흉이 둘이나 되지요. 하나는 경수사의 국사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여승이고, 또 하나는 현도관을 사칭해 태상이라고 불리는 여도사. 여승의 법호는 녹명, 여도사의 도호는 홍작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냈소이다.”
오소민의 눈에 해원기의 두 눈썹이 칼끝처럼 날카롭게 일어서는 게 보였다.
설마 녹명 외에 홍작이라는 이름이 나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