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6화 (366/410)

제92장 둔갑삼가(遁甲三家) (2)

오소민이 먼저 침묵을 깼다.

“뭐라고 형용할 길이 없네, 그 노야라는 분.”

몇 번이나 감탄했었으나, 이번의 표현은 조금 다른 의미. 감탄보다는 곤혹스러움이 묻어난다.

해원기가 오소민의 얼굴을 보면서 고소를 머금었다.

찌푸린 눈썹, 반짝이는 두 눈, 그리고 잔뜩 내려앉은 입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표정이다.

교도인을 아는 해원기는 오소민이 느끼는 감정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흔히 대단하다, 신기하다, 신통방통하다, 기막히다 같은 찬탄을 거듭하지만, 총명한 오소민은 점차 뭔가 농락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교도인에겐 본래 그런 면이 있었다. 세상을 전부 마음대로 주무르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

미래를 훤히 내다보는 예지라면서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현도관에 올 사람은 해원기. 녹명에게 열쇠를 얻은 강유행은 해원기에게 구해진다. 지하비고의 기관이 다시 열릴 때 강유행을 안전히 피신시킬 단서와 신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장간을 찾아와 이진원을 만나게 하곤, 이진원의 입을 통해 중요한 말을 전한다.

어지간히 사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끝까지 수수께끼로 머리를 쓰게 만든다.

남의 머리 위에 앉아서 골탕 먹는 꼴을 보며 즐기는 듯하잖나.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하나?’

더구나.

둔갑삼가가 진정한 배후라면 천공사가의 주인도 원흉 중의 하나. 그런 주제에 이렇게 상관없다는 투라니.

해원기의 간단한 설명으로는 천교진인 사 노야는 신선과 같으면서 또 천기를 뒤집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인물.

뭔가 아귀가 맞지 않고, 제정신이 아닌 듯도 하다.

‘신선이 아니라 요괴 쪽일 지도.’

별별 의심이 다 드는데,

“그분에게도 말 못 할 고충이 있겠지. 일단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잖은가.”

해원기가 속을 들여다본 듯한 소릴 해서,

오소민이 살짝 흘기곤 표정을 고쳤다.

확실히 강유행을 안전하게 피신시킨다는 문제는 해결된 셈. 또 녹호로로 들어올 때 신물인 열쇠를 해원기가 꺼냈으니 상대가 더는 강유행을 노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다음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뭐, 그렇다 쳐도 영 찜찜해. 설명을 들어도 뭔지 모를 뜬구름 잡는 소리만 전해졌고. 무엇보다 호위무사 조 아저씨의 행방은 여전히 불명. 흐음, 그나마 실마리는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녹명, 조화부인, 제갈 소저인데. 여기도 셋이네 그려, 쳇.”

조원록의 실종은 현도관을 고립시키려는 목적.

그렇다면 해원기가 도착한 이후 현도관에 등장한 자들에게서 단서를 찾는 게 합리적이다.

녹명, 조화부인, 제갈봉의 셋.

그러지 않아도 교도인이 전한 수수께끼에 골머리를 앓던 오소민이라 삼(三)이라는 숫자가 징글징글한 듯.

혀를 차며 어린애처럼 입술을 삐죽거린다.

여장을 회복한 후론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해진 걸까.

신기해서 해원기의 시선이 자꾸 그 얼굴에 머문다.

“삼색을 삼미에 붙인 큰 잘못. 삼색은 삼색지보겠지, 사가삼미의 이름이 홍작, 녹명, 백화니까. 홍작은 홍환, 녹명은 녹판, 백화는 백합이라 했고. 그런데 이게 어째서 큰 잘못인 거야. 핵심은 아무래도 맨 처음에 말한 명조운류…… 어라, 뭐 하고 있어? 나 참.”

열심히 따지다가 비로소 해원기가 쳐다보는 걸 깨달은 오소민.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지만, 양쪽 뺨으로 홍조가 슬그머니 올라오고.

얼른 손가락 세 개를 해원기 얼굴 앞에 들었다.

“집중해야지, 집중. 하여간 노야가 남긴 수수께끼에는 셋이란 숫자가 계속 나온다고. 그리고 우리는 벌써 둔갑삼가 중의 둘을 만났어. 천외삼가니 정족지세니, 삼보니 삼독이니 하는 선문답은 더 궁리를 해봐야겠지만, 흠, 둔갑삼가의 나머지 하나가 단서일까?”

서둘러 화제를 바꾼다.

삼(三).

교도인의 전언 속에 숱하게 나오는 숫자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던 세 여자를 억지로 맞춰보는 지극히 단순한 방법이지만.

어떻게든 단서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녹명은 천공사가, 제갈봉은 신산제갈. 대조주가가 빠졌고, 정체 모를 조화부인에 주목하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근거가 빈약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아는 오소민이다.

해원기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 세 개가 자신 없이 꼼지락대는데.

불쑥 손이 내려갔다.

대신 바짝 들이대는 얼굴에서 반짝거리는 눈동자.

“셋이 아니야. 하나가 더 있는 걸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제갈 소저의 말 기억하지? 다 믿기는 어려워도.”

제갈봉이 현도관으로 찾아오게 된 이유.

경수사의 주지인 묘능과 현도관의 관주를 동창의 배후로 의심해서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현도관은 황궁무고에 비장한 무수한 무공비급을 해석해낸 곳, 관주가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으로 알려졌다고.

오소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깨달은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수상한 구석이 있는 제갈봉의 말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셋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다.

그러나.

오소민이 돌연 김빠진 표정이 되어 뒤로 물러앉는다.

“과연 실제로 있을까? 있다면 이 여인은 또 누군데? 너무 막막해.”

얼굴을 보인 셋도 그 의도와 행동을 짐작하기 어려운 판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존재까지. 기껏 숫자와 인원을 맞춘 것과도 틀어지잖나.

생각할수록 복잡해지고, 따져볼수록 마땅한 방법이 없다.

오소민이 그녀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지는데,

해원기는 오히려 더 집중한다.

“아니, 제갈 소저의 반응을 보면 거짓이 아닐 걸세. 황궁무고의 무공비급을 해석했다는 말도. 어쩌면 그래서 조 아저씨의 홍운백일품을 눈여겨봤을 수 있어. 그리고.”

현도관의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당황함. 그래서 제갈봉은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았었다.

강유행과 조원록 대신에 미모의 여인을 현도관의 주인으로 알았다니.

해원기가 잠시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이야말로 진짜 세 번째가 아닐까.”

넷이 아니라 도로 셋. 천공사가와 신산제갈에 이은 세 번째 가문.

맥이 빠졌던 오소민이 급히 말을 받았다.

“대조주가!”

대조주가에는 주음결이라는 홍환의 소녀가 있었다. 어떤 무공이라도 융합하는 능력으로 천지보록을 낳게 했던.

그 능력이 지금도 남아있다면 황궁무고의 무공비급도 전부 해석해낼 수 있을 터.

해원기가 머리를 무겁게 끄덕였다.

“노야를 흉내 낸 천공사가의 녹명은 경수사에, 억울하게 딸을 잃었다고 여긴 대조주가의 후손은 현도관에, 그리고 이들이 배후임을 밝혀 가문을 부흥시키려 애쓰는 제갈 소저. 역시 둔갑삼가로군.”

교도인을 흉내 내면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여 어지럽힌다. 녹명이 동창을 장난감으로 삼았듯이.

강호에 원한을 품은 대조주가는 무림을 파괴하고 싶었기에, 현도관을 내세워 황궁에 스며들곤 대내무림을 구축했겠지.

여기에 당금의 난세를 이룬 원흉을 밝혀서 강호무림에 큰 공을 세우고자 암약한 제갈봉.

전부가 남들 앞에 나서지 않은 채 국면을 조성해왔다.

기문둔갑(奇門遁甲)에서 이름을 따 둔갑삼가로 불렀겠으나,

지금 해원기는 사람의 눈을 홀린다는 의미로 ‘둔갑’이란 단어를 썼다.

요사스럽다.

오소민이 공감을 표하려다 묘한 눈길로 해원기를 보았다.

“진짜 변하긴 했네. 지금까진 영 어수룩하더니, 으흥, 그간 일부러 ‘바부탱이’인 척한 거 아냐? 그렇다면 정말 여우 방망이, 아예 구미호(九尾狐) 찜쪄먹을 수준인데.”

놀리는 말투지만,

쳐다보는 눈길은 부드러워서. 영특해진 해원기가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그 시선이 해원기를 머쓱하게 해서,

“어, 무슨 소릴, 어험.”

괜스레 헛기침에 새로 다듬어 뒤로 묶은 머리카락만 만지작댄다.

오소민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그래도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있어. 조화부인이 누구의 사주를 받는지, 대조주가의 후손이 왜 현도관을 사칭했는지, 또 무공비급을 해석하는 능력을 어떻게…… 무엇보다 누군지를 모른다는 게. 녹명이 찾는 현도관의 보물, 그 거울을 다른 이도 원하는 걸까? 녹명과 대조주가의 후손은 서로 아는 사이? 어떻든 당장 조 아저씨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분석과 추리가 아무리 탁월해도 현재로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막막해진 느낌.

해원기가 밀실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 보세.”

강유행의 안전은 확보했다. 굳이 이 녹호로에 머물 필요가 없고,

오소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를 노리겠지. 이곳 분들이 휘말려서는 안 돼.”

다시 현도관으로.

마음을 정한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좀 나와 보시오. 희한한 게 있구려.”

뚝뚝 부러지는 말투. 처음에 해원기와 오소민을 안내했던 대장장이, 천추라는 노인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추의 쇠갈고리가 가리키는 입구의 기둥.

하얀 천 조각이 박혀서 나풀거린다.

대장간의 기둥은 오랜 세월 열에 노출되고 쇳가루를 먹어서 단단하기 이를 데 없거늘, 천 조각은 마치 도끼로 찍은 것처럼 박혔다.

아까까진 없었던 천 조각. 누가 언제 이랬는지 천추도 몰랐던 듯.

희한하다는 표현 속에 놀라움이 담겼다.

해원기가 잠시 살피다가 뽑아 들었다. 은은하게 구름무늬가 섞인 얇은 경사(輕紗) 위에 조그맣게 쓰인 글자.

-공청조찬(恭請早餐), 천외천주루(天外天酒樓).

경사를 던져 대장간의 단단한 기둥에 박아 넣는 건 대단한 공력. 얇은 경사와 그 위의 글씨는 여인이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이른 아침을 대접한다고 지정한 장소 때문에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동문대로의 천외천이란 주루, 여기서 얼마나 됩니까?”

같이 글씨를 보던 천추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소. 정동향으로 십 리가 채 안 되는 곳에 높은 누각이 줄지어 늘어선 큰 길이 나올 거요. 그곳이 동문대로고 중간쯤에 계단이 외부로 노출된 모양의 오 층 누각, 그게 천외천이외다.”

“고맙습니다. 그럼.”

사의를 표하고 바로 움직이려는데.

“부디.”

쇠갈고리로 취하는 포권. 무뚝뚝하던 천추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그 검이 황실을 향하는 경우가 없기를 바랍니다.”

뜻밖의 인사에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천추를 보자, 오소민이 한숨을 섞어 먼저 답례했다.

“후, 알겠습니다.”

대신 대답할 일이 아니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는지. 천추가 머리를 숙인 채 몸을 돌렸고, 오소민도 바로 해원기의 옷깃을 끌었다.

“어서 가자고. 또 무슨 귀신놀음이 시작되려는지 궁금해.”

동문대로의 천외천은 제갈봉이 정오에 만나자고 했던 장소. 이 천 조각은 제갈봉이 보낸 연락일까, 아니면 공교롭게 같은 장소가 된 것일까.

한때 친군지휘사사의 영반 중 하나였던 천추의 갸륵한 충정이나, 그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오소민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해원기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서둔다.

한겨울이니 묘시(卯時)인데도 어둡고,

경사의 아침 풍경은 아직 어젯밤과 이어진 듯하다.

골목에 엎어져 토하는 무리, 어깨를 서로 껴안고 비틀거리며 걷는 이들.

“동문대로는 유흥가였어. 특이하네.”

오소민이 콧등을 긁던 손으로 길 양쪽을 가리켰다.

곳곳에 보이는 취객들과 집집이 문 앞에 내걸었던 등롱을 끄는 점원들의 모습은 이곳이 불야성을 이루었던 유흥가라는 증거다.

쾌체 일로 큰 고을을 다녀보았던 해원기라 뭐가 특이한지 금세 알았다.

대부분의 오래된 성이나 큰 고을의 중심지 유흥가는 서쪽에 있다. 해가 뜨는 동쪽보다 해가 지는 서쪽이 어울리기에.

경사는 정반대.

해원기가 좌우를 살피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구조로군.”

천추의 말대로 계단이 건물 양쪽 밖에 사다리처럼 달린 누각은 바로 눈에 뜨였고,

그 천외천의 오 층만이 환하게 밝았다.

계단이 외부에 있으니 굳이 아래층들을 거칠 필요가 없다.

곧장 오 층으로 오라는 뜻인가.

해원기와 오소민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곤 서슴없이 계단에 올랐다.

이번엔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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