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5화 (365/410)

제92장 둔갑삼가(遁甲三家) (1)

이진원을 통해 듣는 ‘사 노야’의 전언.

암호 같은 구절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엉뚱한 해학에 혀를 찼던 오소민이 홉뜬 눈으로 해원기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옛이야기 정도로 치부되는 신주영웅회지만, 지금 이진원의 입에서 나온 단어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다.

천지보록을 낳은 홍환의 소녀라.

과거의 난세를 직접 겪지 않고서 그 내막을 아는 이는 드물고, 오소민도 개방팔선에게서 들었을 뿐.

그러나 지부의 출현, 신주영웅회의 몰락, 벽세의 출현 등. 그야말로 백 년이 넘게 이어졌던 난세의 서막이랄 수 있다.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이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떠한 무공이라도 융합해서 새로운 신공의 흐름을 혈행으로 보여주는 체질. 주음결(周吟潔)이란 이름이었다지요.”

“사가지공(四家之功)만이 아니라 천외의 절학조차 융합했다고 들었어요. 그렇지만 사고로 죽었고, 그 때문에 신주영웅회가 분열되기 시작했다는…….”

오소민이 성급하게 말을 받자 이진원이 손을 가만히 들어 침상 쪽을 가리켰다.

피곤함에 지쳐 잠든 강유행. 이야기가 길어지면 방해가 된다.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먼저 강 관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교도인의 안배와 그 안에 담긴 사정이 아무리 중요해도 일에는 선후가 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안전한 곳이라면.”

현도관을 떠나 폐병방으로. 이 녹호로의 헛간도 상당히 은밀한 곳이건만. 또 어디로 옮기는 걸까.

해원기와 강유행이 어떤 관계인지도 들었는지 이진원이 선뜻 물러서며 벽을 쓰다듬는다.

또다시 소리도 없이 옆으로 열리는 작은 문.

“그리 멀지 않습니다. 경위(京衛)의 삼천영(三千營)이라고 기병(騎兵)으로 이루어진 부대의 갑고(甲庫)지요. 바로 돌아올 수 있으니 오 소저는 여기 있는 게 좋겠습니다.”

원래는 이진원 혼자서 강유행을 옮겨놓고 돌아올 생각이었나 보다.

해원기가 직접 나서니 장소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고.

슬쩍 돌아보는 모습에 오소민이 알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혹시라도 우리의 행방은 여기로 끝내야 한다는 거로군요. 알겠어요, 저는 여기 머물죠.”

해원기를 감시하는 이목.

만에 하나라도 폐병방의 녹호로까지 따라붙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헛간의 밀실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조금은 번잡해도 만일을 대비한 것이리라.

‘번잡한 게 아니라 치밀한 거지.’

강유행을 조심스럽게 업는 해원기를 보면서 오소민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또한 노야라는 신통방통한 인물의 안배일 터.

냉정하게 따지면 강유행은 현재 골치 아픈 짐덩이나 마찬가지. 설사 녹명에게는 더는 주목할 가치가 없어진 사람이라고 해도 해원기와의 관계를 소홀히 여길 수는 없다. 치졸하게 인질로 잡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잖나.

어떻게든 강유행을 국면에서 빼내야만 한다.

이진원과 해원기가 떠나면서 문이 도로 벽으로 돌아오고, 오소민이 뺨을 살짝 긁었다.

‘친군지휘사사의 부지휘사였던 사람이니까. 삼천영이라, 아주 적절하군.’

삼천영은 경사를 지키는 삼대영(三大營) 중 하나. 몽고 기병을 흉내 낸 기병 부대로 평시에는 황제의 의장을 맡는다.

깃발, 수레, 병갑, 북 따위가 화려하고 다양해서 거창한 창고가 필수적.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 수두룩하며, 여차할 땐 말과 수레로 신속히 움직일 수 있다.

관제(官制)를 잘 아는 오소민으로선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고.

그러면서 또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해원기가 현도관을 떠나 대장간에 이르러선 열쇠를 보였으니. 녹명이든 아니든 눈길을 확 끌었을 게 분명하다.

“어?”

너무나 빨리 해원기와 이진원이 돌아오는 바람에 오소민이 입을 딱 벌렸다.

밀실에 혼자 남은 김에 교도인의 안배와 지금까지 겪은 일을 비교해보려 했는데,

‘그리 멀지 않은’ 정도가 아니잖나.

일각은커녕 문이 닫혔다가 바로 열린 것과 다름없는 극히 짧은 시간. 바로 옆집이라도 이렇게 빠르진 않겠다.

오소민의 심정을 훤히 아는지 해원기가 앉았던 자리로 오며 간단하게 설명한다.

“암도(暗道) 전체에 둔법이 베풀어져 있었네. 삼천영의 갑고는 이곳에서 사십 리 넘게 떨어졌다고 하시는군. 갑고에 상주하는 고직(庫直)의 관사가 강 사부의 거처야.”

해원기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

둔법도 둔법이지만, 갑고 고직의 관사라니. 의장 용품을 관리하는 자라면 경사의 오만 공인(工人)들과도 거래가 있게 마련이다. 바늘을 숨기려면 솔밭에 두라고 했던가. 강유행의 은신처로서는 그 이상 가는 곳이 없을 터.

이렇게나 치밀한 준비.

오소민의 얼굴이 저절로 이진원에게 돌아가고,

“사 노야께서 마련해놓으셨죠.”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이진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잇는다.

“이런 일도 그분에겐 그저 하찮은 잔재주에 불과하니. 흠, 강 관주는 이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면 하던 얘기를 계속하지요.”

한가하게 감탄만 할 때가 아니다.

“아시다시피 사 노야가 바로 천공사가를 맡으신 분. 백 년을 넘게 지속되었던 강호의 혼란 속에서 둔갑삼가는 전부 과거의 모습을 잃었답니다. 대조주가는 신주영웅회에 참가했다가 홍환의 소녀를 잃고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신산제갈은 일찌감치 벽세에 흡수되어 뿔뿔이 흩어진 셈이며, 천공사가 역시 신주영웅회 멸망과 운명을 같이한 처지.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던 거지요. 비록 세인의 이목에서 사라져버리긴 했어도.”

“그렇겠죠. 전통이라는 뿌리가 있으니까.”

개방의 뿌리인 팔선중. 오소민이 자연스레 공감하는데.

이진원이 얽은 얼굴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 사실은 그전에 숨겨진 비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비사가 바로 당금의 국면을 조성하게 한 근원.”

쉰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해원기와 오소민이 귀를 기울였다.

천외는 무림의 전설. 여간해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떠도는 헛소문으로 치부하는 이도 많았다.

그에 비해 둔갑삼가는 오랜 세월 강호를 위해 헌신했던 가문들.

진도와 술법에 뛰어난 신산제갈은 언제나 무림 정도의 군사(軍師)로 대접받았고,

토목건축으로 저명한 대조주가 앞에서는 어떤 성보장원(城堡莊園)도 자기 집과 다름없었으며,

기관제작과 위조에 남다른 기예를 지닌 천공사가에겐 또 누구라도 한 번 보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녀가 셋이나 있었다.

헛된 야욕에 물든 자가 강호를 어지럽히려 해도,

그 책략은 신산제갈에게 간파되고, 그 요새는 대조주가에게 무너지며, 그 세력은 천공사가에 의해 힘을 잃는다.

정도백파연맹(正道百派聯盟)이 이루어질 때, 그 중심은 당연히 둔갑삼가여야 했다.

그러나.

둔갑삼가를 전부 합해도 천외의 한 집안에 미칠 수 없었다.

천하제일지인 천문노인, 세상의 모든 재주를 지닌 예성왕, 그리고 선려(仙侶)라 칭송받은 남해선자와 해룡자.

적성문, 대관원, 해중천의 천외삼가가 등장하면서 백파연맹은 단숨에 신주영웅회로 바뀌었고.

유불선속의 사가 구분 속에서 둔갑삼가는 그저 속가의 말단에 불과했다.

신산제갈이 일찍부터 벽세에 흡수된 건 그 열등감을 견디지 못해서였을지도.

천공사가의 사가삼미 중 가장 아름다웠다는 사백화의 실종은 지부와 관련되었다는 소문.

대조주가는 병약한 딸을 고치려고 신주팔대영웅에게 맡겼다가 되레 잃고 말았잖은가.

파란만장했던 난세의 흐름 속에 둔갑삼가는 잊혔지만,

당사자는 잊지 않았을 터.

고통, 혐의, 그리고 원망을.

이진원이 얘기하는 과거의 비사를 듣다가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천공사가는 지부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라고요? 그걸 노야가 직접…….”

‘사 노야’가 천공사가의 주인임을 밝혔다면서, 이렇게 남 얘기하듯 객관적으로 평가했다는 건가.

“예. 자세한 내용은 해 공자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화상으로 얽은 이진원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그저 교도인에게 지시받은 대로 들은 얘기를 전해주기만 할 뿐.

오소민이 해원기에게 고개를 돌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연다.

“다음은 정족지계(鼎足之計)의 설명입니다. 삼(三)은 본래 조화(調和)의 극치, 삼색을 삼미에 붙인 것도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함이었고. 신과 마를 사로 견제한 것도 삼독(三毒)을 저어하려는 고심이었으나. 진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방편에 현혹되어 더욱 심한 말로로 향하게 됩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어서 남을 속이다가 자신을 속이게 될 테니. 과거를 잘 살피면 당세의 눈가림도 훤히 보일 것이라. 여기까지 말씀하셨지요.”

설명이 끝났다.

이진원도 백가장 도자명을 따라 황산의 결전에 참가했던 사람. 아는 것이 적지 않을 텐데 오직 교도인의 말을 전하기만 했다.

오소민의 눈썹이 널뛰듯 오르락내리락.

해원기가 정중히 손을 모아 예를 차린다.

“귀한 말씀 전해주셨군요.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이진원 역시 포권을 취하면서 얽은 얼굴 위로 스치는 미소.

“천만의 말씀을. 이렇게 해 공자를 도울 수 있는 게 저에겐 큰 영광입니다. 그럼 저는 다시 강 관주 쪽에 돌아가 있을 테니,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지 결정을 내리면 알려주십시오. 아, 이 대장간을 맡은 친구는 천추(天樞)라고 부르시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배웅하려던 해원기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여쭐 것이.”

지나치게 깔끔한 이진원의 행동에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던 오소민이 눈을 깜빡였다.

자신도 아직 이해가 완전히 되지 않았건만, 해원기가 먼저 물을 게 있나.

“말씀하시지요.”

“혹시 금의위 대영반 칠성검 서문창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막 몸을 돌리려던 이진원이 기이한 눈빛을 보낸다.

“만나보셨습니까?”

“네.”

“은하칠정검을 어디까지 성취했는지 보셨나요?”

“황극천운을 완성한 듯하더군요.”

“음.”

이진원의 반문과 침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몸을 돌려 해원기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제 사부님이 예전에 황궁에 머무실 때, 당시의 황제와 한 가지 약조를 맺으셨습니다. 대대로 비밀리에 황제를 지키는 금궁친위 중 한 사람에게 사부님의 검학을 전해주기로. 정식은 아니지만, 제 동문이라고 할 수 있고. 지나치게 올바른 친구라. 혹시 나중에라도 해 공자께선 손속에 사정을 두셨으면 합니다.”

맞잡은 손이 살짝 흔들린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부탁이다.

백가장 도자명이 황궁에 은거할 때의 조건이었으리. 이진원이 부지휘사가 되었던 건 강호를 살피고 은하칠정검을 완성하기 위한 방편. 그 대가로 황제의 금궁친위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오소민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까 역모의 누명을 쓰고 금궁친위의 습격을 받았다고…….”

수하를 잃고 심하게 다친 채로 ‘사 노야’에게 구해졌다고 했었다.

이진원이 손을 거두면서 몸을 돌렸다.

“황궁비고의 검학까지 섭렵한 천재랍니다. 제 다리도 바로 그가. 음, 쉬십시오.”

뜻밖의 말.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이진원은 벽면의 문으로 사라졌고,

밀실에 남은 해원기와 오소민이 서로 마주 보았다.

동문. 그러면서 이진원과 칠성장을 사정없이 습격한 장본인. ‘지나치게 올바르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으나.

그런 친구를 위해 사정하는 이진원이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탄식이 나왔다.

“허, 어떻게 저럴 수가.”

“협골(俠骨)이시로군.”

짧은 만남이었으나 비로소 교도인이 이진원에게 후사를 맡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수(愁愁)로운 감정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기구한 삶은 여기에도 있구나.

교도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전언과 그 설명을 다시 따지기 전에,

해원기와 오소민은 묵묵히 각자의 상념에 잠시 시간을 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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