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4화 (364/410)

제91장 변화막측(變化莫測) (4)

대장간이라면 모름지기 두 가지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나는 불이요, 하나는 물.

사람은 이 두 가지를 이용해 쇠를 다루는 법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장간 뒤에는 항상 장작과 항아리를 둘 헛간이 필요하다.

추레한 노인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바로 그 헛간 구석.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과 사람 하나쯤은 너끈히 들어갈 큰 항아리 수십 개를 교묘하게 얽어서 숨겨놓은 밀실이었다.

해원기의 동시안으로도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곳.

일행이 신기한 밀실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추레한 노인은 말도 없이 돌아갔고,

곧이어 또 처음 보는 이가 커다란 쟁반을 넣어주곤 물러갔다.

산발한 머리, 허름한 차림새.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아서 무뚝뚝하기 짝이 없지만,

해원기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서너 사람을 수용할 크기의 밀실은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진 듯하고, 가구라곤 침상과 낮은 탁자가 전부.

그래도 바닥에는 두꺼운 가죽을 몇 겹이나 깔아 웬만한 객잔보다 안온하다.

낯선 이가 넣어준 쟁반 위에는 김이 오르는 포실한 만두와 야채와 고기를 볶은 요리 두 종류, 그리고 조그마한 술병 세 개가 담겼다.

추레한 노인 말대로 간단한 음식이었으나 보는 순간 입안에 침이 돌 만큼 모양과 향기가 훌륭하니.

세 사람이 일단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백초환으로 막 기력을 차린 강유행뿐 아니라, 해원기와 오소민도 비로소 허기와 갈증을 느꼈다.

정체 모를 상대와 싸워서만이 아니다. 갖가지 의문을 푸느라 머리를 지나치게 썼었나 보다.

체면 차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배가 아주 고플 때는 뭐든지 맛있다지만, 기껏해야 쪄낸 만두와 가상채(家常菜) 볶음일 뿐인데.

세 사람이 서로 마주 쳐다볼 정도로 맛있었고.

메인 목을 풀려고 조그만 술병을 기울이자 기어이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오, 이런!”

“좋군.”

오소민과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술병을 살펴보자, 강유행이 웃음을 지었다.

“허허, 만두와 볶음도 그렇지만, 이렇게 뛰어난 소주(燒酒)는 나도 처음이구먼. 대체 어디서 구했을지.”

사람은 맛있는 음식과 술이 들어가야 여유가 생긴다. 잠깐 사이에 웃을 정도로 심신이 안정되었고,

오소민도 술병을 가볍게 흔들며 기분이 풀린 듯.

“이건 경사 술인가요? 화끈한데요.”

인상이 확 펴졌다.

겉으로 보기엔 단아한 백의 미녀가 기분 좋게 술병을 흔드는 모습은 영 어울리지 않지만.

“원 나라 때부터니까 꽤 오래된 술이지요. 그런데 딱히 정해진 이름은 없소이다. 이곳은 원래 북풍이 몰아치는 벌판이라 겨울이 상당히 춥고, 그건 경사가 여기로 옮겨진 후에도 바뀌지 않았으니. 왕공귀족과 공경대부야 높은 담장으로 궁궐과 저택을 둘러싸지만, 백성들이야 뭐 달라질 게 있겠소? 그래서 이런 싸구려 술로 버틸 수밖에 없어서. 흠, 순주(醇酒)의 일종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소주라고 부른다오.”

풀어진 얼굴로 강유행의 말도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한겨울.

무공을 익히지 않은 강유행으로선 이 소주가 정말 필요했을 터.

그 모습에 해원기도 마음이 놓였다.

“경사의 소주가 이렇게 열성(烈性)일 줄은 몰랐습니다.”

“소공자의 표현이 딱 맞소. 경사랍시고 사람들이 뺀들거리긴 해도 본디 연(燕) 땅이어서 북방 특유의 호장(豪壯)한 기풍이 여전히 남아있고. 그래서 술이 은근히 맵다오.”

술이 들어가면 화끈하니 뱃속까지 짜르르하지만, 그 불기운이 금세 사라지면서 전신이 푸근해진다.

사람으로 치면 직정경행(直情徑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과감히 나서면서 뒤끝도 없다고 할까.

오랜만에 한가로운 대화가 오간다.

아무리 맛있다 해도 술이다. 그것도 도수가 높은 독주.

배를 채우고 작은 술병을 절반 넘게 비우자 강유행은 노곤함을 견디기 어려운 듯.

침상에 누이자마자 금방 곯아떨어진다.

이불을 잘 덮어주고 해원기가 돌아서자 오소민이 귀를 긁적였다.

“이거 진짜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 된 기분이야. 별반 특별해 보이지도 않건만, 마치 심산유곡에 든 것처럼 조용하네.”

“하하.”

의자에 앉으며 작게 웃는 해원기.

밀실에 들어와 그저 마음 편하게 대접만 받진 않았다. 비록 ‘노야’라는 신통한 양반의 안배라곤 해도, 폐병방의 녹호로에 도착하고서부터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는데.

이 하찮은 밀실에 들자마자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대장간에 있을 추레한 노인의 기척조차 지워져 버렸다.

심산유곡이란 표현이 절로 나오게.

현도관의 지하비고에서 나온 열쇠와 봉서. 직접 본 것처럼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대비를 다 해두었다니.

현도관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장소에 밀실을 마련하고 맛있는 식사와 추위를 잊을 술까지 내놓았다.

이건 모두 평범한 강유행을 의식한 준비.

오소민의 상상 속에서 ‘노야’가 점점 거대해진다는 걸 눈치 챈 해원기로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이었지, 교도인은.

시선이 밀실 천장을 덮은 장작으로 향했다.

“뭔가 있긴 한데 전혀 모르겠군. 기관인지, 진법인지, 결계인지. 단목 형님이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울 거야. 그래도 이것만으로…….”

웃음이 사라지고,

오소민도 손에 든 술병을 내려놓는다.

“역시 지켜보는 눈이 있었겠지. 대장간 주인이나 음식을 넣어준 이도 평범하진 않지만, 이 정도로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경사는 그야말로 적의 본거지.

녹명이든 아니든, 해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감시하는 눈이 도처에 있을 공산이 크고.

굳이 은문진이나 결계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습격할 지리적 이점이 있잖은가.

또 설사 강유행의 안전은 확보했다 해도, 또 하나의 목적은 아직 실마리조차 얻지 못했다. 바로 조원록의 실종.

신통한 양반의 안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오소민이 귀를 긁던 손으로 다시 술병을 잡으려는데,

“아직 대장간 주인을 만나지도 않고서 어찌 비범하다 하시오?”

불쑥 전해지는 쉰 목소리.

해원기와 오소민이 벌떡 일어났다.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경사에는 높은 산도 큰 강도 없다. 도성이 되기 위해서는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물길을 만들어 사람이 모여 살게 해야 한다.

그래서 북쪽에서 돌을 캐왔으나 궁성과 저택을 짓기에도 넉넉하진 않았고,

그나마 남쪽에서 끌어들인 물이 있어 백성들은 그걸로 살 곳을 마련해야 했다.

북평(北平)에서 가장 흔한 건 흙. 물에 개어 찰흙이 되면 엉성하게나마 토담을 올릴 수 있고, 불에 구워 벽돌이 되면 바닥과 기둥을 다질 수 있다.

장작더미와 물 항아리에 뒤덮인 이 밀실도 기초는 흔히 보이는 토담과 벽돌.

오소민이 확인한 것처럼 별반 특별해 보이지 않는 구조인데, 흙을 바른 한쪽 벽이 마치 문처럼 옆으로 열리고,

쉰 목소리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는 오십 초반, 중처럼 머리를 박박 깎았고 전신에는 두툼한 솜옷을 껴입었다. 심한 화상을 입은 듯 온통 얽은 얼굴이 섬뜩하지만, 쑥 들어간 두 눈은 의외로 맑고. 다리가 불편한지 걸음이 조금 뒤뚱거린다.

맑은 두 눈이 침상의 강유행을 거쳐 해원기와 오소민을 차례로 스치더니.

“허, 예측하신 그대로라. 역시 기막힌 분. 허허허.”

혼잣말과 함께 웃음을 흘리다가 두 손을 모았다.

“검주(劍主)의 뒤를 이으신 분이시죠?”

예를 차리는 대상은 해원기. 해원기가 마주 손을 올렸다.

“예. 해원기입니다.”

이 사람이 찾으라는 훼병장이리라 짐작하고 먼저 자신을 밝히자,

초로의 인물이 박박 깎은 머리를 깊숙이 숙인다.

“삼가 만검의 지존을 뵙니다. 검문(劍門)의 말석에 이름을 올린 이진원(李進元)이라 합니다.”

“!”

인사하던 해원기가 움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과거에 친군지휘사사의 부지휘사였던 인물.

신주영웅회 사가지수(四家之帥)의 한 사람으로 황궁에 은거했던 백가장(百家將) 도자명의 제자.

황궁에 속했어도 자신의 사부를 도와 강호에 뛰어들었고, 고검협과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다.

황산에서 벌어졌던 최후의 결전 이후에는 소식이 완전히 끊겨서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했는데.

“사(謝) 노야의 예측은 어긋나는 법이 없군요. 현도관의 강 관주를 데리고 검왕이 올 것이며, 검왕 곁에는 반드시 절세미녀가 한 명 있을 것이라고. 허허, 그리 말씀하셨거든요.”

“음, 황산의 결전 때에 지부 마왕이 직접 밝혔듯이 친군지휘사사를 금의위로 개편하게 된 데에는 지부의 수작이 있었습니다. 금의위 통령이 냉심무혼 백양희라는 절정의 살수였으니까요. 그래서 급거 황궁으로 돌아와야만 했으나. 후우.”

“냉심무혼이나 그 휘하인 무혼사(無魂社)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내에 흐르는 기이한 암류, 그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거꾸로 당했지요. 선사께서 은밀히 마련했던 황궁 내부의 조직이 어느새 전부 붕괴되었고, 저를 비롯한 가까운 수하들이 죄다 역모의 누명을 썼으며, 금궁친위(禁宮親衛)들이 불시에 습격해서. 흐음, 제 휘하의 칠성장(七星將)은 둘만 남았고, 저도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사 노야에게 구함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로부터 신분을 바꾸고 이곳 야장에 숨어 살았습니다. 남몰래 검주를 도운 사 노야의 명에 따라. 황궁과는 인연을 끊고, 강호와는 연락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도록. 기한은 이십 년이라더니 그 전에 뵙게 되었군요.”

해원기가 궁금해할 사정들을 먼저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이것도 설마 교도인의 지시였을까.

‘절세미녀’라는 말 때문에 한껏 얌전을 빼고 있던 오소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십 년 기한. 그럼 여기 해 형과는 처음 만나는 거죠?”

서로가 낯선 사이. 다시 확인해야만 한다.

이진원이 묻는 뜻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 노야는 오직 이름과 신물(信物)만 일러주셨으니까요.”

“아, 해 형의 이름과 열쇠.”

강유행을 데리고 오는 사람 옆에 ‘절세미녀’ 한 명이 있다는 것까지 예측하지 않았던가. 해원기의 이름과 열쇠가 중요한 표시였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근 이십 년이다.

일대의 검객이었던 사람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변고를 겪고도 신의를 지켜온 세월. 내막을 모르면서 섣부른 위로를 건넬 수도 없고, 그저 감사의 뜻을 표할 수밖에.

얘기에 팔렸던 오소민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데,

화상의 흉터로 뒤덮인 이진원의 얼굴에는 따스한 기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고검협과는 전혀 다른 기질로 보였지만, 한마디 말에 다정함이 느껴진다.

처음 만나는 사이도 편히 기대게 하는 진실함.

‘과연 고검의 주인.’

이진원의 시선이 저절로 해원기의 등에 걸린 검을 스쳤다.

“먼저 사 노야가 남긴 말씀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정색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교도인의 안배. 현도관을 떠나 피신할 장소를 제공하는 것으로 끝날 리 없다. 찾으라는 훼병장으로 이진원을 배치했으니.

그러고 보니 이진원은 계속 ‘사 노야’라고 부른다.

“명조운류는 삼색(三色)을 삼미(三美)에 붙인 큰 잘못을 낳았답니다. 천외에서 삼가(三家)가 무너지고, 세상에도 삼가(三家)의 원한이 남은 것은 바로 정족(鼎足)의 구차한 계획 때문이라. 두 번 겹쳐 육악(六惡)이고, 세 번 겹쳐 구양(九陽)일지니. 이 허망한 여액(餘厄)의 처분을 전부 해 공자께 맡기는 것이야말로 끝내 버리지 못할 마지막 소원이라고. 여기까지 말씀하시곤 어쩐 일인지 기묘한 웃음을 지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고, 오소민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신통한 만큼 괴상한 성격의 교도인, 전언이라고 남긴 말조차 암호와 다름없을 줄이야.

더구나 짓궂게 미소까지 지었단다.

이진원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잇는다.

“쩝,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서. 웃고 나시더니 설명을 조금 더 해주시더군요. 본래 자세히 밝히기 어려운 천기지비(天機之秘)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시다고.”

“나 참.”

오소민이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이 무슨 엉뚱한 해학이람.

그러나 이어지는 이진원의 말에 해원기의 눈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세상의 삼가는 소위 둔갑삼가. 과거에 이미 사라진 신산제갈(神算諸葛), 천공사가(天工謝家), 대조주가(大造周家)를 가리킵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조주가는 들어본 기억이 있지요. 천지보록(天地寶錄)을 낳았다는 홍환의 소녀.”

경사에 온 이래 지금까지. 연이은 변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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