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3화 (363/410)

제91장 변화막측(變化莫測) (3)

해원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자 오소민도 미간을 잔뜩 모았다가 폈다.

경사에 와서 현도관을 찾으면 홍운백일품이 유출된 사정과 황궁 내부의 비록에 관한 단서를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의문만 더욱 짙어진다.

점점 복잡하고 모호해지는 진상. 과거의 숨겨진 사연과 얽혀서 뭐가 뭔지 헷갈리기만.

그래도 여기서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 해원기를 도와야만 한다.

“녹명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어. 노야라는 어마어마한 분을 모셨고, 삼색지보에서 유래한 이름을 지녔으니, 보고 들은 것만도 평범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겠지. 하지만 녹명이라면 왜 굳이 조화부인을 내세워서. 흠, 그리고 제갈 소저가 끼어든 것도 지나치게 공교롭단 말이야.”

생각에 잠겼던 해원기의 시선이 돌아왔다.

“공교롭다라.”

“응,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밝히진 않았어도 경수사와 이 현도관을 주목했었다며. 그럼 우리가 도착한 것, 또 녹명이 불쑥 우리를 초청한 것을 몰랐을까? 복면인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나중에 조화부인이 나선 후에야 이르렀다는 게 영. 게다가 이 주위엔 은문진이 몇 개나 설치되었건만.”

강유행을 만나 지하비고에 들어간 시간. 그 사이에 녹명은 등롱이며 길 안내할 자를 대기시켰고, 마주 앉아 얘기할 후원도 그럴듯하게 꾸며놓았다. 그 후원, 기관진도야 미리 갖추었다 해도 결계술법은 발동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제갈봉은 현도관을 어떻게 감시했고, 왜 늦게 이르렀을까.

조화부인이 설치한 은문진의 위치는 또 어떻게 파악했는지.

오소민이 해원기를 보면서 말을 잇는다.

“더구나 자기 할 말만 다 하곤 바로 화제를 바꾸었잖아. 우리가 제대로 궁금한 걸 물을 새도 없이. 그리곤 슬쩍 빌미를 주니까 다급한 척 떠났고.”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갈봉과 나눈 대화를 다시 되새겨보면 오소민의 말대로.

그녀는 자신이 황궁에서 지냈던 일과 동창의 배후, 그리고 현도관의 주인이 대내무림을 이룬 근원이라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아무리 기환요술이라고까지 불리는 놀라운 역용술을 지녔다고 해도 혼자서 황궁 안에서 정보를 모았단 건가.

제독태감의 뒤에 배후가 있다는 얘기도 해원기와 오소민이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터.

더구나 그 배후로 의심되는 경수사와 현도관 중에 현도관의 역할이 황궁무고의 무공비급을 해석한 것이라니.

듣기에는 엄청나지만, 전부 다 출처와 가치를 확인할 길이 없는 정보.

톡톡.

오소민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하고,

“반면에 우리는 그녀가 알고자 하는 걸 다 말해줬지. 물론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네!”

갑자기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제갈봉과의 대화만을 따져보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구나.

오소민이 눈을 홉뜨는데.

그그긍.

신감의 맨 안쪽 바닥이 밀려나는 소리.

강유행이 깨어나 기관을 열 때가 되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고,

동시에 해원기도 오소민이 뭘 생각했는지 알아챘다.

현도관. 녹명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을 이 현도관 안을 제갈봉은 들어왔다가 나갔다.

“보경실이 텅 비었다는 걸 아는 이가 또 있습니까?”

“음, 글쎄요. 노야께서 떠나신 후에 지하비고를 점검하면서 빈 걸 알았고. 딱히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소.”

“그럼 처음 삼 년 동안 왕래했다는 홍작이나 황궁에 거처를 마련한 녹명이 지하비고에 들어왔던 적은요?”

“녹명 소저는 단 한 번도 현도관에 찾아온 적이 없었고. 에, 홍작 소저는 처음에 기관을 살펴주느라…….”

“아 참, 노야께서 떠나실 때 홍작과 녹명도 같이 현도관을 떠났나요? 아니면 먼저?”

“그건 노야가 먼저였소. 백화 소저와 함께 가시는 걸 우리가 모두 배웅했으니까. 허,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데.”

지하에서 나오기 무섭게 오소민이 탁자에 끌어 앉히곤 연달아 질문을 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대답만 하던 강유행이 불편한 표정으로 해원기를 보았다.

몇 시진을 편히 잠들어 백초환의 약효가 완전히 퍼진 덕분에 훨씬 좋아진 안색. 그러나 깨어나자 주위엔 아무도 없었으니 상당히 놀랬을 것이요, 기껏 용기를 내 기관을 열고 나오니 거의 문초하듯 캐물어 댄다.

해원기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데.

오소민이 또 묻기 전에 강유행이 급히 소매를 뒤적인다.

“소공자, 이걸 좀 보시오.”

소매에서 끄집어낸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열쇠와 봉서.

오소민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보내야 했다.

이건 뭔가.

강유행이 바로 설명을 보탰다.

“잠에서 깨어나서 깜짝 놀랐지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해원기와 오소민이 보이지 않았기에 겁을 먹었으리라 여긴 건 오산. 이어지는 내용은 참으로 의외였다.

“지하비고의 구조가 바뀌었기에. 기관에 무슨 이상이 생겼나 싶어 급히 중추에 가보았지요. 그랬더니, 음, 처음 보는 열쇠와 이 봉서가 중추에 놓여있어서. 처음엔 소공자가 남겨놓은 줄 알았는데 열어볼 수가 없었소이다.”

강유행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봉서의 앞.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자체(字體)? 기호인가?”

방효유의 딸로 어려서 많은 공부를 한 오소민이 알아보지 못할 글자. 과두(蝌蚪)도 아니고 조적(鳥迹)도 아니어서 그냥 기호처럼 보이는데.

해원기의 눈썹이 크게 흔들린다.

세상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래된 신대의 문자, 삼황내문(三皇內文)을 교도인에게 배운 적이 있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해마루 뜯어보아라.’

해원기의 본래 이름. 교도인이 남긴 것이다.

강유행이 처음 보는 열쇠라고 했으니 녹명에게 받아서 지하비고를 열 때 썼던 것이 아니다.

이미 지하비고를 다 훑어보았거늘 이 열쇠가 어디서 나왔을까.

그리고 봉서.

평범하게 보이는 이 봉서를 강유행은 열어볼 수가 없었다고 했거늘.

해원기가 손을 대자마자 봉투가 저절로 부스러져 곱게 접은 편지가 드러나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강유행과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기울여 보게 되었다. 그래 봤자 또 알아보지 못할 글자투성이.

“해 형, 뭐라고, 뭐라고 쓴 거야?”

두 사람의 궁금한 모습에 해원기가 편지를 죽 훑어보곤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노야가 남기신 겁니다. 대황실, 즉 보경실이 열렸다가 닫히고 기관이 폐쇄되면 전해지게 해두셨다는군요. 하여간.”

더 말해 뭐하겠나.

강유행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지만, 오소민은 기가 막혔다.

“에에?”

노야라는 양반,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 심정을 뻔히 아는 해원기가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부, 지하비고는 이번에 닫히면 당분간 완전히 폐쇄된답니다. 다시 사부가 현도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그 후로는 오직 사부만이 출입할 수 있고요.”

“음? 그러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교도인을 철석같이 믿는 강유행도 눈을 크게 뜨고,

오소민은 급해졌다.

“어디, 어디로 가는데?”

경사에는 아는 곳도 없고, 아직 어떻게 할지 정하지도 못했잖나.

“여기서 동으로 삼십 리, 남으로 십오 리. 폐병방(廢兵坊) 녹호로(綠號爐)의 훼병장(毁兵匠)을 찾으라네. 열쇠를 증표로 삼으면.”

생소한 지명들이라 오소민이 어쩔 줄 모르지만.

“그쪽은 경위(京衛)나 진무사(鎭撫司)의 무관들이 자주 들르는 곳일 텐데.”

그래도 강유행이 경사의 지리를 조금 아는 듯.

경위나 진무사는 경사를 호위하는 관제이니 폐병방 녹호로는 무관들과 관계가 있는 곳일 터.

오소민이 인상을 조금 쓰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갈 곳이 생겼으니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어. 때를 놓치면 또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녹명의 등장, 조화부인과 복면인들, 그리고 제갈봉까지.

연이은 불청객이 다 물러간 지금이 기회다.

해원기가 물건을 요대자에 수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머무를 이유가 없지. 사부.”

백초환을 복용하긴 했어도 강유행은 안전한 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지하비고가 완전히 폐쇄되고 달리 머물 곳이 생겼잖은가.

해원기의 권하는 말에 강유행이 잠시 주춤하다가 즉각 떨치고 일어섰다.

“노야가 이미 안배하셨고, 소공자가 여기 있는데 꺼릴 게 뭐 있겠소? 갑시다.”

소년 시절에 겪었던 남령촌(南嶺村)에서의 흉험했던 사건. 그때 해원기의 사부가 협의로 돕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으랴.

지금 더한 위험이 닥친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인시(寅時)가 끝날 무렵인데도 한겨울이라 오히려 더 캄캄해진 듯.

지하비고를 폐쇄하고 현도관을 나서자 제대로 길도 보이지 않았지만, 해원기의 부축을 받는 강유행은 오히려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팔 한쪽을 잡혔을 뿐인데 구름에 탄 듯 전신이 둥실 떠올라 바람처럼 나아가니.

‘소공자는 이제 은공과 똑같구나.’

딱 한 번 남령촌에서 목격했던 묵세휘의 신위. 무공에 문외한이라도 신인(神人)이라는 단어를 실감했었다. 지금의 해원기가 그때의 묵세휘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상도 잠깐.

“동으로 삼십 리야.”

오소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겨우 일각 정도 지났을 뿐인데 삼십 리나 왔다니.

“사부,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해원기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한쪽을 가리켰다.

“잘 보이진 않지만, 저쪽이 폐병방으로 통하는 길일 겁니다. 본래는 경사의 대장간들이 모인 야장방(冶場坊)이었는데, 영락제 때 내전을 통해 남은 병기를 여기서 다 녹였다고 하지요. 녹호로는 야장의 이름일 겁니다.”

동네 이름의 유래까지 밝히는 건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해원기와 오소민이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간들이 모인 동네라면 화기(火氣)가 진한 곳을 찾으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매캐한 냄새도 나는 듯.

다시 강유행을 부축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대장간 이름이 녹호로이니 간판이나 녹색을 표시로 삼았을 터.

과연.

얼마 되지 않아 해원기의 동시안이 반짝 빛났다.

골목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단층 건물들. 한겨울인데도 문짝을 다 떼서 창고처럼 속이 훤히 보이고, 매캐한 탄내와 쇠 냄새가 자욱하다.

그리고 집집이 비스듬히 내건 깃발이 전부 다른 색. 강유행은 골목도 찾지 못할 어둠이지만, 해원기의 동시안은 그중의 녹색 깃발을 금방 찾아낸다.

“저기로군.”

부축하던 강유행의 팔을 놓고 먼저 접근했다.

교도인의 안배지만, 경계해서 나쁠 건 없다.

작은 대장간 안에는 화로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추레한 노인 한 명뿐. 한쪽 발을 풀무 위에 얹고 모루에 한쪽 팔을 걸친 채 웅크린 자세가 아주 능숙하다.

‘이 노인이 훼병장인가.’

우선 오소민에게 눈짓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직 문 안 열었소오오.”

조는 자세 그대로 머리도 들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이답지 않게 귀가 밝은 편. 그러나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귀가 밝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

“훼병장을 찾아왔습니다.”

나직하게 말을 건네자 노인이 웅크린 자세 그대로 스르르 몸을 돌린다. 지저분한 산발 사이로 불꽃이 튀는 듯한 눈빛. 역시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다.

잠시 해원기를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손 하나를 내미는데, 그건 쇠갈고리를 끼운 의수.

해원기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요대자에서 열쇠를 꺼내었고,

추레한 노인의 동작이 돌연 바뀌었다.

휙.

쇠갈고리가 열쇠를 채가더니 멀쩡한 손이 뭔가를 화로에 던져 넣고, 풀무를 한번 세게 밟고는 안쪽을 가리킨다.

“일행을 데리고 들어가시오. 간단한 식사와 술이 들어갈 거요. 쉬고 있으면 기다리던 사람이 올 것이고.”

뚝뚝 부러지는 말투. 해원기가 잠깐 추레한 노인을 보다가 오소민과 강유행을 손짓으로 불렀다.

해원기의 손에서 열쇠를 채가는 쇠갈고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 일행이 있다는 것도,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것도 안다.

그런데 기다리던 사람이라. 이 추레한 노인, 훼병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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