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62화 (362/410)

제91장 변화막측(變化莫測) (2)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라.

당장 머리에 녹명이 떠오르지만, 오소민이 과장되게 머리를 흔들었다.

“도고(道姑)라고요? 여기엔 중년 문사와 그를 지키는 무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도고는 수도하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 현도관이 도관이니까 당연히 도고라 여겼다는 뜻이다.

과장되게 머리를 흔들고 강유행을 언급하지 않았다.

해원기도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묵묵히 귀를 기울일 뿐.

제갈봉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휘어진다.

“중년 문사와 지키는 무사라. 그것도 제세성수에게 들었나?”

해원기와 오소민이 현도관을 찾아온 이유가 단목정의 지시라고 했으니.

오소민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제갈봉이 미간을 찡그렸다.

“흐음,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이 현도관에 주목한 건 얼마 전부터여서. 동창과 이십사아문을 죄다 돌면서 겨우 얻어들은 얘기였거든. 이런 곳에 이런 도관이 있는 줄 누가 알겠어, 경사 토박이라고 해도 모를걸? 아, 그것보다 그럼 그 중년 문사나 지키는 무사를 봤어?”

“아무도 보지 못했지요. 뭔가 단서를 얻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는 바로.”

제갈봉이 본대로 작은 뜰에서 한바탕 드잡이질을 한 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

제갈봉의 시선이 해원기에게 향했다.

“해 소제,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알겠어?”

찡그린 미간, 휘어진 눈썹. 신경을 잔뜩 집중한 제갈봉의 얼굴을 보면서 해원기가 입을 열었고.

“현신장에 버금가는 여섯, 사신지력(四神之力)을 갖춘 넷. 전부 복면을 했더군요. 그리고 조화부인이.”

“흐으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낮은 신음이 나왔다.

상당히 침중한 낯빛. 뭐를 생각하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짧게 혀를 찬다.

“쯧, 확실히 배후가 나서긴 한 것 같은데, 의도를 쉬 알기 어렵네. 조화부인, 에, 동창에선 화숙인이라고 부르며 꽤 낮게 보지만, 이 여인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말이야.”

오소민이 다시 끼어든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응, 겉으로 보기엔 밀각 대부의 심부름이나 하는 처지 같지만, 이십사아문 곳곳과도 은밀히 연결되어있고. 경수사 쪽에도 자주 왕래하거든. 의외로 그녀의 행동을 밀각에선 관여하지 않는 듯하고. 정확히 누구의 명을 받는지도 잘 몰라.”

“동창이 비대해지면서 이십사아문도 전부 그 휘하에 든 거 아닌가요? 조화부인이 그 연락책을 맡았을 수 있죠. 그래도 밀각에서 관여하지 않는다면, 음, 혹시 제독태감 직속?”

합리적인 추리.

그러나 제갈봉이 묘한 미소를 머금는다.

“후훗, 그건 무리야. 조금 듣기 거북한 얘기인데. 동창이나 다른 아문 모두 여자가 대우받는 경우는 드물거든. 내시들의 괴상한 성격이랄까.”

듣기 거북한 얘기가 내시들의 괴상한 성격인가.

더구나 조화부인 외에 이십사아문의 우두머리가 여인인 것도 몇 번이나 있었기에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여자를 홀대한다는 말이에요?”

“맞아. 내시들은 여자를 싫어하지. 아예 여자가 되려는 자들도 있어서. 주위에 늠름한 사내들만 두려고 한다니까. 흐흥.”

“윽.”

또 묘한 코웃음. 오소민이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라기보다 내시들의 망측한 성벽(性癖) 아닌가.

놀리듯 오소민에게 빙글거리는 제갈봉, 그러나 해원기는 못 들은 척 대화를 이어간다.

“조화부인의 등장이 동창의 배후와 관계있다고 봅니까?”

침중했다가 빙글거리다가. 종잡을 수 없는 제갈봉의 화술에도 대화의 주제를 놓치지 않고,

제갈봉 역시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응, 그간 그녀의 행적을 되짚어보면서 그런 의심이 들었지. 동창의 세력, 이십사아문이 몰래 키운 무력, 그 밖에 수족이나 주구로 칠 무리…… 그런데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들을 끌고 다녔어. 따로 마음대로 부릴 힘이 있다는 거고, 그럴만한 배경은.”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각의 심부름꾼이면서 밀각에선 행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대내와 강호를 통틀어 무수한 세력이 있는데도 따로 부릴 힘을 가졌다.

남양 땅의 수차제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조금 전에 장야독연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화부인은 확실히 특별했다.

그 배경이 동창의 배후인물이라는 제갈봉의 추리는 이치에 맞는다.

제갈봉이 해원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그런데, 음, 해 소제가 좀 변했네?”

“?”

눈썹을 슬쩍 올리는 해원기에게 곱게 눈을 흘기면서,

“뭐, 얼굴을 갈아붙였다는 말은 아니고. 모르겠어? 이전에는 뭐랄까, 어리숙하달까.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는데. 호호.”

왜 웃는지.

내시들의 망측한 얘기에 질색했던 오소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뭐예요, 사람을 앞에 두고. 해 형이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면서…….”

“어머, 어째 여기서 역정을 낼까? 게다가 그 차림새로 해 형이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오 장로, 아니, 오 낭자. 킥.”

오소민을 위아래로 훑으며 키득거리는 제갈봉. 현도관 안의 분위기가 바뀌는데.

해원기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제갈 소저는 혼자 왔소?”

“음? 왜……!”

가볍게 받아넘기려던 제갈봉의 안색이 홱 변했다.

드륵.

해원기가 바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하자 오소민도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닫았던 문에 손을 올리면서 해원기가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칠절둔형보로 열어놓은 곳은 그대로입니다. 누군가 은문진에 다시 손을 댄 듯하군요.”

인기척은 전해지지 않지만,

여기서 은문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해원기뿐.

제갈봉이 벌떡 일어서며 웃옷을 뒤집어 입는 것처럼 기이한 동작을 취하고,

다시 한번 눈앞에서 부잣집 백발 노복으로 변신했다.

언제 봐도 신기한 역용.

“아무도 없는 곳에 어째서, 음, 해 소제와 오 장로도 일단 몸을 피하지. 가능하면 내일 정오에 동문대로(東門大路)의 천외천(天外天)이라는 주루에서 보자고.”

“알겠습니다.”

삐꺽.

낡은 문짝이 또 소리를 내자 제갈봉이 지체 없이 신감 뒤쪽으로 몸을 날렸고,

오소민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신감의 그늘 속으로 녹아든 것처럼 스르르 사라져간다.

나타났을 때처럼 믿기 어려운 광경에,

오소민이 콧등에 주름을 잡다가,

“칫, 정말 귀신놀음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보는 얼굴에 조금 전의 긴장은 다 어디 갔는지.

탁.

열려던 문을 도로 닫고 돌아서는 해원기도 어정쩡한 표정.

“과연 오 형 말대로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원기가 다시 자리에 앉자 오소민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러모로 수상한 여자잖아. 그런데 어떻게 들락거리는 거야? 은문진? 둔법?”

“현도관은 기본적으로 은문진이나 둔법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있지. 신감 뒤쪽에 작은 구멍을 냈고, 근처에 은문진을 숨겨놓았을 거야. 마치 둔법처럼 보이지만, 제갈 소저가 쓴 건 둔형류의 신법.”

“둔형류라면.”

“음.”

딱딱하게 굳은 해원기의 얼굴을 보며 오소민이 기억을 떠올렸다.

기척을 지우는 놀라운 신법. 해원기와 처음 동행했을 때 팽조린이 썼었다.

“그렇다면.”

“제갈 소저가 일러준 은문진은 이미 전부 소멸했네. 장야독연으로 여겨진 연기를 전부 되돌렸을 때. 칠절둔형보는 단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지.”

장야독연을 되돌리면서 은문진을 전부 소멸시키곤, 일부러 은문진을 비튼 것처럼 칠절둔형보를 썼다는 얘기.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탄식한다.

“허, 이 여우 방망이…… 수상한 여자 말대로 변했군, 변했어.”

기가 막혀서 절로 속마음이 드러났고,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이 허물어졌다.

“바부탱이라더니, 이젠 여우 방망인가? 자네도 제갈 소저가 재빨리 자리를 뜨는지 시험해보라고 전음을 보냈으면서.”

누군가 은문진에 다시 손을 댔다는 핑계는 오소민의 시험이었다.

현도관에 이른 후에 연달아 마주친 상황은 하나같이 기이하기 짝이 없어서, 해원기와 오소민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녹명과의 만남, 조화부인과 복면인들의 습격, 그리고 제갈봉의 출현.

방심은 금물이다.

오소민이 입맛을 쓰게 다시곤 똑바로 앉았다.

“녹명의 짓이라고 생각해?”

진지한 목소리에 해원기가 고개를 갸웃하자,

“역시 그렇지. 헤어질 때를 보면 녹명이라는 여자, 습격을 지시했다곤 여겨지지 않아. 아니, 심지어 동창을 뒤에서 키웠다느니, 장난감으로 만들었다느니. 그다지 어울리는 성격이 아닌 것 같거든. 아까 뭐라더라, 순진해 빠진 백화요, 줏대 없는 홍작이라던데. 그런 식이면 녹명에겐 ‘혼자 잘난 척’이라고 해야 맞을걸. 그렇게 잘난 양반일수록 체면 따지는 걸 좋아하는 법이라서.”

이리저리 생각했던 걸 하나씩 풀어낸다.

해원기도 손을 들어 눈썹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노야가 셋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건 아마도 삼색지보를 의식해서겠지. 홍작은 홍환, 녹명은 녹판, 백화는 백합.”

“그러니까. 홍환은 변화니까 줏대가 없을 거고, 녹명은 법식이니까 뻣뻣하게 턱을 쳐들 테고. 흥, 순진한 백화가 제일 낫구먼. 자, 그건 그거고. 녹명이 시킨 게 아니면 조화부인은 누구 지시를 받았을까? 제갈 소저 말처럼 동창의 배후? 두 번째 허점을 대신 채워주려고?”

절세검왕 해원기에 대한 무지.

그러나 두 가지 허점은 녹명과의 대화에서 찾아냈다.

해원기에게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어서 오소민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현신장과 육악지력이 문제였어. 그런데 육악지력 말고 또 넷이 나왔단 말이야. 사륙변려의 무채상변이니 뭐니 자랑만 하다가 독연을 피우곤 내빼는 이유가 영. 그 정도로 해 형의 실력을 쟀다고 여긴 걸까? 위탁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게 날림이잖아.”

녹명의 짓이 아니라 남의 손을 빌렸다고 가정도 해보고,

“녹명의 짓으로 여기라는 것일 수도. 그럼 무슨 이득이 있을까? 책임을 전가해서 해 형과 녹명이 빨리 싸우도록?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시각을 억지로 바꾸어보기도 하는 동안.

해원기가 한 박자 늦게 말을 받았고.

“육신과 육악은 사부님의 신왕검형(神王劍形)을 상당히 연구한 티가 나더군. 엉성하게 뭉뚱그리긴 했어도. 그렇게 보면 사보상과 사흉상도 사황령을 다룬 결과일 수 있겠네.”

한참 머리를 굴리던 오소민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대충대충 넘어가지 마.”

가까운 벗이라도 무공 내력은 함부로 밝히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만 얘기해서야 알아들을 수가 있나.

당장 험악한 표정으로 따지려는데, 해원기가 선선히 설명을 덧붙인다.

“내 검왕수의 원형은 검형수고, 사부님은 그 검형수에 독특한 운용법을 창안하셨어. 공간에 검기를 배치해 적을 가두는 육신정위(六神正位)나 지면을 통해 검기를 적의 발밑에서 일으키는 천주임립(天柱林立) 같은. 더욱이 정반(正反)으로 완전히 뒤집어서 육신정위는 육살광란(六殺狂亂), 천주임립은 천살삼라(天殺森羅)로 쓰이지. 사륙변려는 육신정위와 천주임립을, 무채상변은 육살광란과 천살삼라를 구현하려던 것 같던데. 사보상으로 사흉상을 불러낸 것도 같은 이치를 적용한 게 아닌가 해서.”

말재주가 없긴.

무공에 관해서는 이처럼 간결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잖나.

오소민이 날카롭게 째려보는 거로 험악한 표정을 대신하다가,

“됐어, 됐어. 하여간 자기 사부님 얘기에는…… 어? 그걸 아는 이가 해 형 말고.”

목소리가 이상하게 뒤집히자,

“신왕검형뿐 아니라 천손검법도 일부 모사(模寫)한. 으음!”

대답하던 해원기도 말을 삼켜야 했다.

해원기야 제자니까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만, 대체 누가 신왕검형을 연구해서 사흉에다 그 이치를 적용할 수 있는가.

과거에 사부를 적대한 자들은 사부의 무공을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애썼다. 나름대로 이해한 후에는 능가할 역량을 구하려 했고.

그러나 사부의 검을 그래도 제대로 해석한 이는 오직 한 사람뿐. 천손검법을 일부분 흉내 내어 혼천검경(渾天劍景)을 만들어낸 천재. 바로 교도인이다.

그러나 교도인은 이미 완전히 세상과 연을 끊었으니. 역시 교도인처럼 아는 체를 해대던 녹명이었을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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